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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만나고 싶었습니다

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자전소설 ‘그 남자네 집’ 펴낸 소설가 박완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던 그 시절, 경제부흥의 주체는 여자였음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 기획·구미화 기자 ■ 글·박윤희‘자유기고가’ ■ 사진·정경택 기자

2005. 01. 10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돼 서른아홉의 나이로 늦깎이 작가가 된 박완서 선생이 ‘오래된 농담’ 이후 4년 만에 신작을 펴냈다. 전후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자전소설 ‘그 남자네 집’이 그것. 오랜만에 신작을 내놓고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출신 문인들을 집으로 불러 모은 박완서 선생을 만났다.

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자전소설 ‘그 남자네 집’ 펴낸 소설가 박완서

최근소설가 박완서 선생(74)이 자전소설 ‘그 남자네 집’을 내놓았다. ‘오래된 농담’ 이후 4년만의 신작이자 열다섯 번째 장편소설인 이 작품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50년대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오래된 농담’이 악의 꽃처럼 피어나는 천박한 자본주의를 내리치는 죽비였다면 ‘그 남자네 집’은 첫사랑의 열기나 광기만큼 숨 가쁘게 진행된 초기 자본주의 발아과정을 담아낸 촘촘한 채집망이다. 작가는 전쟁의 잿더미에서 경제의 불씨를 살려내는 일, 그것은 우리의 어머니, 누나, 언니 즉 ‘여성’들의 몫이었다는 사실을 특유의 명징한 문체로 증언해냈다. 여기에 전쟁으로 궁핍해진 시대에도 부부 사이의 권태를 못 견뎌 하고 첫사랑과 외줄타기를 하는 도발적인 인간상을 생생하게 그려 넣어 새삼 그가 타고난 이야기꾼이란 사실을 실감하게 한다.
지난 12월10일 경기도 구리시 아치울 마을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았다. 마침 그는 거실에 앉아 통유리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한 몸에 받으며 시집을 읽고 있었다. 창 밖에는 아차산의 넓은 양 어깨가 펼쳐져 있고 그 넉넉한 품에 폭 안긴 듯한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살구나무, 자두나무, 앵두나무 등 유독 햇빛을 좋아하는 과실수들이 가지치기가 잘된 정갈한 모습으로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끔 책을 읽다가 ‘쿵’소리에 깜짝 놀랄 때가 있어요. 해질 녘 쯤 유리창에 산과 나무 그림자가 비치니까 새들이 숲으로 착각해서 유리에 머리를 찧는 거예요.”

“자기 위안 때문에 글 쓸뿐, 책 뒤에 숨고 싶어요”
작가 혼자 사는 집은 어쩌다 벌어지는 새들의 ‘비행사고’ 말고는 적막하기만 하다. 그런데 기자가 찾아간 날은 예외였다. 마침 그날 그의 집에서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전을 통해 소설가로 등단한 여성 문인들의 모임 ‘여성동아 문우회’ 동인들이 한 자리에 모이기로 한 것. 한국 현대문학사에 거목으로 자리매김한 그 역시 지난 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여성동아 문우회’는 그를 중심으로 두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는다고 한다.
“책을 아직 못 전해 줬어요. 책도 줄 겸 함께 식사도 할 겸 작가들을 저희 집으로 초대했어요.”
그는 모임 핑계를 대며 기자를 피해 다녔다. 작가 입장에서 자신의 책 이야기를 하는 것이 참 쑥스럽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냥 책 뒤에 숨고 싶어요. ‘자기 위안’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지 별 것 있나요?”
‘그 남자네 집’은 연애소설이면서 풍속소설이고 또 거창하게 말하면 페미니즘 시각이 반영된 사회과학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소설 속에서 여자 주인공의 올케가 동대문시장에 포목점을 낸 것을 기점으로 당시 동대문시장의 하꼬방 풍경과 상인들의 면면을 공들여 묘사해 놓았는데, 이는 여성들이 경제활동의 주체로 등장한 시기를 짚어내기 위한 소설적 장치다.
“그 시절에는 남아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어요. 양색시라도 해서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요. 동대문 옷감 장수들도 대부분 전쟁미망인들, 전쟁 중에 남편이 행방불명된 생과부들, 이북에서 몸만 피난 온 월남가족의 주부 등 주로 기혼여성들이 많았어요. 알고 보면 이 사람들을 비롯한 버스 차장, 구로공단 여공, 평화시장 노동자들이 우리 경제의 부흥을 이룩한 주체들이에요.”

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자전소설 ‘그 남자네 집’ 펴낸 소설가 박완서

젊은 시절 그 또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미8군PX 초상화부 직원으로 일한 적이 있다.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읜 그는 50년에 서울대 문리대에 입학했지만 곧 전쟁이 일어나 오빠마저 잃고 실질적인 가장이 됐다. 어머니와 올케, 두 명의 조카를 먹여 살려야 했던 그는 미8군PX에서 초상화를 그리도록 미군들을 부추기는 일을 했다. 훗날 남편이 된 호영진씨도 이곳에서 만났다. ‘그 남자네 집’에는 가정경제를 알뜰히 책임지는 은행원 남편이 등장한다. 박 선생의 남편은 당시 동화백화점 소속 측량 기사였지만 실제 소설 속 은행원의 모습과 닮은 점이 많다고 한다. 이 날 박씨의 집을 찾은 소설가 윤명혜씨(56)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남편분이 굉장히 자상하셨어요. 박 선생님이 글 쓰는 데만 몰두할 수 있도록 뒷수발을 다 해주셨죠. 박 선생님은 남편한테 사랑을 아주 많이 받은 사람이에요. 남편이 폐암으로 돌아가시고 나서야 생전 처음 동사무소에서 등본을 떼어보았다고 하니까요.”
53년 그는 미팔군PX를 그만 두고 호영진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 무렵 올케가 동대문시장에 포목점을 차렸기 때문에 무거운 가장의 짐을 벗어 던질 수 있었다. 부부는 원숙, 원순, 원경, 원균 네 딸을 차례로 낳고 막내로 아들 원태를 낳았다.
남편이 폐암으로 세상을 등진 때가 88년. 박 선생은 소설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에 남편이 죽기 전 마지막 1년을 간병기 형식으로 그렸다. 남편이 숨을 거둔 지 석 달 남짓 지났을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듯한 일이 그에게 또 벌어졌다. 의과대 레지던트 과정에 있던 외아들 원태가 돌연사한 것이다.
그의 집 거실과 부엌을 잇는 통로에는 오래된 흑백사진이 걸려있다. 그의 남편과 아들이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아들과 남편 사이에 단정한 차림으로 서 있는 그가 두 눈이 다 감기도록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다.
“이 아이를 잃었어요….”
그는 혼자 식탁에 앉아 밥을 먹을 때마다 사진을 쳐다보며 마음으로 아들의 밥숟갈에 반찬을 얹어주고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를 다독여주고 하는 모양이다.
“남루했던 50년대에 문학은 제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어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속속 모여든 ‘여성동아 문우회’ 동인들이 20명 남짓으로 늘어났다. 안혜성, 우애령, 최순희, 유춘강, 조혜경, 신현수, 이혜숙, 유덕희 등 쟁쟁한 글발로 독창적인 문학세계를 열어가고 있는 이들을 박 선생이 반갑게 맞이했다. 동인들은 스승이자 선배인 그의 책 출간을 축하하는 뜻에서 장미 꽃바구니와 와인을 준비해왔다. 윤명혜씨는 동인들을 위해 집에서 손수 빵을 구워 오기도 했다. 집에서 직접 만든 비누를 가져온 이도 있었다. 윤명혜씨 말로는 동인들 대부분이 다 내로라하는 재주꾼인데 박 선생은 요리 솜씨가 뛰어나다고 한다. 특히 40~50세 무렵 박 선생의 요리 솜씨가 절정이었다고.
“박 선생님이 개성 사람이니 더 말해 뭐해요. 개성 사람들은 양념을 극도로 절제하면서도 기가 막힌 맛을 내잖아요. 박 선생님의 요리 솜씨도 한 마디로 깔끔하죠. 박 선생님이 보문동 사실 적에 아롱사태를 넣어 국을 끓여 줬는데 굉장히 맑고 시원해서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나요. 직접 담그신 김치와 나물도 맛이 아주 깊었어요.”
얼마 전 소설가 박범신씨는 사석에서 ‘문단의 킬러’로 박 선생을 꼽은 일이 있다. 박 선생 만큼 사람과 사물에 대해 정확한 표현을 하는 소설가도 드물다는 존경의 표현이었다. 사실 독자들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 놓는 ‘칼날’ 같은 것이 그의 작품 속엔 있다. 읽는 이의 들숨과 날숨을 자유자재로 쥐고 흔들어대는 킬러 박완서. 그러나 그를 가까이서 지켜보는 후배 작가들은 그의 글 솜씨에 반한 사람은 그의 인간성에 더욱 매료되고 만다고 입을 모았다. 소설가 안혜성씨(56)는 ‘인간 박완서’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자전소설 ‘그 남자네 집’ 펴낸 소설가 박완서

박완서 선생의 신작 출간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여성동아 문우회’ 동인들.


“소설로 성공한 작가는 여럿 있지만 그들이 모두 인격적으로 완성됐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박 선생님은 소설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성공한 분이세요. 작가가 글을 쓰려면 이기적으로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가까이서 지켜본 선생님은 작가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있어요. 우리시대의 좋은 인간이자 문학인이고 선배입니다.”
모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소설가 유춘강씨(40)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러 가야 한다며 먼저 일어섰다. 그러자 박 선생이 부엌으로 가더니 석류를 비롯해 산모가 먹으면 좋다는 여러 가지 것들을 챙겨 주었다. 그런 모습이 마치 친정 엄마 같았다. 그 또한 젊은 엄마였던 시절 다섯 아이를 모두 모유로 키웠다고 한다. 한국문학계의 어머니로서 마르지 않는 도도한 젖줄기로 한국인의 정신을 풍요롭게 한 그에게 소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50년대 초, 남루하고 척박한 시대에도 문학이 있다는 게 그렇게 제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어요. 문학 때문에 가슴이 울렁거리고 나면 피가 맑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지요. 그 때 문학은 제 마음의 연꽃이었어요. 진흙탕에서 피어난 아름다움이었고, 범속하고 따분한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는 힘이었습니다.”
아직도 수줍음 많은 소녀 같은 박완서 선생. 대문 밖에서 후배 작가들을 배웅하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니 둥근 어깨가 안으로 살짝 기울어 있다. 그 순간 그가 가진 글의 힘은 줄기찬 노동으로 마모된 어깨에서 비롯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시 날카로운 칼을 들어 새겨낼 소설이 자꾸만 궁금해지는 건 독자의 지나친 이기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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