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에 생활만화 <비빔툰>을 연재하고 있는 홍승우씨(34). 바쁘고 지친 샐러리맨 ‘정보통’과 두 아이의 육아·가사에 지친 그의 아내‘생활미’, 그들 사이에서 온갖 재롱과 말썽을 부리는 다운이와 겨운이. 이들 네 식구의 모습에서 386세대의 애환과 사랑을 따뜻하고 재미있게 그려내고 있는 홍씨가 최근 생활 속의 또 다른 이야기인 ‘부부의 성’을 들고 찾아왔다. 제목에서부터 야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야야툰>이 바로 그것.
“비빔툰을 그리면서 한계를 느끼곤 했어요. 성도 생활의 일부인데 일간지라는 특성 때문에 제대로 그리기가 어렵거든요. 언젠가 콘돔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 적이 있는데 초등학생의 아빠라고 밝힌 독자가 ‘초등학생이 보기에 너무 수위가 높은 것 아니냐, 책임질 수 있느냐’는 항의 메일을 보내왔어요.”
이처럼 신문만화를 그리다 보니 하고픈 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 없음을 실감했다. 그래서 2년간에 걸친 준비 끝에 그동안 꼭 하고 싶었던 성에 대한 이야기들을 이번 작품집 <야야툰>에 마음껏 풀어놓았다고 한다.
“평소 성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았어요. 성생활은 어른이라면 당연히 하는 것인데, 아직도 우리 사회는 성생활을 입 밖으로 꺼내는 걸 못 견뎌하는 분위기예요. 이런 문화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생각해 보세요. 성은 신이 인간에게 준 축복이에요. 성이 없다면 얼마나 각박하고 재미없는 삶이 되겠어요. ‘아기를 어떻게 신비하게 낳는가’라는 생명의 근원으로 접근하면 섹스는 전혀 음란한 것도 경박한 것도 아닌 게 되죠. 이 부분을 말하고 싶었어요.”
그동안 성인들을 위한 재미있는 성 만화가 없었기 때문인지 출간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독자들의 반응이 다양한 편이라고 한다. ‘기대를 많이 했는데 실망했다’ ‘부부의 성에 대해 더 깊이 들어가야 하는데 수박 겉핥기만 한 거 아니냐’ ‘이거 너무 야한데 검열당하는 거 아니냐는’ 등 다양한 의견을 보내온다는 것. 홍씨는 독자들의 수준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고 높아졌음을 실감한다며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19세 미만 구독 불가’라는 딱지가 붙여졌다는 이유로 성인만화는 서점의 깊숙한 곳에 묻혀있어야 하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성인들이 즐길만한 아기자기한 성 이야기들이 많아지고, 서점에도 성인들만을 위한 책, 만화, 비디오 등을 전시한 코너가 마련되어 쉬쉬하지 않고 드러내며 말할 수 있는 성문화가 정착되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아이가 둘이나 되다 보니 저희 부부도 ‘애가 깨기 전에 빨리 하자’며 초스피드로 섹스를 한 적이 많았어요. 아마 아이 키우는 분들이라면 이해하실 겁니다. 이처럼 만화의 80% 정도가 저희 부부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어요. 그 외는 인터넷에 올라온 다른 부부들의 이야기와 제 개인적인 생각들을 재미있게 각색했고요. 다른 만화들과는 달리 제 만화는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경험에서 나오는 이야기들로 꾸며질 수밖에 없었죠.”
그의 말처럼 만화 곳곳에는 무릎을 ‘탁’치며 ‘이거 우리 부부 이야기 아니야?’라고 할만한 내용들이 많다. 더불어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 생활미의 힘 없는 가슴과 정보통의 불룩 나온 배는 이 만화가 성에 대한 판타지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성의 일상을 표현하고 있음을 잘 말해준다.
어디 그뿐인가? 연애시절 처음 여관에 가던 날 흥분을 참지 못한 정보통이 활미의 손길에 삽입도 하기 전에 사정하고마는 ‘멋진 섹스’, 폭력적이고 과장된 포르노에 익숙한 정보통과 은밀하고 애무에 중심을 둔 상상력이 동원된 포르노를 좋아하는 생활미를 통해 여성과 남성이 성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름을 잘 표현한 ‘두 종류의 포르노’ 등 상상력과 유쾌함이 어우러진 만화들을 만날 수 있다.
홍승우씨의 가족들. 사는 모습이 만화 비빔툰과 비슷하다.
또한 그의 만화엔 성기와 체모, 그리고 여러가지 체위까지 그려져 있지만 음란함과는 거리가 멀다. 아마도 과장되지 않은 우리들의 몸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부부끼리 서로의 성기를 매일 바라보고 사는 것이 우리의 생활 아닌가요? 서로의 육체에 대해 알고 사는 사이니까 야할 것도 없지요. 그리고 명랑만화의 틀을 유지하기 위해 신체를 자세히 묘사하지 않고 이미지로 그려서 덜 야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웃으면서 지나칠 수 있는 만화지만 이 만화가 독자들의 성에 대한 생각이나 가치관에 좋은 영향을 끼쳤으면 좋겠어요.”
책에서 재미있는 내용 중의 하나는 무척 긴 분량을 차지하는 정보통의 ‘몽정기’다. 초등학생 시절, 철봉 쇠기둥에 매달려 올라가면 갈수록 느껴지는 황홀감은 정보통이 처음 접한 성이었다. 또 중학생이 되어 소위 ‘딸딸이’라고 말하는 자위행위를 처음 하던 날 “하느님, 감사합니다. 지금보다 더 기쁜 세상이 있다는 거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정보통은 고백한다. 여성의 성기를 음란 잡지에서 처음 보고 난 뒤 만나는 여자마다 온통 벗은 몸을 상상하게 되는 그의 모습은 남자라면 한번쯤 겪어봤을 경험들이다.
“몽정기는 대체로 저의 어린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그린 거예요. 저희 어머니도 성에 대해 무척 보수적인 분이셨어요. 만화에서처럼 어머니는 제게 ‘고추 장난하면 정액이 한번 나올 때마다 보름치 영양분이 빠져나오고 너무 자주하면 죽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죠.”
그는 만화를 그리는 동안 남성 중심으로 바라봤던 성을 여성 입장에서도 바라보게 되었다고 한다. 섹스를 하고 나면 남자들은 보통 기가 빠져나가 잠을 자게 된다. 홍씨도 마찬가지였는데 아내는 오히려 눈을 반짝이며 대화하고 싶어하더라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결혼 전에 가지고 있던 성에 대한 판타지를 무참히 깨뜨리고 아내의 입장이 되어 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남자들은 대부분 음란물에서 여성의 성기와 몸을 처음 접하게 돼요. 그게 성교육이었죠. 그러다 보니 남자들은 공격적인 섹스를 해야 할 것 같고 여자들은 수동적일 거라는 강박관념을 가지게 돼요. 그러다가 결혼을 하고, 부부생활을 하면서 여자에 대한 환상이 와르르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돼요. 저도 그런 경험을 많이 했어요. 그때 ‘성이 이런 것이라는 걸 진작에 알았었다면 좀더 현실에 맞는 판타지를 꿈꾸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 뒤로 일부러라도 성에 대해 아내와 대화를 하게 되었고 ‘부부가 서로 즐길 수 있는 성’으로 만들어가려고 노력하게 됐죠.”
아직도 성에 대해 보수적인 우리 사회에서 부부의 성을 말했다는 것에 대해 아내와 가족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어른들께는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자연스럽게 아시게 될 때까지 말씀드리지 않을 생각이에요. 아내는 책을 보고 나서도 아무 말이 없던데요(웃음). 처음에 아내는 <야야툰>을 그리는 것에 부담감을 많이 가졌어요. 그래서 설득을 하는 데 시간이 걸렸죠. 대부분의 여성들이 성에 대한 노출을 꺼려하는데 부부만이라도 터놓고 이야기하면 서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겠냐며 설득했죠.”
결혼 후 아내를 보며 깨진 성에 대한 환상
그는 집에서 작업을 한다. 일산에 위치한 그의 아담한 빌라에 들어서면 온통 장난감 투성이다. 방바닥에는 낙서가 잔뜩 그려져 있고 벽에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다. 아빠를 닮아 그림에 재능을 보인다는 동훈이(6)와 이제 한창 말썽을 부리기 시작하는 딸 유나(3), 그리고 이 가정의 지킴이 아내 정지연씨(32)는 하루도 조용할 날 없이 북적대며 살아간다.
“우리 집은 일과 생활이 뒤죽박죽이에요. 몇년 전에는 좀 분리해볼까 하고 작업실을 따로 만들어 나갔었는데, 조용하니까 오히려 일이 안되더라고요. 자꾸 집에 전화해서 무슨 일이 없는지 안부를 묻게 되고(웃음). 그래서 몇달 못 버티고 다시 집으로 들어왔죠. 생활만화를 그리니까 역시 집이 편하더군요.”
아들 동훈이와 게임을 하는 모습을 직접 만화로 그려주었다.
그의 일상은 다른 아빠들과는 다르다. 하루 종일 집에 있기는 하지만 2층 작업실에 틀어박혀 아이들 얼굴 보기도 어려울 때가 많다. 오전에 시작해서 신문 마감시간인 오후 2시까지 작업해야 하는 일상은 그에게도, 가족에게도 스트레스가 쌓이는 일임에 틀림없었다. 하루 세끼 모두를 책임져야 하는 아내 정씨도 사실은 남편과 함께 작업하는 것과 똑같았다.
“직장에 나가는 다른 아빠보다는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는 시간이 많은 것 같아요. 아이들이 어릴 때는 기저귀 갈기, 우유 먹이기 등을 도와주기도 했죠. 하지만 요즘은 놀아주기만 해도 제게 큰 도움이 돼요. 반면에 아침에 눈 뜨면 남편은 말이 없고 기분이 좋지 않아요. 마감해야 한다는 것에 신경이 쓰여 다른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까요. 집에서 하루 종일 함께 생활하니까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어요. 하지만 만화가니까 감수하면서 살아야지요.”
마감이 그렇게 힘드냐는 질문에 두 사람은 마주보고 “어휴”하며 한숨부터 내쉬고 웃었다. 온 가족이 비빔툰 만화를 그려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는 두 사람. 아내 정씨는 남편 홍씨를 8년 전에 만나 결혼했다. 일본에서 음향 공부를 하고 돌아와 취직을 했던 정씨는 일본에서 알고 지냈던 홍씨 누나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결혼과 동시에 집안 살림하는 것이 너무 좋았던 정씨는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었다.
온 가족이 함께 만드는 만화 <비빔툰>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아내에게 직장을 계속 다니라고 할 걸 하는 후회도 조금 돼요. 육아와 가사, 그리고 제 뒷바라지에 지쳐 가는 아내를 보면 미안하거든요. 자신의 꿈을 접고 살아가니까 가끔 우울해하는 것 같고. 하지만 제가 성공하게 된 것은 다 아내의 공입니다. 저는 사실 아내처럼 피 튀기며 육아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자기 전이나, 식사 때마다 아내가 들려주는 아이들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가 없었다면 생활만화를 그릴 수 없었을 겁니다.”
아내는 많이 이야기하는 편은 아니지만 가끔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말해준다. 그러면 그는 그 아이디어를 보물처럼 담아두었다가 각색해서 만화로 그리곤 한다. 그는 아내를 위해서 함께 동화책 작업을 하기도 했다. 부담스러워하는 아내에게 우리 아이들을 위한 책을 만들자고 설득해서 총 5권의 동화를 만들기도 했다. 아내의 재능을 발견하고 키워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둘째 유나는 동화책 읽자고 하면 항상 그 책만 들고 온단다.
홍씨는 홍익대 만화동아리 ‘네모라미’에서 활동하며 만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등단했던 시기에 경제 위기가 닥쳐 연재중이던 잡지들이 모두 폐간되어 답답해하던 그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생활정보지 ‘한겨레리빙’에 선배 만화가의 추천으로 연재를 할 수 있게 된 것. 생활정보지라는 특성을 살려 ‘정보통’과 ‘생활미’ 두 주인공을 탄생시켰고, 그뒤 한겨레신문으로 옮겨 지금까지 ‘정보통’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그도 한때 생활만화를 계속 그릴 것인가 하는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고.
“이렇게 사소한 일을 그린 만화가 사람들에게 먹힐까, 내가 제대로 하고 있나, 하는 고민이 항상 따라다녔죠. 아내가 둘째를 임신했을 때였어요. 너무 스트레스가 쌓여서 동훈이를 많이 때렸죠. 신경이 날카로우니까 아이에게 화풀이를 하게 되더라고요. 생활만화를 그린다는 사람이 이래서 되는가 하는 회의가 들었어요. 그래서 7개월 동안 휴식기를 가졌어요. 쉬면서 ‘내가 갈 길은 생활만화가구나’ 하는 확신을 굳혔어요. 이젠 흔들림 없이 다운이와 겨운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만화를 그릴 겁니다.”
앞으로도 그의 만화를 통해 평범한 우리네 삶이 아주 특별한 일상으로 재조명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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