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 전 ‘화장하는 CEO’라는 수필집을 내 화제를 모은 코리아나 화장품 유상옥 회장(70)이 지난 30년간 사재를 털어 수집한 화장도구와 규방에서 쓰는 물건들을 공개했다. 11월20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화장미술관 ‘스페이스 C’를 개관하고, 분수기(분가루를 개는 데 쓰는 물을 담는 그릇) 기름병 노리개 뒤꽂이 저고리 등 옛 여인들이 쓰던 각종 생활용품 6백여점과 도자기, 조각품 등 총 4천여점을 내놓은 것.
개관을 일주일 앞두고 막바지 공사가 한창인 스페이스 C에서 만난 유회장은 “업무상 외국의 유명 화장품 회사들을 방문할 기회가 많았고 그때마다 그곳의 화장품 박물관을 보고 부러워했는데 이렇듯 박물관을 완성하게 돼 고생한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가 옛 물건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69년 동아제약에 근무할 때부터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줄곧 회사 일에만 집중해온 터라 자칫 인성이 메마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그는 점심시간에 식사를 간단히 때우고, 인사동을 돌아보곤 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미술에 대한 안목을 키우는 차원이라 그림, 조각, 고서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예술품을 접했다고.
그러던 중 일본의 한 제약회사로 출장을 갔다가 공장에 일본 전통 의약 관련 도구들이 전시된 것을 보고 그때부터 관심 분야를 제약 관련 소품들로 한정하고 기회가 되는 대로 골동품을 구입해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77년 라미화장품 대표로 선임되면서 그의 관심도 여성과 관련된 민예품으로 옮겨졌다.
외국 회사들이 화장품 박물관 가진 것에 자극받아 본격적으로 화장도구 수집
유회장은 화장품 박물관에 각종 화장도구 6백여점 등 총 4천여점의 유물을 내놓았다.
문화와 경제가 함께 성장해야 바람직하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샐러리맨의 월급으로 골동품들을 수집하다 보니 가족들의 원성을 살 때도 있었다.
“생활하기에도 빠듯한 월급을 쪼개 물건들을 사들이다 보니 아이들에게 용돈을 넉넉히 줄 수 없었어요. 그래서 아마 불만들이 있었을 텐데 지금 생각하면 그게 오히려 근검 절약하는 습관을 키우지 않았나 생각해요. 지금도 아이들이 낭비란 걸 모르거든요. 결과적으로 교육에 도움이 된 거죠.”
그렇다고 그가 고가의 골동품을 대량 소유하고 있는 건 아니다. 월급쟁이 시절부터 계속된 취미라 어떻게 하면 좀더 싸고 좋은 물건을 찾아낼 수 있을까 고민했다고. 최근엔 외국의 문화유산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습관엔 변함이 없어 해외 출장길에 오를 때마다 그는 주말에 열리는 벼룩시장을 찾는다고 한다.
그러나 가족들의 불편은 경제적인 문제에만 국한된 건 아닌 듯하다. 코리아나에 재직중인 그의 아들 유학수 기획 상무는 “신문에 둘둘 말린 물건들이 늘어나면서 공부방이 비좁아졌고 이사라도 하게 되면 수집품들이 늘 골칫거리였다”고 털어놓았다. 유회장은 웃으며 “세간살이보다 요놈의 것들이 더 많았으니까요. 게다가 파손될까봐 신주단지 모시듯 했어요. 박물관 연다고 집에 있는 수집품들을 다 내오는데 집사람이 ‘시원하다’고 하더군요” 하고 말했다.
가족들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화장품 회사에 근무하면서부터는 전통 물품 수집에 대한 그의 욕구는 더욱 절실해졌다. 선진국의 화장품 업체들이 화장품과 관련된 예술과 역사에 쏟는 지대한 관심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 단순히 물건을 만들어 팔기만 할 게 아니라 관련 문화를 발전시키는 것 또한 기업의 할 일임을 깨닫게 됐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아덴, 에스티 로더 등 세계 유명 화장품 회사 대표의 집무실에 가보면 화장품 관련 미술품들이 전시돼 있어요. 자신의 기업과 관련된 박물관을 가진 기업도 여러 곳이죠. 예를 들어 일본의 시세이도와 폴라도 화장박물관을 갖고 있어요. 한번은 독일의 ‘웰라’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사장실에 전세계의 화장용품이 진열돼 있더군요. 그런데 한국 것은 없더라고요. 일본 것은 있는데 말예요.”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던 그는 그후 웰라 사장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경대를 선물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웰라를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사장실에 ‘Korea’라는 푯말과 함께 경대가 전시돼 있는 걸 보고 뿌듯했다고.
그는 물건을 모으기만 한 것이 아니라 미술사, 고고학, 민속학 등 전통문화 전반에 걸친 기초지식을 공부하기도 했다. 82년, 한국박물관회에서 주관하는 국립중앙박물관 특별강좌에 등록해 매주 4시간씩 1년 동안 수학한 것. 그는 그 뒤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함께 공부했던 동기생들과 지금껏 한해도 거르지 않고 연구 모임(박물관연구회)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매달 둘째 주와 넷째주 목요일에 코리아나 본사 회의실에서 여러 나라의 미술과 역사 등 각 분야의 전문가를 초빙해 강의를 듣는다고. 이렇듯 옛것에 열정을 쏟은 결과 그는 지난해말 한국박물관회 회장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와 연구 모임을 계속하고 있는 동기생 40여명 대부분이 주부들이라는 점이다. 그는 “일반 주부들의 수준이 높아야 진정한 선진국”이라며 “화장품의 주고객인 주부들과 친구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요즘은 ‘삼국유사’를 공부한다며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일화를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에서 칠순이라는 나이에도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는 배움의 열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올해 ‘한국의 경영자상’ 수상, 이제 사회에 기여하는 일만 남아
“난 우리 직원들에게도 계속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해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서도 계속 공부해야죠. 그러니 리더인 제가 솔선수범하지 않을 수 있나요. 늘 새로운 지식을 흡수해 역량을 키우면 결국 경영에도 도움이 된답니다.”
67년부터 3년간 고려대에서 경영학 강사로 대학 강단에 서기도 했던 그는 최근까지 중앙대 이화여대 고려대 등에서 겸임교수로 활동했다. 그리고 거의 매일 각종 조찬모임에 참석해 각계 인사들이 들려주는 산 교육을 들으며 남보다 먼저 하루를 시작한다.
화장품 박물관에는 화장도구 외에도 아녀자들이 쓰던 다양한 생활도구들이 전시된다.
“사람들이 내게 건강의 비결을 물으면 나는 ‘삼쾌’를 얘기해요. 잘 먹고(쾌식), 잘 자고(쾌면), 잘 싸고(쾌변), 그리고 열심히 즐겁게 일하면 건강해지는 거죠.”
그는 올해초 강성모 린나이코리아 회장, 김승유 하나은행장, 박용오 두산그룹 회장 등과 함께 한국능률협회가 수여하는 ‘한국의 경영자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경영자에게는 최고의 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경영자상을 받은 올해가 마침 코리아나 창립 15주년이 되는 해이고, 내 나이도 70세가 됐으니 이제 사회에 기여하는 일만 남았다”고 말한다.
그가 강남의 요지에 거액을 들여 땅을 구입하고, 박물관을 지은 것도 개인적인 욕구에서 시작한 컬렉션을 되도록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는 생각에서라고 한다. 이러한 생각은 건물 설계에도 반영됐다. 스페이스 C는 ‘도심 속에 자연을 심어놓는다’는 컨셉트로 설계돼 건물 안에 나무를 심고, 7층 건물 전면을 통유리로 마감했다. 이 때문에 건물 안에서 가지를 쭉쭉 뻗으며 자라고 있는 나무들의 모습이 건물 밖으로 그대로 드러나 거리의 행인들까지 녹색의 자연을 만나볼 수 있다.
유회장은 “스페이스 C가 옛것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얻는다는 온고지신의 정신을 살려 전통문화와 예술과 자연의 아름다움이 어우러지는 세계적인 명소가 될 것”이라며 대단한 자부심을 내비쳤다. 더욱이 그는 화장품 박물관으로 쓰는 5층과 6층, 미술관으로 사용할 지하와 1층을 제외한 2∼4층은 식음료점과 스킨케어숍, 미용실 등 뷰티 관련 업소에 임대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래서 마땅한 휴식공간이 없는 도심에 그야말로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더불어 아름답게 하는 복합문화공간을 제공하고 싶다고.
사회 공헌에 대한 그의 계획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스페이스 C 개관으로 기업의 문화적 접근을 시도했으니 이제 곧 친환경적 접근을 할 생각”이라고 귀띔한다. 현재 코리아나 공장 부지에 자라고 있는 묘목들이 바로 그가 계획하고 있는 미래를 위한 준비다.
“묘목이 자라면 여학교에 ‘코리아나 가든’을 만들어줄 생각이에요. 여학교에 예쁜 정원이 있으면 꿈 많은 여고생들이 좋아하지 않겠어요? 그 학생들이 자라 코리아나 화장품의 고객이 되면 더 좋고요(웃음).”
빽빽한 건물들에 에워싸여 나무와 꽃 같은 아름다운 자연을 접하기 어려운 학생들에게 자연을 선물하고픈 게 유회장의 소망이다. 문화와 환경을 생각하며 배우기를 즐기고, 늘 미래를 내다보며 새롭게 도전할 일을 구상하는 그가 앞으로 또 어떤 일로 화제를 불러모을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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