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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33년 만의 외출

전통자수 개인전 연 작가 이문열 부인 박필순

기획·김명희 기자 / 글·장옥경‘자유기고가’ /사진ㆍ박해윤 기자

2006. 05. 04

작가 이문열씨 부인 박필순씨가 22년간 수놓아온 전통자수 작품을 모아 전시회를 열었다. 2남1녀를 키우며 남편 내조하는 틈틈이 자수를 놓아왔다는 그는 이번 전시회에서 혼례복, 화관, 가리개, 미인도, 일월곤륜도 등 자수 작품 50여 점을 선보였다.

전통자수 개인전 연 작가 이문열 부인 박필순

“남편 뒷바라지하면서 시간 날 때마다 수를 놓았어요.”
작가 이문열씨(58) 부인 박필순씨(57)가 지난 4월 중순 서울 인사동에서 자수 전시회를 열어 화제를 모았다. 전시회에 선보인 작품은 노리개, 활옷, 병풍 등 50여 점. 막내딸이 한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말썽을 피우던 때부터 시작해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고 며느리를 맞고 손자를 얻기까지 긴 세월 동안 함께한 작품들에선 박씨의 추억과 삶의 향기들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버클리대 초청으로 미국에 머물다 이번 행사를 위해 잠시 귀국한 이문열씨는 전시회 첫날 아내보다 먼저 도착해 이것저것 살피고 있었다. 부인이 첫 전시회를 여는 소감을 묻자 그는 왼쪽 중앙에 놓인 여덟 폭 병풍 ‘일월곤륜도’를 가리키며 “저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8년이 걸렸다”면서 “오늘만큼은 평생 남편 그늘에 있다가 처음 얼굴을 내보이는 아내가 주인공”이라며 슬쩍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잠시 뒤 ‘유명 소설가의 아내가 아닌’, 이날 전시회의 주인공 박필순씨가 등장했다. 미색 저고리에 살구색 치마를 갖춰 입은 그는 한눈에도 단아해 보였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박씨가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길 좋아하는 성격이었다면 벌써 자수가로 유명해졌겠지만 조용한 성품 탓에 그러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한다. 수년 전 영국의 한 출판사에서 이문열씨의 영어판 책을 발간하면서 박필순씨의 자수를 표지에 쓰자고 제안한 적이 있는데 박씨가 반대해 무산됐다는 것. 그는 이번 전시회도 뜻하지 않게 규모가 커졌다며 겸손해했다.
“버클리대 한 교수님이 우연히 제 작품을 보고는 소품전을 제의했어요. 솜씨는 없지만, 적어도 우리 한국자수의 전통에는 충실했다고 생각해 마음 편히 응했는데 막상 응낙을 해놓고 나니 불안해지더군요. 그래서 그동안 수놓은 것들을 한군데 모아 여러분의 평을 들은 뒤 몇 점을 골라 보이는 게 순서일 것 같아 급히 전시회를 하게 됐죠.”
박씨는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작품수가 적더라도 완전한 전시회를 했을 텐데 그렇지 못해 안타까워했다. 막상 전시회를 하려고 작품을 매만지다 보니 몇 개씩 흠이 눈에 띄어 제대로 된 작품이 하나도 없는 듯도 하다고.

밖에 나갈 시간을 내기 힘들어 시작한 취미생활
전통자수 개인전 연 작가 이문열 부인 박필순

박필순씨는 1973년 이문열씨와 중매로 만나 결혼을 했다. 33년간 2남1녀를 키우고 많은 손님들을 치러내느라 분주했던 그는 막내딸인 기혜씨(24)가 세 돌 지나던 해부터 조금씩 짬을 내 전통자수를 배우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집안 어른들께 자수를 배웠지만, 제대로 익히기 시작한 건 막내가 엄마 손을 덜 타는 세 살이 되던 1984년부터예요.”
그는 자수를 하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왜 고생을 사서 하느냐”는 말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재미있게 할 수 있는 다른 취미도 많은데 눈 아프고 팔 아픈, 자수에만 매달려 있던 그가 보기 안쓰러웠던 탓일 것.
“고전강독을 듣고 싶었는데 남편이 매일 집에서 글을 쓰고 또 시어른을 모시고 있어서 쉽지 않았어요. 따로 시간을 내서 집 밖으로 나가기도 힘들었거든요.”
박씨는 남편이 무명이던 시절, 시어머니를 단칸 셋방에 모시고 살며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왔고 또 남편이 작가로 성공한 후에는 단 하루도 끊이지 않는 손님들을 치러내느라 허리 한번 마음껏 편 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집에는 늘 시원한 김치말이 국수와 맛깔스러운 밑반찬이 준비돼 있어 특히 글을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높았던 것.

전통자수 개인전 연 작가 이문열 부인 박필순

박필순씨의 자수 작품들. 박씨는 오는 10월 미국에서 전시회를 열 계획이라고 한다.


‘사람의 아들’을 비롯한 장편 20여 권, 중단편 6권, 번역 편집한 책 30여 권, 기타 잡문집 등 60여 권이 넘는 책을 펴낸 이문열씨가 그 공을 아내에게 돌리는 것도 이런 이유다.
처음엔 그저 자녀들이 결혼할 때 수저집이나 혼례복, 화관 같은 것들을 장만해주겠다는 마음에서 생활자수에 한정해 수를 놓던 그는 궁중자수를 접하면서 욕심이 커졌다고 한다.
“기원과 축복의 뜻이 담긴 궁중자수 길상도를 한번 해보고 나니 그 화려함에 취해 나중에는 ‘일월곤륜도’까지 감히(?) 시도했죠(웃음).”
전시작 중 ‘변어용천도’는 둘째 아들을 위해 만든 작품. 잉어가 용이 돼 하늘로 오르는 것을 상징해 일종의 기복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등용문의 의미가 있어서 입시 공부하느라 고생할 때 ‘이건 네 거다’ 하며 수를 놓았어요. 활옷(신부의 혼례복)과 관복(신랑의 혼례복), 화관, 조바위는 두 아들을 결혼시킬 때 사용했죠. 3남매를 위해 각자 하나씩 만들면 좋겠지만, 여러 개를 만들 수는 없어 돌려 입고 대를 물리기로 했어요. 당의는 두 며느리에게 약혼복으로 선물을 했던 거고 돌띠는 손자를 위해 만들었어요.”
박씨가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그 모습을 뿌듯한 듯 지켜보던 남편 이씨는 “아내가 대작을 만드는 동안, 나도 대작을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며 ‘허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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