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중반, 당시 중고생들의 유일한 유흥공간이었던 롤러스케이트장. 친구들과 함께 이곳을 찾은 민희(임은경 분)가 신청한 김승진의 노래 ‘스잔’이 흘러나오자 나영(공효진 분) 패거리가 DJ박스로 몰려가 음악을 박혜성의 노래 ‘경아’로 바꾸어놓으며 둘 사이에 한바탕 시비가 붙는다.
지난 겨울, 전국 관객 2백만명을 돌파하며 화제를 모은 영화 ‘품행제로‘의 한 장면이다. ‘나이스’ 신발, 정독도서관, 쌈치기, 빨간책 등 80년대 중반 청소년들의 풍속도를 담은 이 영화의 압권은 역시 점점 민희에게 마음이 끌리는 중필(류승범 분)에게 나영이 “솔직히 대답해. 스잔이 좋아, 경아가 좋아?” 하며 민희와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제목으로 대치시켜 진심을 묻는 장면이다. 이 시절에 사춘기를 보낸 지금의 30대 여성들이라면 이 장면에서 잊혀졌던 당시의 기억들이 떠오르며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을 것이다.
영화에서처럼 당시 여학생들은 극성팬이 아니더라도 ‘스잔’ 김승진을 좋아하는 편과 ‘경아’ 박혜성을 좋아하는 편으로 갈라졌고, 극성 팬들 사이엔 패싸움까지 심심찮게 벌어질 정도였다. 여드름이 가득한 개구쟁이 같은 얼굴의 김승진과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상시키는 외모와 목소리를 가진 박혜성. 고등학생 때 데뷔한 우리나라 최초의 10대 하이틴 가수였던 두 사람은 조용필 전영록 등 기존 가수들과 차별성을 내세우며 당시 10대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언론에서는 남진 나훈아 이후 최고의 라이벌 관계로 꼽았을 정도.
그후 십수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언제인지 모르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두 사람이 다시 우리들 곁으로 돌아왔다. 먼저 방송에 복귀한 것은 박혜성. 화제의 드라마 ‘야인시대‘의 음악을 맡은 것이 알려지면서 화제를 모았던 박혜성은 90년대 후반부터 TV 광고와 영화음악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팬들과 만나고 있었다.
반면, 91년 5집 앨범을 끝으로 방송계를 떠난 김승진(36)은 95년 대마관리법 위반혐의로 구속된 후 좀처럼 소식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가 12년 만에 ‘미카엘밴드’라는 록그룹을 결성, 가요계에 복귀했다.
“전에는 ‘하이틴‘이나 ‘여학생‘ 같은 잡지와 주로 인터뷰를 했는데, 이젠 ‘여성동아‘를 비롯한 주부지로 바뀌었네요.”
기자를 만나자마자 웃으며 건넨 김승진의 말처럼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모든 것이 변해 있다. 여드름 가득하던 그의 앳된 얼굴은 이젠 카리스마 넘치는 얼굴로 바뀌어 있고, ‘스잔∼’ 하며 달콤하게 속삭이던 발라드 음악은 강렬하면서도 섬세한 ‘재팬 록’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오빠” 하며 쫓아다니던 여학생들은 이젠 대부분 아이 엄마들이 되어 있다.
“처음 인터넷에 미카엘밴드 홈페이지를 만들었을 땐 그저 어린 신인 그룹인 줄 알았는지 주로 10대 청소년들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제가 ‘스잔’을 부른 김승진이란 게 알려지면서 주부들도 많이 들어와요. ‘스잔팬클럽 1기’였다며 ‘다시 나와서 고맙다’는 글들이 많더군요. 제가 더 고맙죠. 아직까지 저를 잊지 않고 있는 그분들이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12년 만에 다시 연예계에 복귀하는 기분이 남다를 것이다. 그는 “무대에 서면 아직도 긴장이 되어 가슴이 떨린다”고 털어놓았다.
“어린 나이에 데뷔해 첫방송을 할 때도 이렇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객석에 앉아 있는 부모님께 손을 흔들면서 노래를 할 정도였죠. 그런데 이번엔 라디오방송 스케줄만 잡혀도 잠이 안 와요.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인 것같아요.”
그래서일까, 그는 아직 공중파 방송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지난 1월 앨범이 발매된 후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거나 음악전문 케이블방송에만 모습을 비추었을 뿐이다. 팬들에게 좀더 원숙한 라이브 무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는 목을 다쳤을 때도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서라도 무대에선 라이브를 고집하고 있다.
“후배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죠. 공중파 무대에 서더라도 라이브를 할 수 있는 무대에만 설 겁니다. 그리고 오락프로같이 노래와 상관없는 프로그램에는 출연 안 할 생각이고요.”
이처럼 노래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그가 어떻게 그 오랜 세월 동안 음악을 떠나 있었을까. 사춘기 소년처럼 쾌활하게 이야기하던 그에게 지난 일을 떠올리게 하자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아역 탤런트 출신인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인 85년 가수로 데뷔한 이후 90년 드라마 ‘달빛가족‘에 출연하는 등 노래와 연기를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하다 91년 5집 앨범을 마지막으로 공백기에 들어갔다. 재충전을 통해 새로운 음악을 선보이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공백기간에 그만 대마초의 유혹에 빠지고 말았다.
“음악 하던 한 선배를 통해 경험하게 되었는데, 그걸 처음 피우는 순간 솔직히 필(느낌)이 달랐어요. 우리가 술을 마시고 노래를 하면 필이 꽂히고 노래가 더 잘 되는 것 같잖아요. 그런데 이걸 하면 그 느낌의 수준이 달라요. 처음 그걸 피우고 음악을 듣는데, 노래가 한편의 드라마처럼 느껴지면서 감동에 겨워 눈물이 나더라고요. 바로 이거구나 싶었죠.”
하지만 그로 인해 큰 시련을 감내해야 했다. 95년 심신, 김범룡, 박중훈 등과 함께 연예인 대마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 것이다. 비록 집행유예로 풀려나긴 했지만 방송출연이 금지되었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 원인이었지만 그것으로 변명할 생각은 없어요. 죗값을 치른 후 반성을 많이 했어요. 대마초도 완전히 끊고 심기일전해서 다시 음악을 시작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재기하기가 힘들더군요.”
그때 우연히 일본에 갔던 그는 당시 댄스와 발라드 일색이던 우리 가요계와는 달리 다양한 장르가 공존하는 일본에서 음악을 들으며 새로움을 느꼈다. 그곳에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록음악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아버지에게 1억5천만원을 빌려 일본에서 음악작업을 했어요. 완성된 마스터테이프를 가지고 와 전부터 알고 지내던 (이)주노형에게 들려주었더니 성공할 것 같다며 자기가 제작과 홍보를 해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만 IMF가 터지는 바람에 주노형 사업도 어려워져 결국 앨범은 세상에 나오지도 못하고 말았죠.”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후 앨범 내는 것을 도와주겠다며 접근한 사람들에게 8번이나 사기를 당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어려움을 모르고 평탄하게 살아와 사람을 쉽게 믿은 탓이다.
“아는 선배의 소개로 알게 된 형이 있었어요. 어느날 그 형이 자신의 사업구상을 들려주는데, 그럴 듯했어요. 그래서 형을 쫓아다녔죠. 그러다보면 어느새 제가 그 사업의 얼굴마담이 되어 있어요. 사람들은 저를 믿고 돈을 투자하죠. 그러다 돈이 어느 정도 모이면 형은 그걸 가지고 사라지는 거예요. 그래서 좌절해 있으면 또 다른 형이 나타나 저를 위로해줘요. 그러면 또 그 형을 의지하게 되고, 그 형은 또 저에게 사기를 치고 사라지고….”
방송가에선 그가 사기꾼들과 어울려 다니며 완전히 망가졌다는 소문이 났다. 하지만 누구하나 그에게 충고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사업을 같이 하자며 그를 사기꾼에게 소개시킨 후 자신은 슬쩍 빠져나간 연예인 선배도 있었다.
“어렸을 때 그런 일을 겪은 게 차라리 다행이죠. 늙어서 그런 일을 당했으면 다시 시작할 수도 없었을 것 아니에요. 세상이란 게 이런 것이라는 인생공부를 진하게 했다고 생각해요.”
강렬하면서도 섬세한 재팬 록으로 12년만에 재기한 김승진의 ‘미카엘밴드’.
그토록 하고 싶은 음악도 못한 채 사기를 당하는 일이 반복되자 깊은 좌절감에 빠지기도 했다. 술에 취해 잠이 들고 아침에 일어나면 쓰린 속보다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이 너무 힘들었다. ‘정신을 차려야지’ 하면서도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부모님의 얼굴을 보는 것도 부끄럽고 힘들어 빈손으로 집을 나왔다.
“집을 나와 처음엔 차 안에서 먹고 자고 했어요. 차 안에서 음악 틀어놓고 ‘나 음악해야 하는데 어떻해야 하나’ 하고 소리 지르며 울기도 많이 울었죠. 음악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돈을 벌기 위해 사람들을 만났지만 역시 돌아오는 건 배신과 사기뿐이었죠.”
그런 역경을 겪으면서도 그는 음악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대마초를 피운 혐의로 감옥에 들어갔을 때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 음악을 듣고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그였다. 어려움이 닥칠수록 노래에 대한 열정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조금이라도 돈이 모이면 일본으로 건너가 녹음을 했다. 그러다 돈이 부족해 중단하고, 다시 돈이 생기면 다시 녹음하고, 그러다 녹음한 지 오래되어 시대에 뒤떨어진 노래들은 폐기하고…. 그런 식으로 5년 넘게 준비한 끝에 완성되어 나온 것이 바로 이번 앨범인 셈이다.
“녹음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어요. 미사리에서 노래를 하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팬들을 의식해 그렇게 할 수는 없었어요.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었거든요. 차라리 일본에서 무대에 서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토록 힘들게 만든 앨범이고 어렵게 돌아온 무대여서일까. 그는 유행과 인기에 영합하지 않은 자신만의 색깔 있는 음악을 팬들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당찬 각오를 밝혔다.
“밴드 이름을 미카엘이라고 지은 것도 그 때문이에요. 성경에 보면 미카엘은 악을 물리치는 천사의 우두머리거든요. 제 노래가 상업성을 물리치고, 또 천사처럼 지친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지은 겁니다.”
벌써 그의 나이 3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지만 음악을 위해 결혼도 미루고 있다는 그의 말에서 음악에 대한 열정이 오롯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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