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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이 여자의 인생

뮤지컬 '명성황후' 프리마돈나 이태원 솔직 고백

“고아원에서 보낸 유년시절, 불임, 이혼 등 인생사의 아픔 이기고 성공하기까지”

■ 글·이영래 기자 ■ 사진·정경택 기자

2003. 05. 07

그가 고아원에서 보낸 유년시절, 불임, 남편과 친정 사이의 갈등으로 이혼하고 홀로 서 뮤지컬 스타로 거듭나기까지 인생사의 명암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미운 오리새끼’ 이태원의 삶과 사랑에 대한 고백.

뮤지컬 '명성황후' 프리마돈나 이태원 솔직 고백

“이태원의 수정 같은 소프라노 음성과 마거릿 대처를 연상시키는 강력한 인품은 인상적이었다.” 이는 영국 ‘가디언지‘에 실린 리뷰의 한 대목이다. 뮤지컬 스타 이태원(37)에 대한 언론의 호평은 다양했다. 연출가 윤호진 교수(단국대학교 연극영화과)는 그를 가리켜 “내가 30년 동안 공연일을 해오면서 만난 뮤지컬 배우들 중에서 가장 노래를 잘하는 배우”라고 했다.
97년, 공연문화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토종 뮤지컬 ‘명성황후‘가 브로드웨이에 진출했다. 우리의 토종 뮤지컬을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린 것만으로도 동양 최초라는 기록을 남길 일인데, ‘명성황후‘는 12회 전회 관중으로부터 기립 박수를 받는 등 대성황을 이루었다. 기적 같은 이 성공을 이끌어낸 인물들 가운데 단연 눈길을 끄는 이가 있으니 바로 ‘명성황후’ 역을 맡아 호연을 펼친 프리마돈나 이태원이 그 주인공이다.
줄리어드 음대 및 동대학원 졸업, 세계적인 오페라 경연대회에서 잇따른 우승, 브로드웨이 뮤지컬 전문배우 등의 화려한 이력, 그리고 강한 자존심을 역력히 느낄 수 있는 그의 자서전 속 표현들을 눈여겨보며 기자는 인터뷰 전 약간 긴장을 했다. 아무래도 편하게 인터뷰를 하기엔 부담스러운 상대일 거란 선입견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집앞 골목을 헤매면서 계속 집 위치를 묻는 전화통화를 하는 동안 그가 의외로 소탈한 성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더욱이 첫인사를 나누자마자 “화장해야 되나요?”라고 묻고는 “아무래도 속눈썹은 붙여야겠죠?” 하며 방안으로 뛰어들어가는 그를 보며 짙은 화장 속에 모든 감정을 묻고 사는 ‘천상의 마돈나’는 아니라는 생각에 안도할 수 있었다.
그와의 인터뷰는 경쾌했다. 그의 솔직함은 대담하다고 느껴질 정도. 그러나 그의 말 중에 미심쩍은 부분이 하나 있었다. 집안에 놓인 재떨이를 가리키며 “노래하시는 분이 담배를 피우냐?”고 묻자 그는 “아니, 손님용이에요”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그녀의 시선이 밑으로 깔렸다. 그는 자신을 인터뷰하고 쓴 기사에 얼마나 많이 담배 이야기가 언급됐는지를 모르고 있는 것일까? 어떤 기사엔 그가 ‘인터뷰 내내 담배를 피웠다’는 구절이 나온다. 당시 그는 “뮤지컬을 하니까 목소리를 좀 컬컬하게 할 필요가 있어서”라고 변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더는 캐묻지 않았다. 누군가의 압력에 지금쯤 금연 전쟁을 하는 중이리라.
데모 주동으로 취업 막힌 아버지 자식 교육 위해 미국 이민 결심
“술은 무지하게 마셨어요. 부모님이 엄격하셔서 대학 3학년 때까진 맥주도 한번 마셔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술을 마셔보니까 제가 술이 엄청 세더라고요. 앉아서 소주 3∼4병은 기본이고, 최고로 8병까지 마셔봤어요. 근데 그러다보니까 여자가 너무 드세지더라고요(웃음). 게다가 이젠 몸에서도 안받고, 아버지가 목사인데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그 압력의 실체가 누군지는 그렇게 쉽게 드러났다.
부모님, 할머니, 동생, 그리고 남편까지 그를 둘러싼 이야기는 모두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여류 소설가의 심정주의 소설을 읽거나 여성인사와 인생사를 놓고 이야기하다 보면 묘한 감상에 젖어들게 된다. 인생사의 모든 이야기가 가족이라는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데도 그 속에 삶의 모든 것을 표현해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에게, 아니 여자에게 가족이란 어떤 의미일까?
“어렸을 때는 할머니 밑에서 컸어요. 워낙 대가 세신 분이셨는데, 남동생은 예뻐하면서도 항상 저는 미워라, 타박만 하셨어요. 동생이 저에 비해 순하긴 했지만, 무슨 일이 생기든 욕은 제가 먹었죠. ‘여우 같은 년’ 이란 말이 왜 그렇게 듣기 싫었는지…. 허구한 날 맞았어요. 오죽했으면 제가 어린 시절에 ‘결혼하면 할머니 같은 시어머니 만나 복수하겠다’고 결심을 했겠어요(웃음). 워낙 강하신 분이라 노년엔 주변에 사람이 없으셨죠. 근데 사람이 참 묘하죠? 그때 저만 그분 옆에 있었어요. 임종을 지키진 못했지만 할머니도 돌아가실 때 저만 찾았다고 하더라고요.”
4·19 때 데모를 주동했다는 혐의로 호적에 빨간 줄이 그어진 아버지는 공대를 나왔음에도 이렇다 할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 때문에 부모님은 막노동을 하기도 하고, 축산농가에서 일하기도 하면서 어렵게 삶을 꾸려갔다고 한다. 어렵게 마련한 만화가게의 문을 닫으면서 생활이 더 어려워지자 부모님은 그와 남동생을 할머니 집으로 보냈다. ‘남아선호사상’으로 가득 찬 할머니 슬하에서 ‘미운 오리새끼 생활’이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 그는 간절히 기원하던 대로 부모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꿈꿨던 가족의 품은 아니었다. 부모님이 경기도 평택에서 한 고아원을 운영하게 되자 고아원으로 그와 동생을 불러들였던 것. 원장 딸이라고 사택에서 따로 산 것은 아니었다. 1백여명의 아이들과 함께 그와 동생은 방을 배정받아 제각각 떨어져 살아야 했다.
“고아원 해서 돈 벌었다는 분도 봤는데 우리 부모님은 그렇지도 못했어요. 워낙 그런 능력이 없는 분이셨죠.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제가 고아인 줄 알고 마구 놀렸지만 진짜 고아인 친구들이 상처입을까봐 대거리도 않고 참았죠. 사실 특별 대우는 받았어요. 다른 원생들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항상 저를 감싸고 돌았거든요. 덕택에 다른 아이들이 감히 절 건드리질 못했어요.”
음악과 본격적으로 연을 맺게 된 것은 고아원 합창단 활동을 하면서부터다. 당시 합창단의 주역은 그와 두 동생이었는데, 나중엔 그들 남매만 따로 떼어내 ‘3남매 노래 선교단’을 구성, 순회 공연을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회고하는 그 시절은 그다지 유쾌한 기억의 연속은 아니다. 그것은 질투 때문이다.
남동생이 인기 TV 프로그램이었던 ‘누가 누가 잘하나‘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그의 질투가 시작됐다. 당시 주변 사람들에게 그것은 대단한 뉴스거리였다. 동생이 칭찬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는 약이 올랐지만 티를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해 연말, 동생은 ‘누가 누가 잘하나‘ 연말결선에서 대상을 차지해 공책이며 연필 등 선물을 잔뜩 품에 안고 돌아왔다. 그는 질투의 화신이 되어 지글지글 타올랐다.
동생을 이기기 위해 새벽부터 뒷동산에 올라 열심히 소리를 지르는 지옥 훈련을 감행했다. 목에서 피가 나오면 이뤄진다는 ‘득음’의 경지를 얻기 위해서. 어느 날 목에서 피가 나왔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노래 실력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고 한다.
남동생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리는 것도 벅찬데, 막내 여동생마저 그의 질투에 기름을 부어댔다. 그보다 다섯 살 어린 막내 여동생은 훗날 미국에서 미인대회에 나가 1등을 했을 정도로 미모가 뛰어났다. 빼어난 미모로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막내가 피아노 전국 콩쿠르에서 입상을 하자 그는 더욱 의기소침해져야 했다. 그는 사춘기 시절, 이런 열등감과 우울증에 사로잡혀 수면제를 모으기도 했다.
재능 뛰어난 동생들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리던 어린 시절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미국 이민길에 올랐는데, 그런 일이라도 없었다면 진짜 자살했을지도 몰라요. 아버지는 힘들게 이민을 결심했어요. 어느날 고아원을 찾아온 어떤 미국 사람이 저희를 입양하고 싶다고 그랬거든요. 음악적 재능이 아까우니 자기가 데리고 가 기르게 해달라고. 그 얘기를 듣고 고민하시던 부모님은 양자로 주느니 당신들이 직접 미국에 데리고 가 음악가로 키우겠다고 했어요.”
미국에 도착한 그의 부모님과 형제들은 만두를 빚어 파는 것으로 생활해 나갔다. 재능 면에서 보면 동생 둘이 워낙 뛰어났기에 그는 이른바 ‘살림밑천’ 노릇을 해야 했다. 동생 둘은 음대 진학을 위해 개인 레슨까지 받았지만, 그는 세탁소와 잡화가게, 봉제공장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교 시절을 보냈다.
“같은 교회를 다니던 한 독지가가 어느날 제 레슨비를 대주겠다고 했어요. 이미 그때는 대입 시험이 얼마 안 남은 때였지만, 전 그것도 감지덕지했죠. 넉달 레슨을 받고 전 과감히 줄리어드 음대에 응시했어요. 물론 터무니없는 짓이라고 다들 말렸죠. 뭐, 저도 무리라고 생각은 했지만 시험은 보고 싶었어요. 아마 동생들에 대한 질투심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웃음).”
그는 주위의 예상을 깨고 줄리어드 음대에 당당히 합격했다. 그것도 장학생으로. 그는 그때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회고했다. 그렇다고 대학 시절이 마냥 즐거웠던 것은 아니다. 부모님의 통제에 묶여 무미건조한 캠퍼스 생활이 이어졌다. 더욱이 갑갑한 이론 공부를 끝없이 이어가야 하는 클래식에 대한 열정도 서서히 식어갔다. 당시 그의 유일한 목표는 무사히 졸업이나 해 평범한 주부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목표는 대학 졸업을 앞둔 12월, 결혼을 함으로써 이룰 수 있었다.
모든 기억은 현재가 지배하는 법. 결혼에 이르기까지 그 또한 연애의 행복함을 맘껏 맛보았으련만 결혼생활에 대한 그의 추억은 어둡기만 하다. 문제는 결혼 초부터 생긴 남편과 친정 사이의 피말리는 신경전에서 비롯됐다.

뮤지컬 '명성황후' 프리마돈나 이태원 솔직 고백

그는 최근 '나는 대한민국의 뮤지컬 배우다'라는 자전 에세이집을 출간했다.


“그 사람은 술과 담배도 안할 정도로 철저한 완벽주의자였어요. 그만큼 자기 주장도 강했고 주변 사람들의 실수도 허용하지 않았죠. 남편 입장에서 시집 보낸 딸에게 자꾸 연락하는 부모님을 이해하기 힘들 수 있었다는 생각은 해요. 하지만 친정 부모님은 저에 대한 애착이 대단해서 하루라도 통화를 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분들이었어요. 그러다보니 남편과 친정 사이가 좋지 못했죠. 중간에서 나만 힘들어지는 경우도 많았고….”
그는 전남편에 대한 이야기는 길게 하지 않았다. “헤어진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무엇이 결혼 생활을 파경으로 이끌었는지는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복통에 시달렸다. 그것이 변비가 아니라 나팔관에 생긴 혹 때문이라는 것을 결혼한 후에야 알았다. 한쪽 나팔관을 떼어냈는데, 다른 쪽 나팔관에서도 문제가 발견됐다. 끔찍한 고통을 이기며 수술을 받았지만 임신은 되지 않았다. 결국 병원에선 나팔관이 이미 기능을 상실했다며 체외수정을 권했다.
“체외수정을 하려면 난자를 난소에 주입한 후 호르몬 주사를 3주간 매일 맞아야 해요. 그 다음에 전신 마취를 하고 난자를 채취하죠. 마취가 깨어나면 피검사를 하고, 인공수정시킨 뒤 다시 자궁에 착상시키는데, 마취도 안 하고 가위를 자궁 속으로 넣어 자궁을 찢어요. 그런 고통을 매번 겪어야 했어요.”
그 고통을 감내하며 체외수정 시술을 무려 5번이나 받았다. 그 비용만 1억원이 넘게 들었으나 임신은 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알게 모르게 남편과의 사이가 조금씩 벌어졌다. 그런 와중에 그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왕과 나‘의 티엥 왕비로 캐스팅됐다. 그는 남편을 보스턴에 남겨두고 뉴욕으로 홀로 옮겨갔다. 자연스럽게 별거가 이어졌고, 별거는 이혼이 되고 말았다.
수많은 오페라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고 뮤지컬로 전향하면서는 꿈의 무대라는 브로드웨이에 진출하는 영광의 나날이었지만, 그렇게 가수로서의 인생과 여자로서의 인생은 명암이 서로 갈리고 말았다.
“지금도 물론 사귀는 남자가 있어요. 모르죠. 항상 제가 공연 때문에 외국에 왔다갔다 하니, 이 관계가 어떻게 발전할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확실한 건 지금 이대로도 전 충분히 행복하다는 거예요. 노래 하나로 부와 명예를 동시에 얻을 수 있다는 건 축복 아니에요?”
그는 6월14일까지 두달 가까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리는 뮤지컬 ‘명성황후‘의 북미 투어를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다 문득 항상 열등감을 안겨줬다는 그 동생들은 어떻게 됐는지 물었다.
“남동생은 음반 제작자가 됐고, 막내 동생은 연예인 전문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어요. 모르겠어요. 왜 음대를 가지 않았는지…. 변호사로 활동하면서도 피아노는 계속 쳐요. 돈도 많이 벌어서 부모님에게 집까지 사드린 효녀인 걸요. 제몫까지 다한다니까요(웃음).”
열등감이나 질투는? “이제 없다”고 했다. 나이 서른 일곱. 그는 “가족의 소중함을 서른이 넘어서야 깨달았다”며 웃는다. 지금은 그들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하다는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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