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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프라이버시 인터뷰

아내와 사별한 뒤 홀로 큰딸 시집 보낸 임현식

글·송화선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2007. 04. 23

지난 2004년 폐암으로 투병하던 아내를 떠나보내고 홀로 세 딸을 키워온 탤런트 임현식이 지난 1월 말 큰딸을 시집보냈다. 웨딩 촬영과 혼수 등을 직접 챙기며 딸과 살뜰한 정을 나눴다는 임현식을 경기도 송추 자택에서 만났다.

아내와 사별한 뒤 홀로 큰딸 시집 보낸 임현식

“언제든 통화할 수 있고 앞으로도 계속 자주 볼 텐데 뭐가 서운해요. 더 마음 아픈 이별도 했는데 이 정도 갖고, 뭘.” 지난 1월 말 큰딸 남실씨(27)를 시집보낸 탤런트 임현식(62)은 ‘딸이 보고 싶지 않으냐’는 말에 손사래를 쳤다. 중국 상하이에서 유학 중인 사위를 따라 현지에 신접살림을 차린 딸에게도 “아무 때나 전화하지 말고 일주일에 딱 한 번, 매주 일요일 오전 아홉 시에만 전화하라”고 일러뒀다고 한다. 서로 잘 있다는 걸 확인하고 얘기 나눌 수만 있다면, 그리울 것도 마음 아플 것도 없기 때문이라고.
임현식은 지난 2004년 폐암으로 아내를 먼저 떠나보냈다. 어머니를 잃은 뒤 2년 만에 겪은 일이라 충격과 아픔이 더욱 컸다. 그때 그가 간절히 바란 것이 “제발 얘기만이라도 나눌 수 있다면…”이었다고. 아내가 세상을 떠나기 전 한동안 심한 통증과 치료 후유증으로 의식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런 소망이 더 간절했다고 한다.
“그 아픔을 같이 겪었으니까 딸도 제 마음을 잘 알 거예요. 그때 남실이는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공부를 중단하고 엄마 옆에 계속 붙어 있었죠. 엄마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또 그렇게 제 곁에 있었고요.”
“서운할 거 없다”며 큰소리를 쳤지만 딸과 함께 보낸 시간을 떠올리는 임현식의 목소리에선 남실씨에 대한 그리움이 물씬 묻어났다.
“그 아이가 있을 때는 내 집에서 담배 한 대 편하게 못 피웠어요. 얼마나 잔소리를 하는지, 부엌 환풍기 틀어놓고 그 밑에 쪼그리고 앉아 몰래 피웠다니까요(웃음). 그래도 그 덕에 담배가 좀 줄기는 했지….”

엄마 떠난 뒤 아빠 곁을 살뜰히 지켜주던 딸, 지난해 여름 사윗감 데려와
아내와 사별한 뒤 홀로 큰딸 시집 보낸 임현식

취미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임현식(왼쪽)과 지난 1월 말 결혼한 큰딸 남실씨 내외.


엄마가 눈을 감은 뒤 마음 아파할 아빠가 걱정돼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남실씨가 남자친구를 소개한 건 지난해 여름. 알고 보니 아내가 병을 앓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 가운데 한 명이었다고 한다. 다른 친구들과 함께 송추 집으로도 몇 번 놀러와 안면이 있었다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졸업하고 중국 푸단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학생이었다.
“우리 집에 와서 여럿이 같이 어울리는 걸 보고 제가 ‘저렇게 순해서 이 험한 세상 어찌 사나’ 하던 친구였어요. 골라도 하필 딱 그놈을 골랐더라고요(웃음). 그래서 처음에는 ‘아직 공부하는 사람들끼리 무슨 결혼이냐’며 짐짓 반대를 했죠. 그랬더니 바로 사위가 달려와 ‘아버님 제가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매달릴까요’ 하더군요(웃음). 보기보다 뚝심 있고 믿음직해서 마음이 놓였어요.”
임현식이 꺼내 보여준 웨딩앨범 속 사위는 정말 선하고 듬직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외국에서 공부 중이던 사위는 되도록 빨리 결혼하기를 바랐고, 두 사람은 지난해 9월 약혼식을 올린 뒤 바로 결혼 날짜를 잡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임현식이 바빠졌다. 드라마에 웨딩드레스를 협찬하는 숍 가운데 가장 드레스가 예쁜 곳을 수소문하고, 웨딩 스튜디오와 메이크업 숍도 일일이 알아봤기 때문이다. MBC 미술부에 문의해 드라마 ‘대장금’ 때 한복을 협찬했던 디자이너를 찾아 그곳에서 예복을 맞추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제가 알아보고 소개해주니까 딸이 굉장히 좋아하더라고요. 혼수를 장만할 때는 사부인께 미리 전화해 ‘우리 딸 데리고 다니면서 좋은 걸로 골라주십시오. 카드는 제가 남실이에게 맡겨놓겠습니다’ 했죠(웃음). 우리 친척 분들 중에도 혼수장만을 돕겠다는 분이 많았지만, 친정엄마가 하는 게 아닌 다음에야 시어머니와 하는 게 더 낫지 않나 싶었거든요. 그렇게 하니 아이가 시어른과 금세 가까워져서 좋긴 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간소하게 준비하셨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나중에 따로 더 사서 보내드렸어요(웃음).”
결혼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지만, 매 순간 아내가 그립지 않았던 건 아니라고 한다. 그는 준비를 시작하기 전 딸을 불러 “무엇을 할 때든 너희 엄마라면 이럴 때 뭐라고 했을지 생각하고 결정하면 틀림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아내 없이 결혼 준비를 하려니 옛날 생각이 많이 났어요. 아이 키울 때 전 집사람에게 모든 걸 맡기고 아무것도 안 했거든요. 남실이 아래로 딸 쌍둥이가 있는데, 그 아이들 어릴 때는 밤늦게 술 마시고 집에 들어오면 아내가 칭얼대는 두 아이를 안은 채 혼자 엉엉 울고 있을 때도 있었죠. 큰딸 시집보내는데 왜 자꾸 그때 생각이 나는지…. 아이 키울 때 함께 도와주지 못한 게 참 많이 미안했어요.”
하지만 아내는 가끔씩 밝고 환한 모습으로 꿈에 나타나 그를 위로해주곤 했다고 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아내가 좋은 곳으로 간 것 같다”고 말하는 임현식의 얼굴에선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배어나왔다.
임현식은 아내를 떠나보낸 뒤 혹시라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망가질까봐 혼자서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딸들이 더 마음 아파할까봐 아이들 앞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를 했다. 하지만 혼자 남는 순간, 자기도 모르는 새 눈물이 쏟아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고. 그래서 촬영장을 오가는 차 안에서 운전대에 기댄 채 남몰래 많이 울었다고 한다.
“남실이가 중국에 간 뒤 가끔 일요일이 아닌데도 불쑥 전화를 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면 ‘이놈, 또 엄마 생각나서 혼자 마음 아파하고 있구나. 괜히 내 걱정 하면서 울고 있는 거 아냐’ 싶은 생각에 저도 모르게 울컥하죠.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 티 안 내고 일상적인 얘기만 해요. ‘너 하루라도 허술히 보내면 안 된다. 얼른 공부 마치고 돌아와서 돈 벌어라, 응?’ 하면서요. 그 정도 연기도 못해서야 배우라고 할 수 있겠어요?(웃음) 그렇게 얘기를 나누다 보면 아이도 금세 평정을 찾고 편안히 전화를 끊죠.”

아내와 사별한 뒤 홀로 큰딸 시집 보낸 임현식

경기도 송추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고 있는 탤런트 임현식.


“남은 삶 잘 사는 게 아내 바람일 것 같아 더 열심히 살려 해요”
임현식은 얼마 전 동네에서 열린 한 결혼식 피로연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다고 한다.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라 잔치도 구식으로 치러졌는데, 앞마당에 모여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다 흥이 난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춤을 추며 주인 부부에게도 함께 춤을 추자고 권했다고.
“그런데 딸을 시집보낸 그 집 부부가 주춤주춤 나와서 한 20초쯤 춤을 추는가 싶더니 갑자기 끌어안고 엉엉 우는 거예요. 그 사람 많은 곳 한가운데서요. 그때 ‘아, 저게 딸 시집보낸 부모 마음인가보구나’ 하고 생각했죠.”
임현식은 “난 더 마음 아픈 이별을 겪은 뒤라 딸의 결혼이 그렇게 힘들지 않았나보다”며 “결혼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도 처음 생각난 건 딸 얼굴이 아니라 그 자리를 함께 하지 못한 아내와 어머니였다”고 털어놓았다.
“다 같이 모여 살면서 옛날 생각에 머물러 있는 것보다, 아이들이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는 게 훨씬 좋지 않느냐”고 말하는 임현식은 그래서 외국계 항공사 스튜어디스로 일했던 둘째 딸 금실씨(26)와 중학교 교사로 있는 셋째 딸 은실씨(26)도 조만간 결혼시킬 것이라고 한다. 둘 다 마침 짝이 있어서 내년 봄 전에는 모두 가정을 이룰 것 같다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가 직접 지은 이 아름다운 한옥에 그 혼자만 남게 되는 게 아닐까 걱정이 앞섰다. 임현식이 경기도 송추에 정착해 살아온 지 벌써 30여 년. 지난 74년 촬영을 다니다 우연히 어릴 적 고향과 비슷한 동네를 발견한 게 시작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곳에서 아내를 처음 만났고, 결혼했으며, 떠나보낸 뒤 지금까지 살고 있다. 오래도록 평범한 슬레이트 지붕 집에서 살다가 지난 99년 노후를 보내기 위해 지금의 한옥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아내는 “늘그막에 쓸 돈도 있어야 하는데 집 짓는 데 다 쏟아부으면 어떡하냐”며 반대했지만, 막상 집을 짓기 시작하자 직접 전대를 차고 다니며 인부들과 함께 일하는 등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고.
“그때만 해도 이 집에서 오래오래 같이 살 줄 알았죠. 어머니도 아내도 다 함께였으니까…. 그러고 보면, 참 한 치 앞도 내다볼 줄 모르는 게 사람인 것 같아요.”
임현식보다도 더 이 집을 사랑하고 아꼈던 어머니와 아내는 지금 집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근처 양지바른 언덕에 나란히 누웠다. 무덤가에는 그가 수개월에 걸쳐 한 개씩 돌을 쌓아올려 만든 커다란 돌탑도 있다. 살아생전 두 사람에게 잘하지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참회와 참을 수 없는 그리움의 마음을 담은 것이라고 한다.
“아내 떠나고 한동안은 몸이 지치도록 일만 했어요. 아침저녁으로 다른 작품을 하면서, 집에 오면 바로 곯아떨어질 정도로 저 자신을 혹사시켰죠. 시간이 남아 우두커니 있게 되면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거든요. 아내가 어디선가 나타나 ‘여기 이거 손좀 봐달라’고 할 것 같고, 제가 뚝딱뚝딱 해놓으면 ‘훨씬 좋아졌네’ 하며 칭찬해줄 것만 같았어요. 늘 그런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뭐 하나 부탁하는 사람도, 잘했다고 칭찬하는 사람도 없다는 게 견딜 수 없이 슬펐죠.”
하지만 어느 순간 “아내는 내가 더 열심히 살아서 자기 몫까지 해주기를 바라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집 안팎을 돌아보니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 그의 손길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고. 그래서 그때부터 그는 다시 예전의 임현식이 됐다.
“봄이 오니까 얼마나 바쁜지 몰라요. 겨우내 내버려둔 집 구석구석을 돌봐야 하고, 텃밭에 각종 채소도 심어야죠. 5월부터는 새로 시작하는 영화와 드라마 촬영 때문에 더 바빠질 거 같아요. 아내 떠나고 한동안은 내 인생도 끝났구나 생각했죠. 하지만 이젠 남은 삶을 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행복하게 즐겁게, 그렇게 사는 게 아내의 바람일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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