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풍경 속에서 발생하는 관계와 감정, 기억의 단면을 기하학적 추상 언어로 표현했다. ‘Stop Hate Start Love’, 162.2X130.3cm, 2023.
개체들은 화면을 압도하는 큰 면 위에 아주 작게 그려져 있다. 이를 발견하면 그림을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고 대체 이게 뭔지 묻게 된다. 거부할 수 없는 궁금증이 솟구치는 것이다.
김보민 작가는 보는 이가 궁금해하며 스스로 의미를 추측하고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린다. “그림에 정답은 없어요. 작품을 통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해답을 각자의 삶과 감정 속에서 찾길 바라는 마음이죠.” ‘비워지면 차오르고, 다시 비워내는 끝없이’ ‘불필요한 그리움’ 등 제목 역시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관객들에게 열린 해석의 여지를 주기 위함이다.
지난달에는 ‘납작한 풍경’이라는 주제로 개체를 모두 배제한, 오직 선과 면으로만 이뤄진 추상화 전시를 진행했다. 그동안은 캔버스에 무언가를 채워 넣는 것에 집중했다면 이번 전시는 비워낸 텅 빈 공간이 주는 몰입감과 차분함을 공유하고 싶었다고.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며 탄탄한 포트폴리오를 쌓고 있는 김보민 작가를 만나 작품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작업 진행 중인 미완성 작품들. 실재와 허구가 혼재된 풍경을 그리고 있다.
원래 꿈은 메이크업 아티스트였어요. 관련 분야를 체계적으로 배우고자 미용학과에 입학했고 학교생활을 열심히 했죠. 졸업 후 좀 더 현실적인 조언을 듣고자 메이크업 전문가들이 낸 책을 구입해 학력 부분을 읽어보는데 대부분이 서양화, 회화 등 색과 관련된 미술대학 출신인 거예요. 너무 깜짝 놀랐어요. 당시에는 테크닉과 현장 경험에만 집중했지 컬러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했거든요. 가장 중요한 걸 놓칠 뻔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죠. ‘이들처럼 되려면 미술학과에 가서 색 공부를 깊이 있게 해야겠구나’ 하는 마음에 미술학원에 등록해 다시 입시 준비를 했어요. 그리고 2009년 숙명여대 서양화과에 3학년으로 편입했습니다.
미술을 본업으로 삼은 결정적 계기가 있다면요.
“미술을 계속해도 될 것 같다”는 교수님의 말씀에 확신을 가졌어요. 항상 누군가가 내 작업에 대해 객관적으로 이야기해줬으면 했거든요. 평생 그림을 그리면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현실은 냉혹하잖아요. 교수님의 한마디에 그동안의 의심과 불안감이 사르르 녹아내렸죠. 좀 더 전문적인 교육을 받기 위해 2013년에 홍익대학교 대학원 회화과에 입학했고요.
되돌릴 수 없는 시간과 순간에 대한 마음을 표현했다. ‘시간과 순간’, 53X45.5cm, 2022.
하얀 캔버스 위에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색을 골라 붓질하는 작업 자체가 너무 재미있었어요. 메이크업은 이미 완성된 누군가의 얼굴에 색을 채워 넣는 과정이라면 그림은 새하얀 눈밭 위에 선과 면, 색을 더해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는 작업이니까요. 특히 머릿속에 모호하게 있는 장면이나 생각, 느낌을 그림으로 재현해낸다는 것이 흥미로웠죠. 힘들기도 했지만 즐거움이 더 컸던 것 같아요.
대부분의 작품은 반듯한 면 위에 사람, 동물, 식물 등을 디테일하게 묘사했어요.
불변과 가변이 모두 존재하는 이질감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반듯한 면은 공간을 의미해요. 비현실적이면서 고정적인, 영원함을 표현하죠. 반면 그림 속 개체들은 유동적이고 생명력 있게 표현하기 위해 좀 더 디테일하게 그립니다. 스스로 느낀 애정도에 따라 다양한 크기로 여기저기 흩어서 배치하고요.
표현법도 다른 것 같아요.
각각 다른 물감을 사용하거든요. 면은 매트한 아크릴물감으로 명암도 넣지 않고 단조롭게 표현해요. 개체들은 살아 있는 느낌을 주기 위해 광택 나는 유화물감을 사용합니다. 마르는 데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생동감 있고, 사실적인 묘사를 위해서는 가장 좋은 재료죠.
의지와 상관없이 떠오르는 기억들이 혼재된 생경한 풍경. ‘눈 뜨면 잊는 꿈’, 91X116.8cm, 2022(왼쪽).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꿈꾸며 오늘을 견디는 이들에게 보내는 희망의 메시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꿈꾸는 이들에게’, 80.3X116.8cm, 2022.
면을 크게 그리는 이유는 무한한 가능성을 표현하기 위해서예요. 사방으로 크게 이어지는 면을 통해 관객들이 캔버스 밖의 또 다른 공간을 상상해보길 바라거든요. 반면에 개체들은 멀리서 잘 안 보일 정도로 작게 그립니다. 보통 사물이든 사람이든 크기가 작으면 가까이서 자세히 보게 되잖아요. 같은 맥락이에요. 관객이 작품 속 개체들을 좀 더 세밀하게 관찰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일부러 작게 표현하고 있어요.
꾸준히 다루는 주제는 무엇인가요.
관계와 감정, 기억이요. 여러 형태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감정과 기억들을 다루고 있어요. 작업 초반에는 사람 관계에 집중했었어요. 좋았던 사이도 언젠가는 사라지고, 상대방과 내가 생각하는 애정도가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그럴 때마다 너무 슬프고 허무하더라고요. 이런 감정과 기억을 작품으로 남겨놓고 싶었죠. 작업하다 보니 ‘관계’라는 것이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사물, 동물, 식물, 공간 등도 비슷한 관계였죠. 애착했던 사물도 새로운 것이 나타나면 금세 마음이 식고, 평소 관심 없었던 공간도 어떻게 꾸미느냐에 따라 애정도가 변하는 것처럼요. ‘관계’로 묶을 수 있는 개체와 그로 인해 느낄 수 있는 감정과 기억은 생각보다 풍부하고 흥미로워요.
작품 속 사람, 동물들은 얼굴을 숨기고 있어요. 의도한 건가요.
맞아요. 개체들은 거의 뒤돌아보고 있어요. 옆모습이어도 얼굴은 알아볼 수 없죠. 관객의 심리나 경험, 순간의 감정에 따라 앞모습이 바뀌었으면 하거든요. 지난해 열었던 ‘낯선 나’ 전시회에서 난간에 걸터앉은 남자의 뒷모습을 그린 ‘시간과 순간’이라는 작품을 보고 한 남자분은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고 불안해 보인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옆에 서 있던 여자분은 멀리 내다보는 것 같아 시원하고 마음이 평온해지는 듯하다고 하시고요. 같은 그림이지만 각자의 심리나 상황에 따라 상반된 감상 평이 나온 거죠. 만약 얼굴이 노출됐다면 표정이나 분위기를 보고 비슷한 대답을 하지 않았을까요. 제 작품 속 개체들은 어떤 감정을 가진 정확한 누군가가 아니었으면 해요. 그러기 위해 얼굴을 감춘 거고요. 관객들의 감정 투영 대상이 됐으면 좋겠어요.
관객의 심리와 감정에 따라 달라지는 작품 세계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개체에 대한 감정과 기억을 담은 작품들. ‘썼다 지운 말들’, 72.7X 90.9cm, 2022(왼쪽). ‘눈 뜨면 잊는 꿈’, 91X116.8cm, 2022.
작품을 구성하는 사람, 동물, 식물 등은 각각 다른 시공간에서 온 것이에요.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한 공간에 반팔 옷을 입은 사람과 털옷을 입은 강아지가 존재해요. 계절과 시간, 장소를 배제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 거죠. 굳이 공통점이 있는 개체들을 모아 공간을 채우고 싶지 않았어요. 개체들은 각각 하나의 섬이나 마찬가지거든요. 하나의 섬 안에 있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와 감정이 오가죠. 그것만으로도 벅차기 때문에 다른 무언가와 교류를 맺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실제 존재하는 사람을 그리나요.
버스를 기다리거나, 걷고 있거나, 핸드폰을 보는 등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놔요. 작품을 구상할 때 사진을 꺼내 주제와 어울릴 만한 것을 선택한 뒤 가위로 오려 캔버스 위에 올려놓아요. 생각했던 구도가 나올 때까지 사진을 여기저기 옮겨가며 자리를 정합니다. 가끔 주위에서 작품에 참고하라며 뒷모습 사진을 보내주기도 해요. SNS에 뒷모습 찍은 사진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고요.
제목이 마치 한 편의 시 같아요.
제목은 작업할 때 가장 공들이는 부분입니다. 그림 그리면서 했던 생각이나 고민, 짬짬이 읽은 시집에서 영감받은 글귀를 메모장에 기록해놓아요. 작업을 모두 끝낸 뒤 메모장을 펼치고 제목을 짓죠. 제목에는 작품을 하면서 느꼈던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어요. 하지만 그 감정을 명확하게 한 단어나 문장으로 표현하긴 어려워요. 또 제목이 간결하고 정확하면 관객이 그 감정에만 갇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함축적이고 모호한 제목을 통해 작품 속 의미를 유추하고, 자신의 감정과 연결해 그림을 재해석해보길 바라요.
작가들마다 자기만의 강박을 안고 살아가더라고요.
저는 컬러가 지저분하게 삐져나오는 걸 못 봐요. 살짝 흐트러지면 러프한 매력이 있겠죠. 개인적으로는 그런 그림을 좋아해요. 평소 하지 못하는 표현법이기 때문에 보고 있으면 스트레스가 풀리고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거든요. 하지만 제 작품에선 허용 못 해요. 질서 있는 것, 줄 세워놓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 작업할 때도 묻어나오는 것 같아요.
컬러 조합이 너무 예뻐요. 각각의 색마다 의미가 있나요.
컬러마다 의미를 부여하는 작가들도 있는데 저는 그렇지 않아요. 작업할 때의 감정이나 생각 등에 따라 색을 다르게 선택하거든요. 트렌드나 관객들의 성향도 신경 써야 하지만 모두를 만족시킬 순 없어요. 그럴 바엔 온전히 내 감각이 반영된, 내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들자 생각하거든요. 이런 마음가짐 때문에 작업하면서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 같고요.
책 표지 작업도 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지나요.
책을 위해 따로 그림을 그리진 않았어요. 출판사에서 완성 작품 중 책과 어울릴 것 같은 그림을 발견하면 연락을 줘요. 마음이 맞으면 작품이 표지로 선정되는 거고요. 원본 그대로 사용하진 않고 판형에 따라 후가공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작업료 대신 이미지 사용료를 받고요.
작품을 통해 관객들이 무엇을 얻었으면 하나요.
다정한 시선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개체를 작게 그리는 이유는 가까이서 봤으면 하는 마음도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봄으로써 주변에 섬세하고 소중한 것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거든요. 작품 속 개체를 대하는 시선처럼 실제 사람이나 사물 등도 자세히, 다정하게 바라본다면 삶이 더욱 따뜻하고 즐겁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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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홍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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