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오래 살았다고 하면, 막연하게 한국이 좋아서 살고 있다고 생각할 테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외국에서 오래 살아본 사람이라면 그 마음을 알 수 있을 텐데…(웃음).”
독일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7년 반 동안 사진작가 겸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닐스 클라우스(37)를 만나기 전에는 ‘한국이 어지간히 좋았나 보다’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다. 파란 눈을 한 매혹적인 영화감독이 ‘한국, 최고예요, 한국에 푹 빠졌어요’라고 외칠 거라는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간 것이다.
그의 홈페이지(www.nilsclauss.com)에 올라온 사진과 장·단편 영화의 대부분이 한국을 배경으로, 한국인 배우가 출연해, 한국에서 제작됐다. 2011년 한국의 건축물에 그려진 벽화를 모티프로 촬영한 ‘Urban Nature(도시의 자연)’가 ‘European Architectural Photography Prize(유럽 건축 사진상)’를 수상했고 같은 해 뮤직비디오 ‘Senior Liv
ing(노인의 삶)’이 ‘Cannes Lions Awards(칸 국제 광고제)’의 ‘Saatchi · Saatchi New Directors Showcase (사치·사치 신인 감독 쇼케이스)’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Senior Living’과 ‘Urban Island(도시의 섬)’는 다른 연출가와 공동 연출을 하면서 촬영도 했다. 한 영화를 찍으면서 연출과 촬영을 동시에 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도시의 섬’ 또한 굴지의 국제 대회에서 수상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물론 한국을 무작정 아름답고 멋지게만 그린 것은 아니다. 해학과 풍자, 사회 비판이 가득했지만 분명 그의 작품에는 한국의 도시와 시골을 넘나드는 ‘사람 사는 모습’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그런 그가 “한국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라고 하니 더 신기했다.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다면서, 자신의 나라도 아닌, 한국을 카메라에 담는 이유가 무엇일까?
한국, 사랑하고도 사랑하지 않는
독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젊은이는 자신이 나고 자란 나라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만나고 싶었다. 미국에서 6개월, 호주에서 1년, 홍콩에서 3개월을 살며 세상을 순회했다. 그 기나긴 여정 사이에는 고국의 본 대학과 홈볼트 대학원, 호주 멜버른 모나시 대학원에서 ‘비주얼문화’와 ‘사진’을 공부하던 시간도 있었다. 사진작가로서 꿈을 다져나가던 그가 영화인으로서의 꿈을 구체화시키는 과정에서 떠오른 나라가 한국이었다. 2005년 말의 일이었다.
“한국에 처음 올 때, 아예 살 생각으로 왔어요. 언제까지 머물지는 정하지 않았지만 그냥 살아보자고 한 거죠. 그래서 한국국제교류재단에 장학금을 신청해놓고 장학금을 받지 못하더라도 한국에 가려고 비행기표를 샀어요. 막연히 독일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살고 싶었는데, 여러 나라를 거치면서 아시아 지역에서 오래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전부터 한국 영화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앞으로도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에 아시아권 나라 중에 한국을 선택하게 된 거죠.”
그가 처음 본 한국 영화는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 그 뒤 홍상수, 이창동, 임상수 감독의 영화를 인상 깊게 봤다고 했다.
지금은 여기가 한국인지 할리우드인지 모를 만큼 한국 영화판의 규모가 커졌지만 당시만 해도 상황은 많이 달랐다. 겉보기에는 그때보다 발전한 것처럼 보이지만 닐스 클라우스의 눈에는 그렇지가 않다.
“지금은 한국 영화가 재미없어졌어요. 90년대 후반 사전심의제도가 사라지고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해지면서 다양한 시도를 통해 새로운 영화가 많이 만들어졌거든요. 더욱이 스크린쿼터로 한국 영화가 보호받고 있던 상황이라 소자본 투자의 영화 또한 많이 만들어졌어요. 그러나 지금은 한국영화가 너무 대형화돼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소자본의 실험적인 영화는 사라지고 할리우드급 영화만 살아남고 있어요. 자본을 많이 투자해야 꼭 좋은 영화는 아닐 텐데, 많이 안타까워요.”
닐스 클라우스는 인터뷰 초반부터, 진지함으로 중무장한 채 사회 비판적인 이야기로 깊숙이 들어가버렸다. 사실 따지고 들자면 재미있는 토론이 되겠지만 ‘김치 좋아요, 불고기 좋아요’라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은 외국인이 ‘한국 영화 산업의 명암’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내니까 기분이 묘했다.
“제가 생각했던 한국 영화의 모습이 많이 변했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영화 공부를 시작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아요.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친구들을 만나며 활동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으니까요.”
사실 한국을 무작정 사랑하기에는, 그가 한국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았다. 여행으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이야기, 하루 이틀 살아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한국에 온 첫 1년은 어학당에서 한국어 공부를 했고 그 뒤에는 중앙대학교 첨단영상학과 대학원에서 촬영과 연출을 배웠어요. 이건 꼭 써주시면 좋겠는데, 한국의 대학 공부는 정말 재미없어요. 학생이 하고 싶은 창의적인 활동보다 교수의 관점과 생각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대학에서 배운 게 없었어요. 다행히 그동안 단편 영화와 장편 영화를 찍어서 졸업 논문을 인정받을 수 있었지만 교수가 학생이 쓴 시나리오에 문제를 제기하면 그 시나리오를 촬영할 수 없는 분위기는 답답했어요.”
그래도 어떻게 용케 촬영 기술을 습득하고 연출을 할 수 있었다고 했더니 “한국 사람들은 모르는 게 있으면 아는 형한테 전화를 해요(웃음). ‘형, 이거 어떻게 하는 거야?’하고요. 그도 아니면 인터넷 검색을 하죠” 한다.
현장에서 스스로 터득하지 않으면 실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자신이 경험한 대학 교육의 현실이었다고 꼬집었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지금에 후회는 없다고 했다.
“어느 곳이나 업무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게 가장 어렵고 중요한 문제죠. 한국에서는 친구를 사귀는 데 어려움은 없었던 것 같아요. 한국 사람들이 외국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그런 분들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면 쉽게 친구가 될 수 있어요. 다만 업무적인 관계와 신뢰를 쌓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죠. 이제 한국 온 지 7년이 넘으니까 그만큼 알게 된 사람도 많고, 최근에는 오히려 저에게 연락해서 함께 작업하자는 분들도 많이 계세요.”
그 업무적인 네트워크는 그가 한국을 떠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라고 했다.
한국을 재료로 세상을 말한다
닐스 클라우스는 한국어를 배우고 대학원에 다니면서 사진 작업을 계속해 나가는 한편 단편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국에서의 일상을 담은 ‘사진일기’는 하루에 한 장씩 1년간 찍은 사진을 파노라마 형식으로 보여주는 단편 영화. 2011년에 ‘유럽 건축 사진상’을 받은 ‘도시의 자연’은 서울 도심 속 건물의 벽화를 주제로 한 스틸 사진이다. 할아버지와 형이 건축을 전공했기 때문에 건축물이나 도시 도형이 자신의 오랜 관심사였고, 이 때문에 작품 속에서도 주요 소재로 다루게 됐다고 했다. 영화감독 박남희와 공동 연출한‘도시의 섬’은 용산의 한 다리 밑에서 생활하는 노숙자의 일상을 담았다.
지극히 한국적인 모습을 담고 있는 그의 작품이지만 그는 ‘한국에 대해 표현하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말한다. 그의 작품에서 ‘한국’은 ‘세계’를 말하고자 하는 ‘매개체’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다시 들으면 한국의 모습을 통해 세계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도시의 섬’은 폐지를 주워 팔아 생활하는 노숙자의 이야기예요. 집도 직장도 없이 생활하는 사람이지만 그날 번 돈으로 라면과 막걸리를 사서 자신의 보금자리에 돌아오는 그에게서 많은 것을 느끼게 됐죠. 세상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것을 잃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사는 것과 달리, 잃을 것이 없어도 희망과 미래를 믿고 사는 사람의 모습에서 또 따른 감동을 받은 거죠. 한국적인 정서를 느꼈던 부분은, 없는 돈으로 산 라면과 막걸리를 먹을 때마다 저에게 먹으라고 권했다는 거죠. 뭔가 인간다움을 느꼈어요.”
기자는 그것을 한국인들은 ‘정(情)’으로 표현한다고 일러주었다. 하지만 한국 사람은 다 아는 ‘정’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 터였다. 그의 메시지는 한국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며, 한국을 모르는 사람에게 한국을 알리려는 의도도 아니었다. 그는 한국이나 독일 등 국가와는 상관없이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작품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제 작품은 다소 어두운 사회적 이면을 보여주기도 하고, 사회의 부조리함을 풍자적으로 나타내기도 해요. 그것은 유럽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기도 해서 한국인들에게 대중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영향력은 적다고 생각해요. 다만 내가 살고 있는 곳의 모습을 통해 세계인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려는 거죠.”
예를 들면 그가 촬영한 단편 영화 ‘Analog Love(아날로그 사랑)’는 바쁜 일상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누구나 고개를 주억거릴 수 있는 이야기다. 한 남성이 아내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잠을 깨고, 대화를 나누고, 아내의 인사를 받으며 출근을 하는데, 남성이 현관문을 닫자 카세트가 멈추며 아내의 목소리가 끊긴다. 현대인들의 쓸쓸한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접한 사람들 중에는 연출자가 의도치 않은 한국적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남매간의 위태로운 감정을 표현한 뮤직비디오 ‘Lonely C(외로운 C)’에서는 전라북도의 한 작고 평범한 시골마을이 등장하는데, 이것을 본 외국인들은 뮤직비디오의 배경에 대한 호기심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제는 한국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새로운 모습을 종종 발견하곤 해요. 오히려 몇 개월 살았던 나라에 대해서는 더 많이 알고 있다고 느꼈는데, 이방인이 새로운 나라에 대해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깨닫고 있어요.”
한국인 아내, 10개월 된 딸
누구나처럼 그의 휴대전화 바탕화면에는 행복한 가족사진이 담겨 있었다. 그의 작품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익숙한 얼굴. 닐스 클라우스의 한국인 아내는 똘망똘망한 눈을 한 딸을 안고 있었다.
“5년 전에 서로 알고 있던 친구를 통해 아내를 만나게 됐어요. 그러다가 제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죠. 뮤직비디오 ‘외로운 C’에 등장하는 시골집이 바로 지금의 처갓집이고, 배우들도 처가 식구들이에요. 처음에 시골의 평범한 가족을 찾다가 그 당시 여자 친구였던 아내에게 부탁했죠. 어르신들을 설득하기 어려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흔쾌히 출연을 허락해주셨어요.”
사랑하는,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는 것이 한국에 오래 머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냐고 물었더니 오히려 ‘딸을 생각하면 한국에 사는 것이 맞나’ 싶을 때가 있단다.
“제가 한국에서 다녔던 대학의 학과는 창의적인 활동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도 지극히 창의적이지 않았거든요. 그런 점에서 딸이 어떤 학교를 가든 아이의 자유로운 창의력을 키워줄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게는 한국이 영화 활동의 중요한 네트워크가 형성된 곳이지만 아이가 커갈수록 교육에 대한 고민은 더 커질 것 같아요.”
그는 가족 이야기가 나오자 쑥스러운듯 웃었다. 외국인과 한국인의 결혼 생활에서 오는 갈등이나 화해 등이 관심거리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자신의 작품 활동이나 한국에 머물고 있는 이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을 내비쳤다.
“제 인생에서 아내와의 결혼은 아주 큰 의미가 있어요. 그런데 저는 그런 것들로 제 자신을 ‘영화 찍는 외국인’으로 국한시켜 바라보지는 않으면 좋겠어요. 출신 국가와는 상관없이 한국에서 영화 작업을 하는 예술인으로 바라봐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죠.”
그는 일상생활에 불편을 못 느낄 만큼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자랑하지만 독일어에 능통한 한국인 친구를 대동하고 인터뷰 장소에 나타났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그의 작품에 어린 애정이 드러났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의 고정된 시선과 질문, 예를 들면 “한국의 어떤 점이 좋아요?”라든가 “한국인과 결혼해 생활해보니 어떤가요?” 같은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예술인으로 한국에서 또 세상에서 인정받고 싶다는 열정도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한국’이라는 틀에 자꾸만 끼워 맞추려던 기자의 숱한 질문들이 민망했다. 이제 독립영화의 한계에서 벗어나 대중 속으로 한걸음 나아가고자 하는, 열정 가득한 파란 눈의 영화감독이 한국과 세상에 어떤 이야기를 내놓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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