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편지를 써본 적이 있을 것이다. 기쁠 때, 슬플 때, 누군가 보고 싶을 때, 전하지 못한 말을 하고 싶을 때 빳빳한 종이 위에 펜을 들고 마음을 전한다.
상대방에게 편지 한 통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도 준비할 것도 많다. 편지지와 봉투, 펜, 장소 그리고 가장 중요한 시간까지. 누군가가 나에게 편지를 줬다는 건, 다른 해야 할 일을 제쳐놓고 오직 나를 위해 시간을 내어줬다는 의미다.
편지 가게 글월은 서울 연희동 오래된 건물 4층에 자리한 9.9㎡ 남짓의 단출한 공간이다. 햇빛이 잘 드는 커다란 창문 앞에는 아담한 테이블과 의자가 배치돼 있고, 테이블 위에는 화병과 펜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차분한 살구색 벽에 늘어선 원목 쇼케이스에는 각종 편지지와 엽서, 펜이 차곡차곡 정리돼 있다. 스피커에서는 글월만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대변하듯 잔잔하고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글월은 편지를 뜻하는 순우리말이자, 편지를 높여 부르는 단어다. 이곳에서는 나 또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 수도 있고, 편지지와 필기구 등을 구매할 수도 있다. 편지가 주는 의미 있고 즐거운 순간을 모두가 만끽할 수 있도록 돕는 공간인 셈이다.
글월의 중심에는 문주희 대표가 있다. 꾹꾹 눌러쓴 편지의 다정함과 오리지널을 고수하는 자부심 등을 차분하면서도 진지하게 언급하는 모습을 보며, 글월이 4년 넘게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와 트렌드에 휩쓸리지 않고 뚝심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편지와 문구류는 디지털 시대에 맞지 않는 낡고 감상적인 취미”라는 다소 불편한 말에도 문 대표는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로 인해 많은 사람이 편지와 멀어져가고 있지만, 손으로 마음을 전하는 편지의 진심을 믿어요”라며 맑게 웃었다. 이어 그는 “편지가 단지 과거의 추억이 아닌 동시대의 문화로 자리 잡기를 꿈꾼다”고 덧붙였다.
글월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원래 라이프스타일 매거진에서 에디터로 일했어요. 수많은 기획 기사 중 인터뷰 기사를 쓸 때가 가장 즐거웠죠. 어떤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다시 제 관점으로 정리해나가는 과정이 너무 재미있었거든요. 또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 타인에게 질문한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던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인터뷰이들이 부럽기도 했어요. 특별한 순간을 누군가가 감각적으로 정리해주는 거잖아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기록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마침 내가 그런 일을 하고 있으니 가볍게 시작해보면 어떨까 싶더라고요. 당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둬서 여유도 있으니 개인 프로젝트 정도로 진행해보자고 마음먹었죠. 주변 친구들을 시작으로 다양한 사람을 만나 카페나 집 등 그들이 편하게 여기는 공간에서 이야기를 들었는데, 하다 보니 커피나 차를 직접 내줄 수 있는 제 공간이 갖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장소를 찾기 시작했고, 지금의 글월이 탄생했죠.
글월은 레터링 서비스로 유명해요.
SNS나 현장에서 예약 신청을 받은 뒤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를 말해달라고 해요. 주제가 정해지면 질문 20개 정도로 구성된 질문지를 만듭니다. 예약 날짜에 손님이 오시면 가게 문을 닫고 질문지를 바탕으로 1시간 정도 인터뷰를 진행해요. 인터뷰가 끝나면 제가 녹취를 풀면서 편지 형식으로 정리한 뒤 편지 봉투에 넣고 우표를 붙여 원하는 곳으로 보내드려요. 사실 레터링 서비스는 공이 엄청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에요. 인터뷰는 1시간 진행하지만 제가 다시 정리하는 기간은 빠르면 3~4일, 길게는 일주일 넘게 걸리기도 하거든요. 이런 과정이 조금 버거워서 지금은 잠시 레터링 서비스를 중단했어요. 좀 더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방법을 갖춘 뒤 조만간 재개할 예정이고요.
디테일한 정보 없이 질문지를 만드는 건가요. 한계가 있을 것 같아요.
맞아요. 사전에 받는 정보는 이름, 나이, 주제 딱 3가지예요. 레터링 서비스를 진행하면서 항상 고민이었던 게, 디테일한 정보가 없으니 질문이 너무 가벼운 것 같다는 거였죠. 또 MC의 순발력 같은 것들도 필요하더라고요. 마치 유재석이 돼야 할 것 같았어요(하하). 당시 제가 20대 후반이었는데, 30~40대 손님들이 오셔서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해 이야기하면 이해 안 되는 부분도 있었고요. 통찰력이 부족했던 거죠. 그래서 이런 점들을 보완하고 좀 더 자신감이 생겼을 때 레터링 서비스를 다시 시작하려 해요.
왜 편지인가요. 다른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도 있을 텐데요.
글월은 작은 업체고 인터뷰이도 특별하지 않아요. 이야기가 당사자에게는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소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요. 매체로 운영되긴 어렵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어떤 인터뷰든 읽어줄 사람은 반드시 필요하잖아요. 많은 사람이 읽지 못한다면 이 이야기를 가장 궁금해할 사람을 위해 정리해보자, 생각했죠. 그 대상은 단연 ‘당사자’더라고요. 자신의 이야기가 종이 위에 어떻게 펼쳐질지, 어떤 형식으로 재가공되고 포장될지 가장 궁금할 것 같았거든요. 당사자를 위한 글로 이야기를 풀어야겠다고 마음먹고 노트북 앞에 앉았는데, 저도 모르게 “OO님 안녕하세요”라는 문장을 쓰고 있더라고요. ‘아 이건 편지잖아!’라는 생각이 들었죠. 종이를 통해서 특정 사람과 가장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는 방식이 편지였던 거예요.
평소 편지 쓰는 걸 좋아하나요.
사실 편지를 자주 쓰진 않습니다(웃음). 생일 등 특별한 날에만 쓰고 있어요. 편지라는 형식은 제 취향이 반영된 것이 아니라 당사자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한 최적의 선택지예요. 편지를 읽으면서 저와 함께했던 순간을 떠올리고, 글월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다시 한번 떠올렸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요.
아무리 평범한 인물이라도 무게감 있는 이야기를 하면 부담스럽게 느껴질 텐데요.
지인들이 많이 걱정했어요. 찾아오는 손님들이 아무리 평범해도 공감받고 싶은 큰 이벤트를 이야기하면 감당할 수 있겠냐고요. 우려되긴 했지만 좀 더 이상적으로 접근하려고 했어요. 손님의 하루를 잘 기록해주는 것으로 됐다, 이런 식으로 가볍게 생각하려 했죠. 만약 레터링 서비스를 단기 프로젝트로 생각했다면 힘들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인생의 한순간이 아닌, 각 시기마다의 이야기들을 대신 일기처럼 써주는 역할로 생각했기 때문에 좀 더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편지에 주인장의 소회가 담긴 글도 함께 전달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주로 어떤 내용인가요.
조언이나 충고는 절대 하지 않아요. “많이 힘드셨겠네요” “그 이야기를 들으니 저도 정말 기뻤어요”라고 공감 정도만 해주고 있어요. 저는 정신과전문의도 아니고 관련 학위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줄 수도 없고요. 또 ‘당신은 그런 사람이에요’라는 뉘앙스를 절대 풍기지 않으려고 해요. 기록자라는 포지션을 유지하며 코멘트를 달아주고 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손님이 있다면요.
40대 초반 딩크족 여성 손님이요. 지금 생각해도 너무 죄송해요. 그때 저는 20대 후반이었고 정말 바쁘게 살아가고 있었어요. 그분은 아주 평범한 일을 하고 있다고 했어요. 정시에 출퇴근하고, 저녁에는 남편과 TV를 보거나 가끔 야식을 먹고, 주말에는 근교에 놀러 가는 지극히 보편적인 삶을 살고 있었죠. 당시 저와 정반대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40대 여성의 삶이 잘 그려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질문을 많이 했고요. 특히 “삶이 무료하진 않으세요”와 같은 질문을 직접적으로 했는데 돌이켜보니 너무 죄송한 거예요. 무례하게 느꼈을 수도 있잖아요. 그분은 당시의 삶에 만족하며 즐겁다고 느낄 수 있는데 제 가치관에 따라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단정 지은 것 같아요.
그분을 지금 다시 인터뷰한다면 질문이 달라질까요.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아요. 하지만 좀 더 세련되게 돌려서 물어볼 수는 있겠죠. 또 사전 준비를 많이 할 것 같아요. 레터링 서비스를 할 때 정보를 많이 묻지 않는 건 당사자가 불편해할까 봐 그랬거든요. 하지만 이 경험을 통해 마음이 조금 바뀌었어요. 미리 그 사람의 환경이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알면 좀 더 밀도 높게 질문할 수 있고, 이야기를 더 잘 들어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펜팔 서비스도 진행하고 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그 펜팔 맞나요.
조금 달라요. 글월의 콘셉트를 편지로 잡고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편지 가게니까 펜팔도 있어?”라고 물어보더라고요. 친구들처럼 방문하는 사람들도 궁금해할 것 같았죠. 그래서 미니 서비스로 준비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당시 저는 펜팔을 해본 적이 없어서 정확한 방법을 몰랐어요. 그래서 ‘그냥 내 식대로 해석해보자’ 생각했죠. 이름은 펜팔이 맞아요. 사람과 사람이 연결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익명으로 진행해요. 편지에 정보를 공개하는 것이 조금 위험하다고 느끼거든요. 편지는 무조건 글월 안에서만 공유할 수 있고요. 예를 들어 기자님이 글월에 와서 편지 한 통을 쓰는 거예요. 그리고 그 편지를 편지함에 꽂아두고 다른 사람이 쓴 편지를 가지고 가죠. 편지 내용은 기자님과 편지를 쓴 사람만 알 수 있고요. 익명이지만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낼 수 있는 귀여운 장치들은 있어요. 편지 봉투에 여러 가지 성격을 의미하는 형용사를 나열해두었는데, 해당되는 부분에 체크하는 거죠. 날짜와 날씨를 적고 그림, 텍스트 등으로 사인도 남길 수 있게 해두었어요. 요즘은 사인 대신 MBTI를 적고 가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대표님도 펜팔 서비스에 참여한 적이 있나요.
있어요(웃음). 어떤 분이 글월에 오셔서 차분하게 편지를 쓰고 가셨는데, 그 내용이 너무 궁금한 거예요. 그래서 저도 편지를 써서 편지함에 꽂아둔 뒤 그분의 편지를 가져갔죠. 공개할 순 없지만 내용이 너무 좋아서 여운이 오랫동안 남았었어요.
서현진 배우님이 펜팔 서비스를 하고 가셨다고 들었어요.
성수점에 찾아오셔서 편지를 쓰고 편지함에 꽂아두고 가셨어요. 편지에 “저는 배우 서현진입니다”라고 남기셨다고 하더라고요. 그 편지를 가져가신 분이 답장하고 싶다고 찾아오셨는데, 저희도 알고 있는 정보가 없다고 말씀드리니 소속사로 편지를 보내겠다고 하고 돌아가셨어요. 김성철 배우, 이엘 배우는 연희점을 찾아 매장 구경을 하고 가시기도 했고요.
펜팔 서비스 반응은 어떤가요.
하루에 연희점, 성수점 매장 합쳐서 평균 15명 내외의 손님이 오시는 것 같아요. 4년 동안 6000명 정도가 펜팔 서비스를 이용하셨고요. 올해 2월에 반응이 가장 좋았어요. 약 800명 정도 찾아주셨거든요.
현재 펜팔 서비스만으로 매장 운영이 가능한가요.
펜팔 서비스는 1만 원에 진행하고 있어요. 레터링 서비스는 7만 원이었고요. 처음 시작할 때는 월세가 45만 원이어서 한 달에 레터링 서비스 10명 하는 것이 목표였어요. 70만 원이면 월세를 내고 나머지 돈으로 어느 정도 생활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모아둔 돈도 조금 있었고요. 하지만 현실은 다르더라고요. 레터링 서비스 10명을 하는 게 일단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고 전기세, 관리비 등 매장 유지비용도 만만치 않았죠. 그래서 시작한 것이 문구류예요. 편지지나 펜 등을 제가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해서 판매했죠. 생각보다 많은 분이 좋아해주시더라고요. 전체 매출의 6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요. 점점 주목받으면서 지금은 펜팔이나 레터링 서비스보다 편지 아이템을 판매하는 가게로 더 유명해졌어요.
문구류 디자인도 직접 한다고 했어요. 원래 감각이 있었나요.
전혀요. 문구류에 특별히 관심이 없었어요. 그래서 시행착오도 많았고요. 디자인이나 일러스트에 대해 전혀 모르니까 처음부터 배워야 했어요. 학원을 찾을 여유가 없어서 틈틈이 독학으로 마스터했죠. 종이와 인쇄소도 모두 발품 팔아 찾았고요. 생각해보면 과거에 잡다한 물건을 많이 사본 경험이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좋은 것과 안 좋은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긴 거죠. 퀄리티가 생각하는 수준에 도달하지 않으면 잠도 안 오더라고요. 거의 매일 밤을 새우면서 연구하고 공부했어요. 지금 판매하는 문구류 모두 말 그대로 저의 피, 땀, 눈물이 녹아 있는 것들이에요. 하나하나 각별하게 느껴집니다.
문구류는 아날로그 그 자체인데, 글월이 한순간의 유행으로 끝날까 봐 두렵진 않나요.
불안하지 않아요. 유행 전에 시작했거든요(웃음). 만약 글월을 연 목적이 돈이었다면 두려울 거예요. 하지만 순수하게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시작한 거고, 제가 만든 것들에 대한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불안하거나 두려운 마음은 없어요. 또 문구류나 편지가 지금의 트렌드가 된 것은 희소성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희소성을 높이 평가하고 소중히 다루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고요. 앞으로 이런 아날로그 무드의 아이템들이 더 사랑받지 않을까요. 개인적인 바람이기도 하고요.
글월은 앞으로도 문구류와 편지라는 콘텐츠에만 집중할 건가요.
라이프스타일 제품군의 확장을 기대하고 있어요. 향수를 만들고 조명을 판매한 것도 그 목적의 일환이고요. 테이블 위에 편지지를 놓고 의자에 앉아 편지를 쓰잖아요. 무드와 어울리는 음악이 흐르고요. 이 모든 게 글월의 것이길 꿈꿔요. 그 장면을 구현하기 위해 라이프스타일 제품 개발도 계획하고 있고요. 또 내년 초에는 ‘글월’을 모티프로 한 소설을 출간할 예정이에요. 요즘 유행하는 소설 ‘불편한 편의점’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과 비슷한 부류로 보시면 될 것 같아요.
글월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됐으면 하나요.
이 세상에는 따뜻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수단이 참 많죠. 그중 하나가 편지였으면 좋겠어요. 그렇다고 “편지를 많이 써야 해요”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편지는 1년에 한 번만 써도 충분하거든요. 대신 편지를 쓰고 싶을 때 “글월은 요즘 뭐 하나?”라면서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또 최근 “일본은 개인의 감성, 우리나라는 잘나가는 것을 중요시하는 시대를 보내는 것 같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어요. 글월은 잘나가는 것보다는 개인의 감성을 중요시하는 브랜드로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글월 #편지 #레터링 #여성동아
사진 홍태식
상대방에게 편지 한 통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도 준비할 것도 많다. 편지지와 봉투, 펜, 장소 그리고 가장 중요한 시간까지. 누군가가 나에게 편지를 줬다는 건, 다른 해야 할 일을 제쳐놓고 오직 나를 위해 시간을 내어줬다는 의미다.
편지 가게 글월은 서울 연희동 오래된 건물 4층에 자리한 9.9㎡ 남짓의 단출한 공간이다. 햇빛이 잘 드는 커다란 창문 앞에는 아담한 테이블과 의자가 배치돼 있고, 테이블 위에는 화병과 펜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차분한 살구색 벽에 늘어선 원목 쇼케이스에는 각종 편지지와 엽서, 펜이 차곡차곡 정리돼 있다. 스피커에서는 글월만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대변하듯 잔잔하고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글월은 편지를 뜻하는 순우리말이자, 편지를 높여 부르는 단어다. 이곳에서는 나 또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 수도 있고, 편지지와 필기구 등을 구매할 수도 있다. 편지가 주는 의미 있고 즐거운 순간을 모두가 만끽할 수 있도록 돕는 공간인 셈이다.
글월의 중심에는 문주희 대표가 있다. 꾹꾹 눌러쓴 편지의 다정함과 오리지널을 고수하는 자부심 등을 차분하면서도 진지하게 언급하는 모습을 보며, 글월이 4년 넘게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와 트렌드에 휩쓸리지 않고 뚝심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편지와 문구류는 디지털 시대에 맞지 않는 낡고 감상적인 취미”라는 다소 불편한 말에도 문 대표는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로 인해 많은 사람이 편지와 멀어져가고 있지만, 손으로 마음을 전하는 편지의 진심을 믿어요”라며 맑게 웃었다. 이어 그는 “편지가 단지 과거의 추억이 아닌 동시대의 문화로 자리 잡기를 꿈꾼다”고 덧붙였다.
누군가에게 익명으로 편지를 쓰고 다른 사람의 편지를 가져갈 수 있는 글월의 펜팔 서비스.
원래 라이프스타일 매거진에서 에디터로 일했어요. 수많은 기획 기사 중 인터뷰 기사를 쓸 때가 가장 즐거웠죠. 어떤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다시 제 관점으로 정리해나가는 과정이 너무 재미있었거든요. 또 호기심이 많은 편이라 타인에게 질문한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던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인터뷰이들이 부럽기도 했어요. 특별한 순간을 누군가가 감각적으로 정리해주는 거잖아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기록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마침 내가 그런 일을 하고 있으니 가볍게 시작해보면 어떨까 싶더라고요. 당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둬서 여유도 있으니 개인 프로젝트 정도로 진행해보자고 마음먹었죠. 주변 친구들을 시작으로 다양한 사람을 만나 카페나 집 등 그들이 편하게 여기는 공간에서 이야기를 들었는데, 하다 보니 커피나 차를 직접 내줄 수 있는 제 공간이 갖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장소를 찾기 시작했고, 지금의 글월이 탄생했죠.
글월은 레터링 서비스로 유명해요.
SNS나 현장에서 예약 신청을 받은 뒤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를 말해달라고 해요. 주제가 정해지면 질문 20개 정도로 구성된 질문지를 만듭니다. 예약 날짜에 손님이 오시면 가게 문을 닫고 질문지를 바탕으로 1시간 정도 인터뷰를 진행해요. 인터뷰가 끝나면 제가 녹취를 풀면서 편지 형식으로 정리한 뒤 편지 봉투에 넣고 우표를 붙여 원하는 곳으로 보내드려요. 사실 레터링 서비스는 공이 엄청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에요. 인터뷰는 1시간 진행하지만 제가 다시 정리하는 기간은 빠르면 3~4일, 길게는 일주일 넘게 걸리기도 하거든요. 이런 과정이 조금 버거워서 지금은 잠시 레터링 서비스를 중단했어요. 좀 더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방법을 갖춘 뒤 조만간 재개할 예정이고요.
디테일한 정보 없이 질문지를 만드는 건가요. 한계가 있을 것 같아요.
맞아요. 사전에 받는 정보는 이름, 나이, 주제 딱 3가지예요. 레터링 서비스를 진행하면서 항상 고민이었던 게, 디테일한 정보가 없으니 질문이 너무 가벼운 것 같다는 거였죠. 또 MC의 순발력 같은 것들도 필요하더라고요. 마치 유재석이 돼야 할 것 같았어요(하하). 당시 제가 20대 후반이었는데, 30~40대 손님들이 오셔서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해 이야기하면 이해 안 되는 부분도 있었고요. 통찰력이 부족했던 거죠. 그래서 이런 점들을 보완하고 좀 더 자신감이 생겼을 때 레터링 서비스를 다시 시작하려 해요.
왜 편지인가요. 다른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도 있을 텐데요.
글월은 작은 업체고 인터뷰이도 특별하지 않아요. 이야기가 당사자에게는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소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요. 매체로 운영되긴 어렵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어떤 인터뷰든 읽어줄 사람은 반드시 필요하잖아요. 많은 사람이 읽지 못한다면 이 이야기를 가장 궁금해할 사람을 위해 정리해보자, 생각했죠. 그 대상은 단연 ‘당사자’더라고요. 자신의 이야기가 종이 위에 어떻게 펼쳐질지, 어떤 형식으로 재가공되고 포장될지 가장 궁금할 것 같았거든요. 당사자를 위한 글로 이야기를 풀어야겠다고 마음먹고 노트북 앞에 앉았는데, 저도 모르게 “OO님 안녕하세요”라는 문장을 쓰고 있더라고요. ‘아 이건 편지잖아!’라는 생각이 들었죠. 종이를 통해서 특정 사람과 가장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는 방식이 편지였던 거예요.
평소 편지 쓰는 걸 좋아하나요.
사실 편지를 자주 쓰진 않습니다(웃음). 생일 등 특별한 날에만 쓰고 있어요. 편지라는 형식은 제 취향이 반영된 것이 아니라 당사자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한 최적의 선택지예요. 편지를 읽으면서 저와 함께했던 순간을 떠올리고, 글월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다시 한번 떠올렸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요.
아무리 평범한 인물이라도 무게감 있는 이야기를 하면 부담스럽게 느껴질 텐데요.
지인들이 많이 걱정했어요. 찾아오는 손님들이 아무리 평범해도 공감받고 싶은 큰 이벤트를 이야기하면 감당할 수 있겠냐고요. 우려되긴 했지만 좀 더 이상적으로 접근하려고 했어요. 손님의 하루를 잘 기록해주는 것으로 됐다, 이런 식으로 가볍게 생각하려 했죠. 만약 레터링 서비스를 단기 프로젝트로 생각했다면 힘들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인생의 한순간이 아닌, 각 시기마다의 이야기들을 대신 일기처럼 써주는 역할로 생각했기 때문에 좀 더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종이에 꾹꾹 눌러 담아 전하는 진심
편지지, 엽서, 펜 등 글월의 오리지널리티가 담긴 문구류.
조언이나 충고는 절대 하지 않아요. “많이 힘드셨겠네요” “그 이야기를 들으니 저도 정말 기뻤어요”라고 공감 정도만 해주고 있어요. 저는 정신과전문의도 아니고 관련 학위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줄 수도 없고요. 또 ‘당신은 그런 사람이에요’라는 뉘앙스를 절대 풍기지 않으려고 해요. 기록자라는 포지션을 유지하며 코멘트를 달아주고 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손님이 있다면요.
40대 초반 딩크족 여성 손님이요. 지금 생각해도 너무 죄송해요. 그때 저는 20대 후반이었고 정말 바쁘게 살아가고 있었어요. 그분은 아주 평범한 일을 하고 있다고 했어요. 정시에 출퇴근하고, 저녁에는 남편과 TV를 보거나 가끔 야식을 먹고, 주말에는 근교에 놀러 가는 지극히 보편적인 삶을 살고 있었죠. 당시 저와 정반대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40대 여성의 삶이 잘 그려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질문을 많이 했고요. 특히 “삶이 무료하진 않으세요”와 같은 질문을 직접적으로 했는데 돌이켜보니 너무 죄송한 거예요. 무례하게 느꼈을 수도 있잖아요. 그분은 당시의 삶에 만족하며 즐겁다고 느낄 수 있는데 제 가치관에 따라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단정 지은 것 같아요.
그분을 지금 다시 인터뷰한다면 질문이 달라질까요.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아요. 하지만 좀 더 세련되게 돌려서 물어볼 수는 있겠죠. 또 사전 준비를 많이 할 것 같아요. 레터링 서비스를 할 때 정보를 많이 묻지 않는 건 당사자가 불편해할까 봐 그랬거든요. 하지만 이 경험을 통해 마음이 조금 바뀌었어요. 미리 그 사람의 환경이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알면 좀 더 밀도 높게 질문할 수 있고, 이야기를 더 잘 들어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펜팔 서비스도 진행하고 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그 펜팔 맞나요.
조금 달라요. 글월의 콘셉트를 편지로 잡고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편지 가게니까 펜팔도 있어?”라고 물어보더라고요. 친구들처럼 방문하는 사람들도 궁금해할 것 같았죠. 그래서 미니 서비스로 준비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당시 저는 펜팔을 해본 적이 없어서 정확한 방법을 몰랐어요. 그래서 ‘그냥 내 식대로 해석해보자’ 생각했죠. 이름은 펜팔이 맞아요. 사람과 사람이 연결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익명으로 진행해요. 편지에 정보를 공개하는 것이 조금 위험하다고 느끼거든요. 편지는 무조건 글월 안에서만 공유할 수 있고요. 예를 들어 기자님이 글월에 와서 편지 한 통을 쓰는 거예요. 그리고 그 편지를 편지함에 꽂아두고 다른 사람이 쓴 편지를 가지고 가죠. 편지 내용은 기자님과 편지를 쓴 사람만 알 수 있고요. 익명이지만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낼 수 있는 귀여운 장치들은 있어요. 편지 봉투에 여러 가지 성격을 의미하는 형용사를 나열해두었는데, 해당되는 부분에 체크하는 거죠. 날짜와 날씨를 적고 그림, 텍스트 등으로 사인도 남길 수 있게 해두었어요. 요즘은 사인 대신 MBTI를 적고 가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대표님도 펜팔 서비스에 참여한 적이 있나요.
있어요(웃음). 어떤 분이 글월에 오셔서 차분하게 편지를 쓰고 가셨는데, 그 내용이 너무 궁금한 거예요. 그래서 저도 편지를 써서 편지함에 꽂아둔 뒤 그분의 편지를 가져갔죠. 공개할 순 없지만 내용이 너무 좋아서 여운이 오랫동안 남았었어요.
서현진 배우님이 펜팔 서비스를 하고 가셨다고 들었어요.
성수점에 찾아오셔서 편지를 쓰고 편지함에 꽂아두고 가셨어요. 편지에 “저는 배우 서현진입니다”라고 남기셨다고 하더라고요. 그 편지를 가져가신 분이 답장하고 싶다고 찾아오셨는데, 저희도 알고 있는 정보가 없다고 말씀드리니 소속사로 편지를 보내겠다고 하고 돌아가셨어요. 김성철 배우, 이엘 배우는 연희점을 찾아 매장 구경을 하고 가시기도 했고요.
펜팔 서비스 반응은 어떤가요.
하루에 연희점, 성수점 매장 합쳐서 평균 15명 내외의 손님이 오시는 것 같아요. 4년 동안 6000명 정도가 펜팔 서비스를 이용하셨고요. 올해 2월에 반응이 가장 좋았어요. 약 800명 정도 찾아주셨거든요.
현재 펜팔 서비스만으로 매장 운영이 가능한가요.
펜팔 서비스는 1만 원에 진행하고 있어요. 레터링 서비스는 7만 원이었고요. 처음 시작할 때는 월세가 45만 원이어서 한 달에 레터링 서비스 10명 하는 것이 목표였어요. 70만 원이면 월세를 내고 나머지 돈으로 어느 정도 생활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모아둔 돈도 조금 있었고요. 하지만 현실은 다르더라고요. 레터링 서비스 10명을 하는 게 일단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고 전기세, 관리비 등 매장 유지비용도 만만치 않았죠. 그래서 시작한 것이 문구류예요. 편지지나 펜 등을 제가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해서 판매했죠. 생각보다 많은 분이 좋아해주시더라고요. 전체 매출의 6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요. 점점 주목받으면서 지금은 펜팔이나 레터링 서비스보다 편지 아이템을 판매하는 가게로 더 유명해졌어요.
문구류 디자인도 직접 한다고 했어요. 원래 감각이 있었나요.
전혀요. 문구류에 특별히 관심이 없었어요. 그래서 시행착오도 많았고요. 디자인이나 일러스트에 대해 전혀 모르니까 처음부터 배워야 했어요. 학원을 찾을 여유가 없어서 틈틈이 독학으로 마스터했죠. 종이와 인쇄소도 모두 발품 팔아 찾았고요. 생각해보면 과거에 잡다한 물건을 많이 사본 경험이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좋은 것과 안 좋은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긴 거죠. 퀄리티가 생각하는 수준에 도달하지 않으면 잠도 안 오더라고요. 거의 매일 밤을 새우면서 연구하고 공부했어요. 지금 판매하는 문구류 모두 말 그대로 저의 피, 땀, 눈물이 녹아 있는 것들이에요. 하나하나 각별하게 느껴집니다.
문구류는 아날로그 그 자체인데, 글월이 한순간의 유행으로 끝날까 봐 두렵진 않나요.
불안하지 않아요. 유행 전에 시작했거든요(웃음). 만약 글월을 연 목적이 돈이었다면 두려울 거예요. 하지만 순수하게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시작한 거고, 제가 만든 것들에 대한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불안하거나 두려운 마음은 없어요. 또 문구류나 편지가 지금의 트렌드가 된 것은 희소성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희소성을 높이 평가하고 소중히 다루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고요. 앞으로 이런 아날로그 무드의 아이템들이 더 사랑받지 않을까요. 개인적인 바람이기도 하고요.
글월은 앞으로도 문구류와 편지라는 콘텐츠에만 집중할 건가요.
라이프스타일 제품군의 확장을 기대하고 있어요. 향수를 만들고 조명을 판매한 것도 그 목적의 일환이고요. 테이블 위에 편지지를 놓고 의자에 앉아 편지를 쓰잖아요. 무드와 어울리는 음악이 흐르고요. 이 모든 게 글월의 것이길 꿈꿔요. 그 장면을 구현하기 위해 라이프스타일 제품 개발도 계획하고 있고요. 또 내년 초에는 ‘글월’을 모티프로 한 소설을 출간할 예정이에요. 요즘 유행하는 소설 ‘불편한 편의점’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과 비슷한 부류로 보시면 될 것 같아요.
글월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됐으면 하나요.
이 세상에는 따뜻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수단이 참 많죠. 그중 하나가 편지였으면 좋겠어요. 그렇다고 “편지를 많이 써야 해요”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편지는 1년에 한 번만 써도 충분하거든요. 대신 편지를 쓰고 싶을 때 “글월은 요즘 뭐 하나?”라면서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또 최근 “일본은 개인의 감성, 우리나라는 잘나가는 것을 중요시하는 시대를 보내는 것 같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어요. 글월은 잘나가는 것보다는 개인의 감성을 중요시하는 브랜드로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글월 #편지 #레터링 #여성동아
사진 홍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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