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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병자호란’으로 맞대결 한명기·유하령 부부

글·진혜린 | 사진·조영철 기자

2014. 02. 14

역사학자는 사료를 해석해 사실을 복원해낸다. 그 과정에서 가슴 찢기는 역사적 현실에 맞닥뜨리더라도 냉정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역사학자 남편이 역사서에 미처 옮기지 못한 처연한 사실을 소설가 아내가 가슴으로 풀어썼다.

‘병자호란’으로 맞대결 한명기·유하령 부부
부부가 같은 날, 같은 주제로, 다른 책을 냈다. 역사학자 남편은 ‘역사평설 병자호란(이하 ‘병자호란’)’을, 소설가 아내는 ‘화냥년-역사소설 병자호란(이하 ‘화냥년’)’을 썼다. 지난해 10월 출간한 ‘병자호란’은 지금까지 5쇄, ‘화냥년’은 3쇄까지 찍었다. 꽁꽁 언 출판 시장에서, 더욱이 외면받아왔던 분야로서는 괄목할 만한 성과다. 이는 부부가 합심해 말하고자 했던 이야기에 독자가 응답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머리로 쓰는 남편, 마음으로 담은 아내

남편 한명기(52) 명지대 사학과 교수는 유난히도 전쟁에 관심이 많은 역사학자다. 지금까지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에 대한 서적을 쏟아내고도 또 전쟁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 교수는 전쟁은 그 사회가 본래 가진 민낯을 바로 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 연구의 소재라고 했다. 아내 유하령(52)은 잡지사 편집자 출신으로 독립 영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던 작가다. 두 사람의 공통 관심사는 가정사 빼고 ‘글’밖에 없다. 두 사람의 시작도 그랬다. 남편의 학문적 글쓰기의 첫 독자는 언제나 아내였다. 그렇게 30여 년이 지난 지금, 아내는 반 역사학자가 됐나 보다. 아무리 글쟁이라 해도 관심 밖이면 ‘그놈의 전쟁 이야기, 그만 좀 해라’ 할 법한데, 아내는 남편의 학문적 주제 중 ‘포로’ 문제를 뚝 떼어 소설책을 냈다.

“전쟁에서 포로 문제는 비극으로 점철된 이야기죠. 한 개인의 삶으로 봤을 때, 얼마나 애달픈 이야기예요. 그런 점에서 역사서를 통해 역사적인 사실을 나열하는 데 그치기엔 아쉬운 부분이기도 했어요. 실증적인 제시도 중요하지만 소설적 차원에서 작가의 상상력을 동원해 당시의 삶과 아픔을 적나라하게 전하며 역사의식을 알릴 수 있는 좋은 소설적 소재라고 생각했죠.”(한명기)

소재를 건넨 건 남편 쪽이었지만 아내 또한 남편 어깨너머로 바라본 역사적 현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결혼 전부터 남편이 논문을 쓸 때마다 저는 문장이 매끄러운지, 너무 어렵게 서술되지 않았는지를 살펴봤죠. 늘 자신이 어떤 공부를 하는지 자세하게 말해줘서 계속 관심을 갖고 있었어요. 또 남편이 사다 놓은 수많은 책들을 재활용 차원에서 읽다 보니까 저 나름의 관점과 해석 방향도 생겼고요. 무턱대고 소설만 쓰겠다고 시작했다면 어려웠을 것 같아요.”(유하령)

아내가 병자호란(1636. 12~1637. 1) 포로 문제로 소설을 쓰기 시작하자 남편은 여느 인터넷 검색 사이트는 흉내도 못 낼 훌륭한 자료 검색기가 돼주었다. 검색어를 입력하면 역사적 자료와 근거들을 제시한 소설 속 배경을 탄생시켰다.

유하령 작가의 ‘화냥년’은 병자호란 당시 청에 끌려간 두 남녀 포로의 역경과 아픔을 통해 전쟁의 비통함과 유약한 나라의 국민이 겪는 수모를 묘사한 역사소설이다. 지금껏 여성 문제를 소재로 작품 활동을 해왔던 저자의 시선은 심양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성 포로들이 ‘환향녀’가 아닌 ‘화냥년’으로 불렸던 역사적 사실에 머문다. 그동안 ‘환향녀’가 ‘화냥년’으로 점차 왜곡돼 사용된 줄 알았는데, 실은 그게 아니라고 한다.

“‘환향녀’는 역사학자들이 만들어낸 말이라고 보는 편이 맞아요. 역사서에는 병자호란 때 청으로 끌려간 여성 포로들이 절개를 잃었다는 의미로 화냥년이라고 손가락질받았다고 기록돼 있어요. 그런데 1950년 즈음 역사학자와 문학가들이 ‘화냥년’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용어 대신 ‘환향녀’라는 긍정적 용어로 쓰기 시작했죠. 하지만 표현을 바꾼다고 해서 그들이 겪은 고초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나라의 잘못으로 포로가 된 비운의 여성들을 ‘화냥년’이라고 불렀던 그 불편한 진실을 대면하면서 다시는 그러한 역사적 아픔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메시지를 제목에, 다소 자극적으로 담았어요.”(유하령)

국민의 깨어있는 역사의식이 국가의 파멸 막아

기자에게 유하령 작가가 쓴, 힘없는 나라가 버린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는 쉬 책장이 넘어가며 현실과 과거를 넘나드는 애절함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고백하자면 인조반정을 시작으로 병자호란 이후의 후폭풍까지 다룬, 수백 명은 족히 넘는 인물이 등장하며 쫀쫀하게 역사적 사실을 묘사한 ‘병자호란’은 머릿속을 어지럽히며 제자리걸음만 반복하게 했다. 한명기 교수가 누차 강조했던 “병자호란의 정세는 지금 대한민국의 국내외적 상황과 흡사하다”는 말 때문에 더욱 그랬다.

“명과 청 사이에서 조선은 전쟁의 의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명이 기울고 청이 득세하면서 그 사이에 끼어 있던 조선은 ‘어~’하는 사이에 속절없이 작살나고 임금과 백성 모두가 치욕을 겪죠.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사이에 낀 나라’예요. 지금 정치적으로는 미국, 경제적으로는 중국과 얽혀 있어요. 두 나라 없이는 살 수가 없죠. 지금 언제 두 나라의 패권이 교체될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에요. 우리나라는 여전히 그 나라들 사이에 끼어 있는 약소국에 불과하고요.”(한명기)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하나의 의문을 그제야 던졌다.

“약소국인 입장에서 전략적일 필요가 있어요. 원론적 이야기지만 나라의 분열이 가장 큰 문제거든요. 병자호란이 발발하기 전에 청이냐 명이냐를 놓고 분열이 일어났죠. 하지만 청이 쳐들어오면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던 총사령관은 변방에 숨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어요. 당할 걸 뻔히 알면서도 안이했던 정치인들은 막상 전쟁이 터지니 자신의 말을 책임지지 못했죠. 그만큼 정치인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의 일에 임해야 하는 것이며, 한 사람의 의견으로 국운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결국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인들의 소명과 책임 의식을 이끌어야 하는 것은 국민이거든요. 그만큼 깨어 있어야 하고, 그 깨어 있는 의식이 바로 역사의식인 거죠. 분열된 사회를 치유하고 혹시 모를 위기에 전략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힘을 키워야겠죠.”(한명기)

지루하게만 생각했던 역사의 한 단면이 현실세계로 타임 슬립한 기분이 들 만큼 역사학자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두 사람의 시선은 과거에 머물고 있지만 분명 현재와 미래를 말하고 있기에. 이들 부부의 일상도 이러할까?

“하하. 일반 아파트에 살면서 대학생 남매를 키우는 평범한 부부예요. 물론 사료 이야기도 많이 하지만 동갑이라 남편의 이야기를 무조건 들어주거나 하지는 않아요(웃음). 동등한 입장에서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어서 좋아요.”(유하령)

한 교수는 다음 책은 ‘임진왜란’이 될 것 같다고 했고, 유 작가는 역사 에세이에 소설이 가미된, 이른바 장르 파괴적 작품을 써보고 싶다고 했다. 과거에 시선을 놓고 현재와 미래를 말하는 두 사람의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장소협찬·미담(070-4384-2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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