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가 운영하는 재활용 매장 ‘행복한 나눔’에서 물건을 판매하고 있는 고은아씨.
1960~70년대 영화와 드라마에서 단아하고 정숙한 여인상을 연기해 큰 인기를 모았던 고은아씨(59). 80년 TBS 드라마를 끝으로 은퇴한 뒤 대중 앞에서 모습을 감췄던 그가 2003년 2월부터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에서 운영하는 재활용 상설 매장 ‘행복한 나눔(www.kfhi.or.kr/giversmart)’ 대표를 맡아온 사실이 알려져 화제를 모으고 있다. ‘행복한 나눔’은 중고 물품을 기증 받아 판매한 수익금으로 빈민구호 활동을 벌이는 자선 단체. 고씨는 ‘행복한 나눔’ 전체 운영을 책임질 뿐 아니라 서울 청담동에 있는 ‘행복한 나눔’ 매장에서 직접 물건을 판매하기도 한다.
고씨는 그동안의 생활에 대해 “연기 활동은 안 했지만 지난 80년부터 95년까지 CBS 라디오 프로그램 ‘새롭게 하소서’를 진행하고, 97년부터는 합동영화사와 서울극장 대표를 맡는 등 사회 활동은 계속해왔다”며 “남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아 인터뷰를 피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가 오랜만에 언론 앞에 나선 것은 ‘행복한 나눔’을 좀 더 널리 알리기 위해서다.
고씨가 ‘행복한 나눔’의 대표를 맡게 된 것은 ‘새롭게 하소서’를 진행하며 알게 된 (NGO) 단체 관계자들의 설득 때문. 어린 시절부터 이웃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는 어머니를 보며 ‘나도 나누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계기가 됐다.
“저는 부산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경제적인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어요. 그런 제가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게 된 건 모두 어머니 덕분이죠. 6·25전쟁이 난 뒤 많은 사람들이 부산으로 피란을 왔는데, 저희 뒷동네가 바로 피란촌이었거든요. 어머니는 김장을 할 때나 된장, 고추장, 간장 등을 담글 때면 꼭 넉넉하게 하셔서 피란민들에게 나누어 주셨어요. 저희가 입던 옷을 가져다 피란민 아이들에게 입히시기도 했고요. 어릴 때부터 이런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레 ‘사람은 이웃과 함께 살아야 하는 거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게 됐죠.”
그래서 사람들이 NGO 활동에 전념하는 자신에게 “좋은 일 한다”며 칭찬할 때면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다고 부끄러워했다.
화려한 스타로 살던 시절보다 나누는 기쁨 깨달은 지금 더 행복해
올해는 영화 ‘난의 비가’로 데뷔한 고씨가 데뷔 40주년을 맞는 해. 고씨는 홍익대 공예과 1학년 때 한 조각가의 화실에서 친구들을 위해 모델을 서다 얼떨결에 영화배우로 데뷔한 뒤 1백 편이 넘는 영화를 촬영하며 톱스타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배우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평범한 소녀’에게 영화계는 너무 힘든 곳이었고, 고씨는 67년 스물두 살의 나이로 극장업계 대부인 곽정환씨(75·합동영화사, 서울극장 회장)와 결혼하면서 안정을 찾았다고 한다.
“결혼하고부터 영화보다 TV드라마에 주로 출연했어요. 그 당시 TV 시스템은 아침에 출근해서 드라마 찍고 저녁에 퇴근하는 식이었거든요. 집안 일과 바깥 일을 동시에 할 수 있어 좋았죠.”
그가 진정 행복해진 것은 80년 TBS와의 전속 계약이 끝난 뒤 연기 활동을 그만두고 CBS 라디오 프로그램만 진행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배우로서 화려함을 누렸던 때보다 ‘아는 이들만 조용히 자신에게 성원을 보내주던’ 이 시절이 더 행복했다고 회고한다.
“연기는 사람들에게 순간적인 감동과 기쁨을 주지만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새롭게 하소서’를 진행하는 동안에는 제 프로그램을 듣고 새롭게 살게 됐다는 사람을 많이 만났어요. 거기서 얻는 희열이 정말 대단했죠. 지금 제가 일하고 있는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같은 NGO 단체 인사들을 알게 된 것도 참 좋았고요. 그분들의 삶이 저에게 주는 가르침이 참 컸거든요. 돌이켜보면 그런 보람과 기쁨이 15년이나 한 프로그램을 맡아 할 수 있게 해준 힘이었던 것 같아요.”
고씨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이들을 만나며 일상생활에서 나누는 삶을 실천하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일주일에 한 번씩 골프장에 나갈 때마다 꼭 그 비용의 10분의 1을 모아 기부하는 것. 그가 “처음으로 공개하는 것”이라며 금고 속에서 꺼내 보여준 지갑 안에는 만원짜리 지폐가 두둑하게 모여 있었다.
“저는 골프를 칠 수 있을 만큼 여유 있는, 우리 사회에서 보면 참 혜택받은 축에 드는 사람이잖아요. 골프를 칠 때마다 그런 여유에 감사하는 마음과 죄스럽고 찜찜한 마음이 늘 함께 들었어요. 그런데 사용한 돈의 10분의 1을 따로 모아 후원금으로 내기 시작하면서 운동도 더 기분 좋게 하게 되고, 기부도 무리 없이 할 수 있게 돼 참 좋아요.”
그는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이라도 한번에 큰 돈을 기부하는 건 쉽지 않다고 말한다. 평소에 무엇이든 기부할 거리를 만들어 미리 조금씩 모아두는 것이 좋다고.
“살다 보면 ‘내가 필요 없는 걸 너무 많이 껴안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행복한 나눔’을 찾아오세요. 나누면 행복해집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는 못 쓰는 물건이 있으면 행복한 나눔에 기증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일지라도 다른 곳에서는 소중히 쓰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달라”며 “낡고 쓸모없어 보이는 물건도 행복한 나눔에 오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문득, ‘고은아’란 예명이 그에게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것은, 아니 오히려 더욱더 아름다워진 것은 바로 이 따뜻하고 고운 마음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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