
대부분의 범죄자들은 면회 온 변호사를 만나면 억울함을 호소하느라 면회시간이 끝날 때까지 변호사를 놔주는 법이 없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남편을 목 졸라 숨지게 한 혐의로 구속된 가정주부 이선영씨(가명·36)는 달랐다. 자신의 사건을 맡은 변호사 앞에서 고개를 떨구고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 이씨 사건을 맡은 전순덕 변호사(39)는 “서너 차례 찾아가 설득하고 또 설득하자 그때서야 울면서 조금씩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첫마디가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생각이 잘 안 나요’라는 말이었어요. 남편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사건 당일 상황 설명을 듣고 나니 혹시 ‘폭력치사’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검찰 조서를 받아보고 나서 구체적인 변론 계획을 세울 생각입니다.”
이선영씨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11월15일 이씨는 새벽 6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지었는데, 알코올 중독자인 남편 김모씨(48)는 이미 새벽부터 마신 술로 취한 상태였다. 중학교 2학년인 큰아들(14)은 등교했고 작은아들(12)은 다리를 다쳐 수학여행에 가지 못하고 집에 남아 있었다. 술이 다 떨어지자 김씨는 외상으로 소주를 사기 위해 동네 슈퍼로 갔지만 거절당하고 돌아왔다. 남편은 이씨에게 술값을 달라고 소리 지르며 행패를 부렸고, 이씨는 남편을 피하기 위해 작은아들을 데리고 옥상으로 피신했다. 작은아들은 “그날 아빠가 두어 번 돈 달라고 소리 지르면서 엄마를 때렸다”고 말했다.
이선영씨 가족은 정부에서 나오는 생활보조금으로 간신히 연명했는데, 이날은 김과 김치로만 끼니를 때운 지 열흘이 지났을 때였다. 이씨는 반찬투정 부리는 아이들에게 불고기를 해줄 생각에 숨겨둔 비상금으로 돼지고기 세 근을 사왔다. 그런데 김씨가 이 돼지고기를 부인 몰래 가져다가 소주와 바꿔 마셨다.
“이씨는 남편이 밖에서 소주를 마시고 비틀거리면서 집안으로 들어와 부엌에 쓰러졌는데, 그 모습을 보고 무척 화가 났었다고 합니다. 줄넘기 줄로 남편 목을 감아 방안으로 끌고 들어왔대요. 그런데 갑자기 남편 상태가 이상해지니까 놀라서 밖으로 뛰쳐나갔다고 해요.”
이씨가 뛰쳐나간 뒤 큰아들과 작은아들은 아빠에게 인공호흡을 시도했다. 하지만 김씨는 그만 사망했고 이씨는 경찰에 붙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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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감 느끼는 아이들
경북 문경 출신인 이선영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러 서울에 올라왔다가 12세 연상인 노총각 김씨를 만나 결혼했다. 김씨는 공사장에서 미장(美匠) 일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결혼 초부터 술만 마시면 이씨를 폭행했다고 한다. 알코올 중독 증세가 심해진 것은 결혼 3~4년 후부터. 알코올 중독이 심해질수록 폭력 또한 심해졌고 더 이상 일하러 나가지도 않았다고 한다. 결혼 초까지만 해도 집안 청소검사를 할 정도로 깔끔한 성격이었던 남편은 점점 집안에서 술에 취해 널브러져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이씨는 큰딸과 아들 둘을 위해 남편 대신 돈벌이에 나섰다. 방문판매사원과 보험설계사뿐만 아니라 각종 허드렛일까지 닥치는 대로 했다. 하지만 남편의 폭력은 갈수록 심해졌다. 남편이 미장 일을 했기 때문에 집안에 망치, 칼 등의 공구가 있었는데, 술에 취하면 공구들을 휘둘러 아이들이 공구들을 숨겨놓기까지 했다고 한다. 김씨는 아내가 집에 없는 틈을 타 자신의 딸(15)을 성추행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딸은 가족들과 떨어져 지방도시의 한 애육원에서 지내고 있다.
전순덕 변호사는 “이선영씨는 결혼기간 내내 지속적인 가정폭력에 시달렸고, 2004년과 2005년 두 번의 자궁암 수술을 받은 뒤 절망감과 무력감에 휩싸여 지내던 중 심신이 허약해진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사건을 저지른 것 같아 보인다”고 말했다. 이씨는 수술 후 더 이상 남편 대신 가장 역할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우울증을 앓아왔으며 집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남편이 행패를 부리면 장롱 속에 숨어 있기도 했다고 한다.
이씨가 구속된 후 두 아들은 경북 문경에 있는 외할머니 집으로 보내졌다. 서울여성의전화 송란희 간사는 “아이들 또한 아버지의 지속적인 학대로 인해 마음의 상처가 큰 상태”라고 전했다. 전문기관에 의뢰해 심리검사를 했는데, 두 아이 모두 심리적으로 대단히 불안하고 감정이 억압된 심리상태를 보였다는 것. 아이들을 직접 만나본 전순덕 변호사는 “아이들은 사건 당일에 있었던 일들을 담담하게 털어놓으면서도 죽은 아빠에 대한 동정심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면서 “오히려 평화를 되찾았다는 마음인 것 같았다”고 전했다. 전 변호사는 “이씨의 딸 또한 더 이상 아빠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는 듯했다”고 덧붙였다.
“애육원에서 만난 이선영씨의 딸이 인터넷을 뒤져 경찰서에 붙잡혀 있는 엄마를 봤다면서 자기의 세 가지 부탁을 들어달라고 했어요. 엄마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또 엄마를 위해 증인을 설 테니 재판이 열리면 자기를 불러달라고요. 그리고 엄마 입술이 많이 텄다고 입술에 바르는 연고를 꼭 사다주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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