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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영화를 사진 속에 담는다!

국내 영화 스틸작가의 대모 권순미의 카메라 인생

”국민배우 안성기도, 톱스타 장나라도 제앞에서는 찡그릴 수 없어요”

■ 기획·이지은 기자(smiley@donga.com) ■ 글·조희숙 ■ 사진·김형우 기자

2003. 03. 31

아무리 톱스타라도 그 앞에서는 웃지 않을 수 없다. 충무로에서 ‘영화밥’ 먹은 지 18년째 되는 국내 최고참 여류 영화 스틸작가 권순미씨. 30여편의 영화가 아줌마 작가의 손을 거치는 동안 수많은 배우들의 울고 웃는 모습이 그의 카메라를 거쳐갔다.

국내 영화 스틸작가의 대모 권순미의 카메라 인생

날마다 톱스타들과 동고동락하는 여자. 영화 스틸작가 권순미씨(42)는 영화촬영 현장에서 ‘대모’로 통한다. 스태프들 가운데 서열 5순위 안에 들 만큼 나이가 많기도 하지만 18년 동안 영화촬영 현장에서 그를 거치지 않은 배우와 스태프를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
“이제는 초보 사진기자들이 사진 찍을 자리를 못 찾고 헤맬 때 자리를 내주는 여유도 생겼지만 처음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서러움 많이 당했어요. 스틸작가는 소속도 없이 활동하기 때문에 남자들 일색인 촬영장에서 감독과 촬영·조명감독들과 조수들 사이에서 사진 찍을 자리를 찾기조차 쉽지 않았죠.”
영화 스틸사진이란 영화가 개봉되기 전에 홍보용으로 사용하는 사진을 말한다. 영화작업 환경이 전문화되면서 영화 스틸작가는 홍보실을 지원하는 역할에 그치고 있지만 과거 ‘스틸기사’로 불리던 시절에는 대접이 달랐다. 당시 스틸기사는 사진의 필름과 영화 판권까지 직접 구입하고 지방을 돌며 영화의 홍보와 마케팅까지 담당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영화와 인연을 맺은 것은 스물여섯살 무렵. 신구대 사진과를 졸업한 그는 졸업후 대학로 극단을 돌며 연극사진을 찍어주는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후 86년 ‘스틸작가의 대부’로 불리는 윤진호 스틸기사의 어시스트가 되면서 처음 영화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순전히 생계를 위한 선택이었어요. 대학 때부터 서울에서 혼자 생활했었는데 연극 사진만 찍어서는 생활이 어려웠어요. 그때 소원이 통장에 10만원만 있으면 좋겠다는 거였죠. 충무로에서 사부님(윤진호씨)의 조수가 되면서 교통비로 하루 5만원 정도 받으면서 일한 게 대학로에서 활동한 것보다 더 짭짤하더라고요.”
그의 첫 데뷔작은 86년 이장호 감독의 ‘공포의 외인구단‘. 그후 프리랜서로 독립하면서 맡은 ‘계약커플‘을 비롯 최근 ‘아프리카‘ ‘유아독존‘ ‘오! 해피데이‘까지 그가 참여한 영화만 해도 대략 30여편 정도에 이른다. 그중 이름도 없이 사라진 작품도 있지만 그에게는 하나같이 소중한 자식들과 다를 바 없다.

돈 없던 시절 섬에 갇히고 여관에서 쫓겨나기도 여러번
일단 영화촬영이 시작되면 촬영팀을 따라 전국을 누비는 것이 그의 일상이다. 덕분에 작업환경이 열악했던 시절에 겪은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셀 수 없다. 중간에 제작비 지원이 끊겨 묵고 있던 여관에서 쫓겨나 버스 안에서 잠자리를 해결하는가 하면 얄궂은 날씨 탓에 외딴 섬에 발이 묶인 적도 여러번이다. 얼마전에는 스태프를 태운 봉고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겪기도 했다.
“지방 촬영을 다니면서 가장 큰 문제는 음식과 잠자리예요. 먹을거리가 흔치 않은 시골에 가면 구멍가게에서 파는 오래된 초콜릿도 없어서 못 먹죠. 한번은 물이 귀한 섬에서 스태프들이 식수로 머리를 감다가 동네에서 쫓겨난 일도 있었어요.”
과거 분장사까지 남자 스태프가 도맡아하던 시절, 그가 여자라는 점은 결정적인 핸디캡이 되기도 했다. 촬영장에서 유일한 여자 스태프였던 그는 숙소를 따로 마련해주어야 한다는 이유로 번번이 지방 촬영에서 제외되었다. 성질 고약한 선배들에게 발길로 걷어차이거나, 소속된 부서가 없어 혼자 밥을 먹거나 아예 굶었던 가슴아픈 기억도 있다.
영화 한편당 그가 사용하는 필름은 대략 70∼80롤. 3만여장의 사진이 그의 카메라에 담기는 셈이다. 그중 스틸용 사진으로 활용되는 것은 1-10 정도. 나머지는 가차없이 폐기처분된다. 대신 현장에서는 재미있는 일도 많다. 이규형 감독의 ‘공룡선생‘을 찍을 때는 엑스트라 여선생으로 출연해 배우로 데뷔(?)하기도 했다. 포스터용 사진촬영은 다른 작가가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가 찍은 스틸사진에서 포스터가 나온 적도 있다. 변우민, 옥소리 주연의 ‘하얀 비요일‘과 박상원, 황신혜 주연의 ‘서울 에비타‘가 그것.

국내 영화 스틸작가의 대모 권순미의 카메라 인생

그는 같이 작업한 배우들 중에서 가장 인간성이 좋은 사람으로 국민배우 안성기를 꼽았다.


“영화 ‘하얀 비요일‘은 사부님 대신 딱 하루 나가서 찍은 사진이 포스터가 된 경우예요. 영화관 앞에 걸린 포스터를 보거나 비디오로 나온 영화 뒤편에 내가 찍은 사진이 실린 것을 볼 때는 혼자만 느낄 수 있는 묘한 기쁨이 있어요. 그것 때문에 이 일을 계속하는지도 모르죠.”
12세, 8세 난 두 아이를 두고 있는 그는 결혼후 일을 그만둔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남편이 정치에 뜻을 품으면서 힘겨운 시기를 거쳐야 했고 이는 그를 다시 ‘현장’으로 나서게 했다.
“강원도 한 지역 보궐선거에서 남편이 낙선하면서 갑자기 경제적으로 어려워졌어요. 게다가 둘째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 부득이하게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죠. 그때 심한 우울증에 빠져 힘든 시기를 보냈는데 다시 저를 구제해준 것이 바로 사진이었어요.”
현재 남편은 정치에 대한 꿈을 버리고 공기업 연구원 겸 지방대학 강사로 일하고 있다.
다시 영화촬영 현장으로 나온 것이 지난 99년. 4년 만에 충무로에 복귀했지만 빠르게 변하는 영화계는 이미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후였다. 어렵게 영화 ‘잎새‘로 촬영장에 복귀한 그는 얼마전 장나라와 박정철 주연의 ‘오! 해피데이‘의 촬영을 마쳤다. 40대 아줌마인 그가 세대차이를 극복하고 조카뻘 되는 어린 스타들과 충돌없이 지내올 수 있었던 비결은 그의 편안한 성격 때문. 물론 배우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도 그가 오랫동안 지켜온 철칙이다.
“배우들의 나이가 어려지면서 일하기 힘들어진 건 사실이에요. 얼마전에 여배우 4명이 주인공인 영화가 있었는데, 유독 두 여배우 사이의 알력이 심해서 사진 찍는데 고생했어요. 최근에 작업한 한 여배우는 주변 사람들의 지나친 ‘보호’ 때문에 나머지 스태프들의 마음고생이 심했죠.”
그가 꼽은 인간성이 좋은 배우는 역시 국민배우 안성기다. 그에 따르면 안성기씨는 평소 스태프들과 살가운 말투를 주고받는 편은 아니지만 한번 같이 작업한 스태프는 오랜만에 만나도 절대로 잊는 법이 없다고. 그와 연달아 2편의 영화를 같이했던 여배우 유혜리는 촬영이 끝난 후에도 사석에서 따로 만나 식사를 했을 정도로 친하게 지낸 유일한 배우다.
“영화 ‘유아독존‘을 찍을 때였어요. 저쪽 창문에서 안성기씨가 스태프들이 모여있는 우리쪽을 보고 계속 손을 흔드는 거예요. 누구한테 저렇게 반갑게 인사를 하나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저를 보고 오랜만이라며 반갑다는 인사를 하신 것이더라고요.”
사진작가이지만 그는 장비 욕심을 버린 지 오래다. 별도의 조명장치나 배우의 연출이 아닌 영화의 장면 일부를 찍기 때문에 장비는 간단할수록 좋다는 것이 그의 생각. 대신 스틸작가로서 그가 고집하는 부분이 있다.
“정확한 구도보다 사진의 느낌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스틸 사진 속에는 극중 배우의 모습뿐 아니라 실제의 모습도 함께 드러나거든요. 극중 아주 친한 역할이지만 실제로 두 배우의 사이가 좋지 않을 때가 있어요. 사진 속에 그런 모습을 살짝 잡아내는 게 저만의 즐거움이에요.”
오래 하다보니 직업병도 생겼다고 한다. 오른쪽 눈은 악성 난시가 된 지 오래고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 다니느라 어깨 통증도 심하다. 하지만 그가 후회없이 사진작업을 해올 수 있었던 데에는 집안 내력도 무시할 수 없다. 부친의 유일한 취미가 바로 사진 찍기. 강원도 한 시골에 살면서도 암실을 따로 두었을 만큼 사진을 좋아했던 부친은 당시 고가였던 8mm 촬영기를 구입하거나 고성능 카메라의 현상을 위해 일본까지 다녀오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고.
“어릴 적엔 사진기자가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창작의 과정에 동참한다는 데 큰 보람을 느껴요. 디지털화되면서 영화 스틸작가의 입지가 좁아져 섭섭하긴 하지만 ‘그 사진 좋았어’라는 말 때문에 아직도 카메라를 놓지 못해요.”
최근 강수연 주연의 영화 ‘써클‘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는 그는 요즘도 촬영과 집안일을 동시에 챙기느라 바쁘다. 덕분에 아이들과 ‘보고성’ 전화를 주고받느라 휴대전화도 덩달아 바빠졌다는 그는 “일과 집안일을 해내는 것 보면 남편이 참 대단한 사람인가 보다”라는 말이 가장 듣기 싫다고. “제가 일하는 것에 대해 남편이 심적인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은 고맙게 생각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제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가려지는 게 섭섭하다”는 이 맹렬여성의 바람은 나이 오십에도 카메라를 메고 현장을 누비는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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