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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마비, 세 차례 암 판정에도 희망의 끈 놓지 않은 장영희 교수

글 이영래 기자 | 사진 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09. 06. 17

장영희 서강대 영문과 교수가 지난 5월9일 간암으로 세상을 떴다. 지난 2002년 수필집 ‘내 생애 단 한번’으로 올해의 문장상을 수상하기도 한 고인은 소아마비로 평생 목발을 짚고 살아가면서도 항상 삶의 희망을 얘기해왔다. 9년 동안 세 번이나 암과 싸우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던 그녀의 아름다운 삶.

소아마비, 세 차례 암 판정에도 희망의 끈 놓지 않은 장영희 교수


수필가이자 영문학자였던 故 장영희 서강대 교수는 첫돌을 맞기 전 소아마비를 앓아 평생 목발에 의지해 살아야 했다. 1952년생, 시절이 시절인지라 장애를 안고 살아온 그의 삶은 험난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오늘 아침에도 엄마가 연탄재 부수는 소리에 잠이 깼다. 살짝 문을 열고 보니 밤새 눈이 왔고 엄마가 연탄재를 바께쓰에 담고 계셨다. 올해는 눈이 많이 와서 우리 집 연탄재가 남아나지 않겠다. 학교 갈 때 엄마가 학교까지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면서 깔아놓은 연탄재 때문에 흰눈 위에 갈색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 위로 걸으니 별로 미끄럽지 않았다. 하지만 올 때는 내리막길인데다 눈이 얼어붙는 바람에 너무 미끄러워 엄마가 나를 업고 와야 했다.
내가 너무 무거웠는지 집에 닿았을 때 엄마는 숨을 헐떡거리고 이마에는 땀이 송송 나 있었다. 추운 겨울에 땀 흘리는 사람! 바로 우리 엄마다. 그런데 나는 문득 엄마의 이마에 흐르는 그 땀이 눈물같이 보인다고 생각했다. 나를 업고 오면서 너무 힘들어서 우셨을까, 아니면 또 ‘나 죽으면 넌 어떡하니’ 생각하시면서 우셨을까. 엄마 20년만 기다려요. 소아마비는 누워 떡 먹기로 고치는 훌륭한 의사 되어 내가 엄마 업어줄게요.’- 수필집 ‘내 생애 단 한번’(샘터) 중에서
장 교수는 그의 글에서 ‘나 잘할 수 있다고 제발 한 자리 껴달라고 애원해도 자꾸 벼랑 끝으로 밀어내는 세상에 그래도 악착같이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때문이었다’고 적은 바 있다. 초등학교 시절, 장 교수가 목발을 짚고 걸어가면 아이들이 그의 뒤를 쫓아다니며 놀리거나 그의 걸음걸이를 흉내 냈다고 한다. 그러면 어머니는 아이들을 향해 “그만두지 못해! 얘가 너한테 밥을 달라든, 옷을 달라든!” 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며 딸을 감싸안았다고 한다.
장애를 안고 험한 세상을 살아갈 딸을 지켜내기 위해 흘린 어머니의 눈물, 헌신이 오죽했을까? 어머니는 그렇게 눈 내린 새벽, 연탄재를 깨서 집 앞에 뿌리며 딸 장 교수의 길을 열기 위해 분투했다. 그러나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배려가 워낙 없던 시절이라 장 교수의 학업과정은 말 그대로 ‘투쟁’에 가까웠다.
당시의 중학교들은 그의 신체적 장애를 이유로 응시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잘 알려진 대로 故 장영희 교수의 부친은 한국 영문학계의 태두 장왕록 박사(94년 타계)다. 아버지 장 교수는 당시 몇몇 중학교를 찾아다니며 딸아이가 시험을 보게 해달라고 사정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거절당했다고 한다. 다행히 장왕록 교수가 서울사범대 교수로 있던 덕에 그는 서울사대부속중학교에 시험을 칠 수 있었다.
체력장에서 기본점수밖에 받을 수 없던 터라 그는 -4점을 받고 시험을 치러야 했다. 당시 서울사대부중의 커트라인은 -4점. 단 한 문제라도 틀리면 그는 중학교에 진학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불행히도 한 문제를 틀리고 말았다. 천운이었을까? 어처구니없는 오답 해프닝이 벌어지며 그해 커트라인은 -5점으로 낮아졌고 그는 간신히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또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그는 끊임없이 비슷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대학 진학을 준비했지만 역시 장애를 이유로 응시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그때 ‘장애가 공부하는 데 무슨 문제가 되냐’며 응시기회를 준 곳은 서강대가 유일했다고 한다. 어렵게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대학원에 진학하려 했지만 역시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한 대학 박사과정 시험에서 그가 들었던 말은 “우리는 학부 학생도 장애인은 받지 않아요. 박사과정은 더 말할 수 없지요”였다고 한다.

힘겨운 삶 속에서도 많은 사람에게 희망 메시지 남기고 떠난 진정한 학자
소아마비, 세 차례 암 판정에도 희망의 끈 놓지 않은 장영희 교수

2005년 암 투병 중에도 강단에 서 후학을 양성한 장영희 교수 생전 모습



결국 그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이국땅,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오다 그만 그의 목발이 부러지고 말았다. 혼자서는 일어날 수도 없는 몸.
지나가는 사람이 도와주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길바닥에 앉아 있어야 했던 그 고통의 시간들을 이겨내고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왔다. 그리고 강단에 섰다. 장애를 딛고 일어선 그의 삶에 많은 사람이 박수를 쳤고, 그의 지난한 삶을 담은 수필들은 그간 많은 이의 가슴을 울렸다.
영문학자로서, 대학교수로서, 또 수필가로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던 그였지만 불행히도 고통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지난 2001년 유방암에 걸린 것. 두 번의 수술과 방사선 치료로 병마를 이겨내는 듯했지만 그도 잠시, 척추로 암이 옮아갔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는 역시 지지 않았다. 2년에 걸친 투병생활 후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섰고 2005년 3월 강단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2008년 또 다시 병마와 맞닥뜨리게 됐다. 간암이라는 세번 째 암 판정을 받은 것. 학교를 휴직하고 치료에 들어간 그는 결국 고된 삶을 마치고 눈을 감았다.
지난 9년 동안 그는 끔찍한 항암 치료를 받는 와중에도 ‘문학의 숲을 거닐다’ ‘생일’ ‘축복’ 등의 책을 펴내며 꿋꿋이 싸웠다. 지난 5월9일 병상에서 눈을 감기 직전에도 그는 유고 에세이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샘터)을 다듬었다고 한다.
평생토록 독신으로 살아온 그의 옆을 끝까지 지켜준 것은 이번에도 어머니였다. 장 교수가 눈을 감으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엄마, 미안해. 엄마 딸로 태어나서 행복했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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