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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사랑에 목말라 있는 아이들

자신들의 체험 연극 <엄마! 엄마!> 무대에 올린 10대 가출 소녀들

■ 기획·최미선 기자(tiger@donga.com) ■ 글·김정미 ■ 사진·백종하

2003. 01. 14

지난 12월11일, 가출소녀들의 이야기를 극화해 관객들로부터 감동과 눈물의 박수갈채를 받은 연극 <엄마!엄마!>는 이야기의 실제 모델이기도 한 창원여성의 집 대안학교 학생들이 직접 열연해 더욱 관심을 모았다. 가족에게 버림받은 아픈 상처를 연극을 통해 치유해나가는 10대 가출 소녀들의 진한 감동의 이야기.

자신들의 체험 연극  무대에 올린 10대 가출 소녀들

“나는 엄마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처음 본 아저씨를 따라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몇번 더 그렇게 낯선 아저씨들을 따라가야만 했습니다. 집 부근에서 다방을 하던 새엄마는 자주 나에게 티켓을 끊어주었습니다. 나는 내 자신이 싫었어요. 엄마에게 사랑을 구걸하는 내 자신이 싫었어요.”
나직이, 허공을 가르며 읊조리는 무대 위의 작은 소녀. 가슴을 끌어안으며 두 뺨을 타고 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관객들. 지난 12월11일, 경남 창원 성산아트홀 소극장은 절규하는 작은 영혼들의 울부짖음과 자리를 뜨지 못한 채 뜨거운 감동의 박수를 보내는 관객들로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이날 관객을 눈물 바다로 만든 주인공은 가출소녀들로 구성된 창원여성의 집 대안학교 ‘범숙학교’ 학생들. 범숙학교 학생들의 연극 <엄마! 엄마!>는 관객들의 열광적인 호응으로 3회 예정이었던 공연이 4회로 연장되었는가 하면, 서울여성프라자 아트홀에서 열린 ‘가출소녀인권대회’에까지 초청받는 등 전국 규모로 화제를 모았다.
더구나 연극의 뼈대가 되는 이야기 구성이 범숙학교 가출소녀들의 실제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것이고 이들의 심리묘사에 중점을 두었기에 더욱 관심을 끌었다. <엄마! 엄마!>는 아버지에게 매맞고 삼촌한테 강간당한 ‘미영이의 홀로서기’, 딸이 친아버지에게 강간당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무시하는 엄마를 그린 ‘지영이의 악몽’, 엄마아빠의 관심을 끌기 위해 물건을 훔치다 정신병원에 갇히는 과정을 그린 ‘솔이의 눈물’,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짓는 ‘경숙의 독백’까지.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동안 매스컴을 통해 떠돌던 이야기들이 이곳 아이들의 실제 삶이었다는 사실은 적잖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누군가는 말한다.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가족으로부터, 가정으로부터 ‘가출’한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자신을 구해줄 또 다른 세상을 향해 ‘탈출’한 것이라고.
창원 시내를 조금 벗어나 북면 동전리에 자리잡은 ‘창원여성의 집’. 지난 97년 개관한 이곳 창원여성의 집은 가톨릭 사회복지법인 범숙재단이 설립하여 운영하는 여성복지시설이다. 가정폭력을 피해 여성과 자녀들을 위한 모자일시 보호시설을 비롯해 가출소녀 선도보호시설, 위기의 여성전화 1366, 사랑의 푸드뱅크 등 여성들을 위한 다양한 복지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 가운데 가출소녀 선도보호시설의 하나로 지난해 9월 발족된 범숙학교는 우리나라에서도 손꼽히는 시설형 대안학교로 아직 정식인가는 받지 못했지만 서울, 대전, 거제도 등 전국에서 모여든 20여명의 가출 소녀들이 마음의 안정을 취하며 자신의 소중한 꿈을 키워가고 있다.
범숙학교 교무실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바로 ‘열등감으로부터 자유’ ‘제도적 억압으로부터 자유’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라는 세 가지의 교육 목표를 담은 액자. 그리고 벽 한쪽에는 저마다의 꿈을 적어놓은 아이들의 사진이 줄줄이 붙어있다. 무용가, 경호원, 조련사, 가수, 백댄서, 간호사….
“아이들이 처음 이곳에 올 때는 대개 가정에서, 학교에서 버림받았다는 생각 때문에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태죠. 그런데 차츰차츰 시간이 지나면서부터 아이들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오는 거예요. 순간, 당황스러우면서도 얼마나 기뻤던지…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아요.”
이곳 선생님들을 당황하게, 그리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만든 아이들의 말은 다름 아닌, “선생님, 교복 입고 싶어요” “선생님, 학교에서처럼 책 펴놓고 공부하고 싶어요”라는 단 두 마디였다.
학교에서 늘 꼴찌 주위만 맴돌던 아이들, 문제아로 낙인 찍혀 선생님의 눈치만 살펴야 했던 아이들, ‘학교라면 이제 지긋지긋해요’라고 소리칠 줄 알았던 아이들이 공부하길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선생님들에겐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청소년 선도사업의 하나로 생활교육 프로그램만 운영하던 터라 정규교육은 꿈도 꾸지 못할 때. 교복을 입고 공부하고 싶어하는 아이들을 위해 범숙재단은 대안학교의 성격을 띤 지금의 창원여성의 집 ‘범숙학교’를 세우게 되었고, 아이들은 외부 강사진의 도움을 받아 검정고시반 수업과 미용, 풍물, 연극 등 적성에 맞는 특별수업까지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자신들의 체험 연극  무대에 올린 10대 가출 소녀들

처음엔 서먹서먹해 하다 연극을 하면서 서로 깊은 속내를 나눌 정도로 친하게 지내고 있는 범숙학교 아이들.

20명 남짓한 범숙학교 학생들.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를 한창 겪을 법한 14~18세 여자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잠시 악몽을 꾼 듯,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온 아이들은 모두 밝고 건강한 모습들이다. 몇달 전, 처음 이곳에 와서 서먹서먹해하던 아이들도 함께 연극을 하며 뒹구는 동안 안정을 되찾아 이제 자신의 아픈 과거쯤은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는 물음에도, 실명을 이야기해도 되겠냐는 물음에도 주저없이 “예”라고 시원시원하게 대답한다. 그러면서도 집과 엄마 이야기를 꺼낼라치면 왠지 모를 어색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우리는 여기가 좋아요, 평생 여기서 살 거예요”라며 먼저 선수를 치는 아이들. 여기가 왜 좋으냐는 물음에 “학교에서 짤리지 않으니까요” “선생님과 친구들이 나한테 관심을 가져주니까요” “내가 원하는 재즈댄스를 맘껏 배울 수 있으니까요”라는 답변이 여기저기서 봇물처럼 터져나온다.
열여섯살 성희. 첫눈에 보기에도 꽤나 자기 주장이 강하고 똑부러지는 성격일 것 같다. 집을 나와 혼자 힘으로 이곳을 찾아왔을 만큼 다부진 성희의 꿈은 백댄서. 그래서 수업시간 중에서도 재즈댄스 시간이 제일 좋다고. 검정고시를 통해 방송통신대에 입학할 꿈을 갖고 있는 연진이는 연극 ‘지영의 악몽’에서 냉혹한 엄마 역할을 맡아 열연했다. 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하는 딸을 보면서도 이를 외면한 채 오히려 자신의 딸을 무시하는 엄마. 비록 극중이지만 그런 엄마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 정말 많이 울고 힘들었다는 연진이다.
열일곱살 은혜. 키가 176cm나 된다. 모델을 해도 좋을 만큼 매력적인 은혜는 아닌 게 아니라 지난 겨울, 창원에 있는 모 대학 졸업작품전 때 모델로 나섰을 만큼 끼가 많다. 주변에서 오디션을 보라고 권하는 사람도 많지만 검정고시 준비가 먼저라며 고개를 숙이는 아이다. 잡지사 기자가 꿈이라는 서주. ‘경숙의 독백’에서 새엄마 역할을 맡았던 서주는 어렸을 때 가출한 엄마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연극을 하면서 무척 많이 울었다고 한다. ‘어딘가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으면 다행이겠지’ 하는 생각에 엄마를 잊어보려 애쓰지만 인연이 된다면 엄마가 멀리서나마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여성동아>를 봤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아직 푸릇푸릇한 생과일처럼 웃는 모습이 예쁜 범숙학교 아이들. 서로 말은 하지 않지만 감출 수 없는 불안감이 아이들의 모습에서 언뜻언뜻 묻어나온다. 언젠가는 든든한 등받이가 되어주던 이곳을 떠나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는 두려움과 불안감…. 정영화 교감선생님은 “아이들이 순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이곳에서 가출할 때가 가장 안타깝습니다. 홀로서기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안감에 휩싸이기보다 언제 어디서라도 자신들을 지켜주는 든든한 등불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한다.
범숙학교는 올해 크나큰 프로젝트를 하나 추진중이다. 그것은 바로 아이들이 안심하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정식 대안학교로서의 인가를 받는 일이다. 시스템만 제대로 갖추어진다면 아이들은 한 사회인으로서 그 누구보다 밝고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하는 조현순 관장. 그는 대안학교에 대한 정부의 정책적인 지원과 더불어 가출 소녀들의 이야기를 한낱 가십거리로 전락시키는 사회적 편견에 대해서도 따끔한 충고를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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