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관수동 서울극장 6층 사무실. 국내 최대 영화 배급망을 갖춘 서울극장의 대표이사 자리치고는 너무나 옹색하다. 집무실이래봤자 직원들과 같이 사용하는 사무실 한 구석에 칸을 나눠 회의용 책상과 의자를 놓고 사용하는 것이 전부이고 별도의 접대실도 두지 않았다. 옆에 극장을 새로 짓는다더니, 시끄러운 기계음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이런 어수선하고 검소한 분위기 속에서 왕년의 인기 영화배우 고은아씨를 만났다. 우리나라 나이로 쉰여덟이라는데 너무나 젊어 보였다. 화살같이 흐르는 세월도 그만 빗겨 갔는지 피부는 여전히 팽팽하고, 스커트 정장을 입은 몸매에도 나잇살이 붙은 티가 전혀 나지 않는다. 얼마나 엄격하게 자기관리를 해왔을지 추측이 되면서 ‘역시 스타는 스타구나’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쳐갔다.
지난 95년 그는 15년간 맡아왔던 기독교방송의 간증 프로그램 ‘새롭게 하소서’의 진행을 끝으로 대중 앞에 나서지 않는 길을 택했다. 서울극장 대표를 맡았을 때 잠시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 외엔 매스컴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공식적인 인터뷰 역시 피해왔다. 이처럼 조용히 살아왔기에 그가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재활용품 상설매장인 ‘생명창고’의 대표로 위촉됐다는 소식은 언론의 집중적인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극장이) 지금 신축 공사중인데다가 마음의 여유도 없어서 몇번 고사했어요. 저보다 능력 있고 사회적으로 더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이 일을 맡는 게 더 효과적일 것 같기도 했고요. 하지만 한국기아대책기구 관계자께서 하도 열의를 가지고 맡아달라고 부탁하길래 더 미루는 게 도리어 죄송스러운 것 같아 받아들이기로 했지요.”
연기활동하면서 꾸준히 봉사해온 그를 눈여겨보고 ‘생명창고’ 대표로 추천해
99년 처음 청담동에 문을 연 60평 규모의 ‘생명창고’는 영국에 50개 이상이나 되는 매장을 갖추고 있는 극빈자 구제기관 옥스팜(Oxfam)을 벤치마킹해 설립됐다. 개인이나 기업체 혹은 단체들로부터 각종 물품을 기증받아 이를 판매하는 국내 최초의 상설 할인 재활용품 매장으로 가구, 가전류부터 장난감, 의류, 서적, 액세서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중고품들을 취급한다. 가격은 2백원부터 1만원에 이르기까지 각각인데, 대부분 1천원대면 구입이 가능하다.
매달 5백만원 정도의 수익이 나는데, 수익금 전액은 국내 결식학생 및 노숙자, 장애인 지원은 물론 제 3세계의 가난하고 굶주린 이웃을 살리는 데 쓰인다. 우간다, 아프가니스탄 등의 저개발국의 아동교육과 보건위생 사업, 극심한 가뭄으로 인한 수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우물파기 사업 등에 도움의 손길을 뻗고 있으며 나아가 북한의 수경재배 사업도 간접 지원중이다. 올해 예산은 약 86억원으로 국내에 42억원, 북한에 20억원을 지원할 예정이라고 한다.
“중고품 기증은 낡은 물건을 재활용하자는 취지를 넘어서 전쟁과 기아로 죽어가는 이들을 살리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 취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 꾸준히 노력할 겁니다. 아직 업무를 본 지 1주일밖에 안됐지만 더 많은 이들로부터 많은 기증을 받기 위해 발벗고 나설 거예요. 개인적으로나 교회를 통해 늘 봉사하는 일을 해왔기에, 낯선 업무지만 크게 어렵지는 않을 거라 생각해요. 제 나이에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봉사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할 거예요.”
지난 65년, 홍익대 미대에 재학 중이던 그는 정진우 감독의 ‘란의 비가’로 스크린 데뷔를 했다.‘갯마을’ ‘며느리’ ‘과부’ 등의 히트작을 남기며 1백5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그는 전형적인 한국의 여인상으로 꼽혀 왔다. 67년에는 TV로도 진출해 ‘사모곡’ ‘연화’ ‘달래’ 등의 히트 드라마를 남기기도 했다. 78년 은퇴한 후에는 일절 영화계로 복귀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다가 90년에야 MBC TV ‘제 2공화국’에서 육영수 여사 역을 맡아 팬들과 재회하기도 했다.
95년 필리핀 마닐라의 빈민 지역에서 마을주민과 기도회를 가졌을 때. 단상에 서있는 이가 고은아씨다(왼쪽). 87년 시설아동돕기 바자회에 참가했을 때(오른쪽).
화려해 보이는 연예계에서 연기자로서 정상에 서는 등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지만, 그에게는 연기만큼이나 중요한, 다른 내적 삶이 있었다. 그것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인의 삶이었다. 신앙인으로서 그의 모토는 ‘섬기고 나누는 생활’을 하자는 것. 출연료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상업방송을 마다하고 가장 열악(?)하다고 꼽히는 기독교 방송을 택해 15년 동안 일을 해온 것이나 예능교회 권사로서 다양한 봉사활동을 벌여온 것도 다 한 맥락이다. ‘타오르게 하소서’를 비롯해 꾸준히 자선 뮤지컬을 무대에 올려 그 수익금으로 굶주린 이웃을 돕기도 했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이 뮤지컬을 봤던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의 한 관계자가 그를 눈여겨보고, ‘생명창고’의 적임자로 ‘낙점’했다고.
화려했던 지난날의 여러 활동 중에서 고씨가 가장 소중하게 꼽는 일은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던 ‘은막의 스타’로서의 활동이 아니라, 의외로 방송 일이다. 하긴 15년이라는 긴 시간을 한 방송에 쏟는다는 것은 그만한 애착이 없다면 불가능할 터.
“개인적으로 전 신앙 간증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된 걸 행운이라 여깁니다. 사람과 세상, 사회를 보는 시각을 새롭게 만들어준 셈이니까요. 매일 1시간씩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이들부터 박사 출신까지, 영세민부터 최고의 부자까지, 건강한 선수부터 고무를 배에 대고 기어가는 장애인까지 다양한 출연자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우리는 서로 돕고 돕는 공동체구나 깨닫게 되었죠.”
지금에야 공중파 방송이나 인터넷, ARS 등에서 어려운 이웃을 돕는 프로그램을 흔하게 볼 수 있지만 80년대만 해도 그런 프로그램이 드물었다. 유일하게 ‘새롭게 하소서’만이 그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
“작가도 없이 PD가 주는 서너 줄의 쪽지로 1시간을 이끌어갔지요. 개인의 사연을 낭독하거나 대담한 후 청취자들에게 성금을 보내달라고 호소하는 형식이었어요. 출연자의 사연을 충실히 전달하는 것이 핵심이었죠. 매일 매일의 방송이 제겐 ‘학교’나 다름없었어요. 힘든 처지의 사람이 더 힘든 사람을 돕겠다고 나서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했어요.”
그러나 교훈도 많이 얻었지만 매일 신앙인들만 만나는 삶을 하다 보니 대인관계의 폭이 너무 좁아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이 들었다. 어려운 결단이었지만 프로그램을 그만두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우선 사회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남편 곽정환씨(74·서울극장 회장)로부터 극장 사업을 인수받았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곽씨는 영화계에서는 ‘숨어있는 권력자’다. 전국 요지에 다수의 극장을 소유하거나 자신의 영향권 아래 두고 있는 그는 그 ‘막강한 배급력’으로 웬만한 스타 감독보다 더한 권위를 지니고 있는 거물이다.
영화제작자였던 남편 만나 36년째 해로
“배우가 되고, 방송을 하고, 사업을 맡고… 남들이 보기엔 부럽고 그저 화려해만 보이는 삶일 거예요. 하지만 제가 희망해서 이런 삶을 살아온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전환이 필요한 시점에는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삶의 방향이 바뀐 것 같아요. 비록 제가 원하지 않았더라도 말이죠. 그렇다면 그 변화가 나쁜 것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그저 삶이 제게 주는 것들은 받아들이며 살려고 노력하는 것, 그게 제 삶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고씨는 곽씨와 결혼해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올해로 결혼생활 36년째에 이른다는 이들 부부는 금실 좋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자녀들도 모두 출가해 가정을 꾸리는 등 다복한 삶을 살고 있다. 장남 승남씨(36)는 연세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경영학석사를 마친 후 영화 관련 사업을 공부하고 있으며, 차녀 승경씨는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을 다녀왔다. 이들이 각각 3명, 1명의 손자 손녀를 낳는 바람에 젊어 보이는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고씨는 ‘할머니’다.
72년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때의 모습(왼쪽). 그는 60, 70년대 한국적 여인상을 주로 연기해왔다(오른쪽).
“두 아이 모두 졸업 후 결혼을 시켜 유학을 보냈는데, 우리 아들은 요즘도 ‘우리 엄마, 아빠 같은 사람은 없다’고 투덜거려요(웃음). 엄마, 아빠라는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무관심할 수 있느냐는 항의죠. 그런 소리 들어도 싸다고 인정해요. 1년에 한번이나 아이들 보러 다니러 갈까…. 애들 보러 가서도 고작 있어야 닷새 이상 머물러 본 적이 없으니, 무심한 부모로 비칠 만했죠. 남편이나 저나 워낙 바빴거든요.”
이들 부부는 유학 가 있는 자녀들에게 갈 때도 아이들 숙소가 아닌 호텔에서 묵었다고 한다. 냉정해 보이지만, 실은 배려가 숨어있다. 고달픈 유학생활을 하면서 부모가 왔다고 아이들이 괜히 집안 청소하고, 빨래하고, 음식 대접하기 위해 고민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호텔을 잡는다는 것. 옆방에는 반드시 자식 부부의 방을 따로 잡아놓았다고. 그건 며칠 동안이지만, 부모 덕에 편히 쉬는 기분을 맛보게 해주기 위해서였다고.
요즘 고씨는 아들, 며느리, 사위, 손자를 매주 예능교회에서 함께 만난다. 예배 보고 식사를 하고 각자 집으로 헤어지는데, 소소한 이야기들이 오가는 이 시간이 그로서는 가장 즐겁다. 손녀딸에게 구구단을 외우도록 연습 시키는 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극성을 부리며 아이들 키우던 초보 엄마 시절이 절로 생각난다”는 그다.
“당시엔 왜 그렇게 아이들에게 매달렸는지 몰라요. 방송국과 촬영장을 오가면서도 아이에게 구구단을 외우게 하려고 ‘2단 해봐’ 이랬으니까요. 그 시간에 그저 잠이나 푹 재울 걸 말이죠.”
이런 일도 있었다. 아들 승남씨가 초등학교 1학년 무렵이었다. 스피드 스케이트 타는 법을 가르쳐주고 싶었던 그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아들을 깨워 차에 태워 태능 스케이트장까지 데려다주고, 1시간 훈련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차 안에서 아침을 먹이고 학교까지 데려다주는 일을 매일 반복했다.
훈련장은 물론 시합까지 따라다니며 지극 정성으로 뒷바라지했는데, 어느날 문득 아이가 굉장한 소질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걸 계속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고 한다. 고민 끝에 ‘취미로 삼자’고 마음을 돌이켰다. 그랬더니 아이도 그도 편안해졌다고. 그래서 딸에게도 “아이한테만 너무 매달리지 말라”고 누누이 당부한다. 아이들은 물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건 스스로 개발하는 것이지, 누가 갖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부모는 ‘가능성’을 이끌어주는 기회는 줄 수 있다.
“젊은 엄마들이 아이 때문에 아무것도 못한다고 하는 말을 듣는데, 전 그건 핑계라고 생각해요. 엄마가 육아에만 매달려서는 안돼요. 엄마들도 자신을 위해 투자해야 해요. 남편들처럼 무언가를 배우는 걸 두려워하거나 아까워해서는 곤란하죠. 집안의 엄마가 자신의 삶이 있어야 남편과 아이들도 그 엄마를 존중해주는 법이니까요.”
고씨는 매일 아침 10시에 출근해서 오후 5시 반경에 퇴근하는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주말이면 꼬박꼬박 남편과 운동을 하고, 최근에는 욕심을 내 디자인 관련 강의도 듣고 있다. 전성기 못지않은 왕성한 활동은 그의 나이를 짐작지 못하게 한다. 그는 “이순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나이지만, 늙는다는 것이 두렵지도 싫지도 않다”며 밝게 말을 이어갔다.
“언젠가 장례식 훈련이라는 것을 해본 일이 있어요. 스스로 죽었다고 가정하고 저의 죽음을 진정으로 애도해줄 사람이 몇명이나 될까 생각해봤죠. 이제껏 지나온 세월과 만났던 사람들이 오버랩되면서 참 숙연하고 슬픈 마음이 되더군요. 그때 저는 이런 결론을 내렸어요. 인생의 전반이 아무리 아름다우면 뭘 하냐고. 중요한 건 마지막이죠. 인생의 후반부가 참으로 깨끗하게 마무리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인생, 후회 없는 인생이죠.”
그 인생의 후반부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일로 ‘생명창고’ 활동을 택했다는 고은아씨. 그는 현재 청담동에 1호점 밖에 없는 ‘생명창고’ 매장을 전국 방방곡곡으로 늘려가고 싶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뜻 있는 독지가들의 후원과 지원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자신에게는 쓸모없는 물건일지 모르지만, 그 물건이 다른 이들을 살리는 데 쓰입니다. 여러분의 기증과 참여가 늘어날수록 ‘생명창고’는 더 많은 생명을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집안에 사용하지 않고 쌓아두는 물건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생명창고 02-544-9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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