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복 교수는 세계 여러 나라에 대한 폭넓은 상식을 갖춰야 밀려드는 세계화 물결에 대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최근 독도 문제와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가 연일 신문 지상을 오르내리고 있다. 지난해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문제로 나라 전체가 떠들썩했다. 불과 몇 년 전에는 반미 감정이 들끓으며 촛불 시위가 계속됐다. 우리 정부의 외교력이 지적받는 이유 중 하나가 이렇듯 미국 중국 일본 등 소위 ‘이웃나라’와의 갈등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기 때문. 하지만 한 나라의 운명과 자존심이 걸린 외교 문제를 놓고 소수 관료들의 역량만을 탓할 수는 없는 일. 훌륭한 외교 정책은 전체 국민 수준과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제 정세에 대한 혜안은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가져온 꾸준한 관심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20년 넘게 어린이와 어른 모두가 즐겨 읽는 베스트셀러 ‘먼 나라 이웃나라’의 저자 덕성여대 산업미술과 이원복 교수(59)는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87년 네덜란드 스위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편 6권이 처음 출간된 이래 일본 편, 우리나라 편, 미국 편까지 총 9개 나라를 다룬 ‘먼 나라 이웃나라’ 시리즈는 지금까지 1천만 부 이상 팔린 초 베스트셀러. 서울대 공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75년 독일로 유학을 떠난 이 교수는 유럽에 도착하자마자 ‘세계화’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임을 간파했다고 한다.
“유럽에 도착하자마자 ‘국제적인 마인드’가 필요하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어요. 식탁 위에 올려진 음식만 보아도 완전히 ‘인터내셔널’인 거예요. 버섯은 중국산, 고기는 미국산, 통조림은 또 다른 나라…. 당시 한국은 여권 한 장 만들기도 힘들 때라 ‘이렇게 식탁을 완전히 외국에 내주면 나라가 곧 망하는 것 아닌가’ 싶은 마음에 독일인들에게 물었더니 ‘벤츠 한 대 더 팔면 된다’고 대답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앞으로는 한 나라가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가지를 특화시켜야 살아남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30년 전 얘기지만 이 교수는 “지난해만 해도 독일은 미국을 제치고 전 세계 수출 1위를 차지했는데 수출 품목을 보면 자동차, 기계, 화학 관련 제품 등 몇 가지 안 된다”며 미국이나 일본 등 다른 경제 선진국들의 사정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미국은 무기와 금융서비스가 수출 품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일본은 자동차와 전자제품에 주력하고 있다는 것. 그는 “북한이나 라틴아메리카가 오늘날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도 이념과 체제를 유지시키기 위해 외국과의 교류와 다양화를 막고 자급자족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다른 나라와 우리나라 객관적으로 비교하는 것이 세계화 교육의 첫걸음
일찍부터 세계화의 필요성을 절감해온 이 교수는 세계화는 지금도 계속해서 진행 중이며 유연한 사고를 가져야만 그 거센 물결을 재치 있게 헤쳐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
“세계화는 쓰나미와 같아요. 인력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죠. 일부에서 ‘안티 세계화’ 운동을 벌이기도 하지만 각종 정보가 국경을 넘어가는 걸 막을 수 없어요. 집집마다 있는 컴퓨터며 텔레비전에 납땜질을 할 수도 없는 일이고요. 키를 넘기는 세계화 물결이 밀려왔을 때 휘청거렸다가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그런 공법을 쓰려면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져야 해요.”
이 교수가 말하는 유연한 사고방식은 세계와 한국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기존의 세계관, 역사관에서 벗어나 ‘세계 속의 한국’ ‘한국이 속해 있는 세계’에 대한 폭넓은 교양에서 비롯된다. 이 교수가 해외여행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81년 독일 유학생 신분으로 ‘소년한국일보’에 자신이 직접 경험한 유럽의 문물을 만화로 소개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외국은 하나의 단어일 뿐 피부로 와 닿는 대상이 아니었다. 격변하는 국제 사회와 지구촌 시대의 흐름에도 둔감할 수밖에 없어 자칫 외국에 대한 시각이 헛된 우월감이나 열등감으로 양극화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 교수는 시대 흐름에 걸맞은 올바른 국제 감각을 키우려면 우리의 현주소와 외국의 사정을 객관적으로 비교 검토하는 태도가 중요하겠다는 생각에 유럽의 역사와 문화는 물론 국제 정치와 경제 종교 신화 철학까지 재미있는 그림과 재치 있는 글로 소개했다고 한다.
유럽이라는 낯선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그림으로 엮은 그의 만화는 어린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86년 말 1천4백여 회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기까지 큰 인기를 모았고, 그 이듬해 ‘먼 나라 이웃나라’ 유럽편이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지난 1월 ‘미국-대통령 편’을 끝으로 20여 년 만에 ‘먼 나라 이웃나라’ 12권을 완간한 그는 지난 25년 동안 우리보다 경제 수준이 높은 나라의 역사와 문화 경제를 둘러보며 우리의 현실을 직시했다면 이제는 우리가 뻗어나가야 할 나라들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라고 말한다.
“제가 이번에 ‘먼 나라 이웃나라’ 시리즈를 끝낸 이유가 있어요. 우리 국민 스스로는 잘 못 느끼지만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녀보면 한국은 이미 선진국이라는 걸 느낄 수 있거든요. 국민소득이 높아야만 선진국이 되는 건 아니에요. 국민의 의식구조나 정치적 스펙트럼, 사회기반제도 등이 선진국 수준에 도달해 있으면 되는 거죠. 그동안 ‘먼 나라 이웃나라’에 대해 왜 선진국만 다루냐는 비판을 제기하는 분들도 있었는데 25년 전에는 부러운 나라, 우리가 꿈꾸는 나라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제 우리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으니 ‘먼 나라 이웃나라’를 끝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부터는 우리가 되고 싶은 나라, 되어야 할 나라의 모습을 고민해야 합니다.”
그가 생각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나라도, 강력한 나라도 아니다. 바로 ‘모든 면에서 존경받는 나라’다. 그는 “세계인의 존경을 받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눈을 돌려 더 많은 나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정규 교육과정에서 자세히 다루는 미국과 유럽 외에 동남아시아나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역사와 문화까지도 심도 있게 학습할 필요가 있다는 것.
“많은 사람이 선진국에 대해서는 주눅이 들고, 후진국에 대해서는 교만한 태도를 보이죠. 특히 후진국에 대해서는 배울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선진국은 이미 포화상태라 더 이상 우리가 뻗어나갈 틈이 없는 반면 소위 후진국이라고 하는, 우리가 관심을 덜 가졌던 나라들은 발전가능성이 무궁무진하거든요.”
그가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비단 경제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정보가 일부 국가에 한정될 경우 세계관이 왜곡될 우려가 있고, 한 가지 일을 보더라도 관련 국가의 역사와 문화를 알지 못하면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일본의 경우, 일본의 역사를 알지 못하면 일본 영화를 이해할 수 없어요. 일본 사람들이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 열광하는 반면 우리는 일본 영화를 보면 지루하게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 영화의 잔잔한 진행은 일본 역사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죠. 끊임없이 외세의 침입을 받은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은 일본 땅을 밟은 첫 번째 외국인이 맥아더 장군일 만큼 잔잔한 호수와 같은 역사를 가진 나라예요. 일본 사람들이 심미적이고 관조적인 것은 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이죠.”
지금 자라는 세대는 평생 직업을 세 번은 바꾸게 될 것
이 교수는 거센 세계화 물결과 낮은 출산율 등이 맞물려 머지않아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다양한 인종, 여러 민족이 어울려 살게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따라서 민족 개념도 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따라서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인식하는 방법 또한 수정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지금은 65세면 직장에서 물러나야 하지만 앞으로는 백세가 다 되도록 일을 하게 될 거라고 말하는 이 교수. 그러기에 한우물만 파기보다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까지 한국사라고 하면 중국이나 일본의 것과는 별개의 독립된 것으로 서술되어 왔어요. 하지만 독일이나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는 독일사, 프랑스사 등 자국의 역사만 따로 떼어서 배우지 않아요. 유럽사나 세계사의 일부분으로 자국의 역사를 배우죠. 우리는 한국사와 세계사를 구별해서 배워왔지만 사실 우리나라에 온 최초의 외국인이 왜 네덜란드인이었는가는 세계사적 차원에서 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어요.”
앞으로 기회가 되면 지금까지 다루지 않았던 중남미와 동남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해 소개하고, 세계 속의 한국의 역사도 책으로 펴내고 싶다는 이 교수. 그는 세계가 빠르게 변하고 있는 만큼 부모의 자녀교육관도 달라져야 한다고 말한다.
“요즘 부모 세대와 한창 자라고 있는 아이들 세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시대가 변화하는 속도가 굉장히 빨라졌다는 거예요. 과거엔 한 분야를 깊게 파는 사람이 전문가로 인정받고 성공할 수 있었지만 지금 자라는 세대는 일생에 직업을 세 번은 바꾸게 될 거예요. 급속도로 변화하는 흐름에 적응해 살아남기 위해서는 폭넓은 상식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죠. 최근 대학들이 교양 교육을 강화하는 것도 세계의 흐름에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을 길러내기 위해서예요.”
그는 많은 부모가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입시 위주의 교육에 매달리고 있는데 그것이 오히려 자녀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며 한발 앞선 부모라면 아이들이 직·간접적으로 다양한 분야에 대한 경험을 쌓고, 여행을 자주 하도록 뒷받침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여행의 가장 좋은 점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는 거예요. 자기네 나라에서 살 때는 전혀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 외국에 나가는 순간 비정상적으로 보이기도 하거든요. 그런 점에서 나와 내 나라를 객관적으로 보고, 고인 물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죠. 또한 여행은 문헌이나 자료로 보았던 것들을 현장에서 눈으로 확인하고,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요. 문헌이나 자료가 아무리 풍부해도 현장의 소리는 분명 그것과 다른 부분이 있기 때문에 문헌이나 자료만 보아서는 잘못된 지식을 얻을 수 있거든요.”
하지만 여행의 효과는 영원하지 못하다는 게 이 교수의 생각이다. 여행하는 동안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았다가도 다시 내 나라로 돌아와 오래 머물다 보면 금세 잊어버린다는 것. 유럽에서의 유학생활과 미국에서의 교환교수 생활을 바탕으로 ‘먼 나라 이웃나라’를 집필한 이 교수가 요즘도 한 달에 두 번은 외국을 방문해 새로운 정보와 흐름에 눈과 귀를 활짝 열고, 여러 국제 현안에 대해 현지인들과 의견을 주고받는 것도 오랜 외국생활에서 얻은 국제 감각을 녹슬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많은 엄마들이 ‘누가 그렇게 하는 게 좋은 줄 몰라서 안 하냐’고 반문해요.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다른 집 사정과 비교하면 우리 아이가 뒤지는 것 아닌가 하고 조바심이 난다는 거죠. 내 자식이 성공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인데 누군가 먼저 고리를 끊어야 해요. 우리나라 사람들 특성상 누군가 먼저 과감히 고리를 끊으면 금세 흐름이 바뀌거든요.”
최근 갈등의 골이 깊어만 가는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 교수는 “일본 젊은이들이 한국 가수와 욘사마에 열광하고, 우리 아이들은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며 문화적으로 가까워지고 있는 이상 정치적 갈등은 크게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 더군다나 그는 “한·중·일 세 나라의 인구가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세 나라의 미래는 상호간의 이해와 협력의 정도에 달려 있다”며 최근의 한·중·일 관계에 대해 부모가 언론의 보도에 감정적으로 대응할 게 아니라 우리나라가 정치적 스펙트럼을 넓혀가는 과정에서 겪는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며 이러한 갈등을 통해 세 나라의 관계가 더욱 발전적으로 자리 잡을 것임을 자녀에게 일러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성공에 대한 조바심과 다른 사람들의 행위에 우왕좌왕하는 태도를 버리고, 지속적으로 폭넓은 교양을 쌓는 것. 이 교수는 그것만이 급변하는 세계 정세에 슬기롭게 대처하는 지혜를 가져다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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