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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놀라운 재테크

IMF 이후 재기, 6년 만에 42억원 모은 코미디언 배연정

“남편의 사업 부도로 큰 돈 날린 뒤 ‘몸으로 뛰어 먹고 살자’며 밥장사 시작했죠”

■ 글·조득진 기자 ■ 사진·정경택 기자

2003. 07. 09

코미디언 배연정이 놀라운 IMF 극복기를 털어놓았다. 남편의 사업 부도로 62억원을 날린 뒤 국밥장사로 재기, 6년 만에 42억원을 모은 것.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다’는 철학을 실천하기 위해 복지사업을 준비중이라는 그를 경기도 곤지암에 있는 ‘배연정 소머리국밥’집에서 만났다.

IMF 이후 재기, 6년 만에 42억원 모은 코미디언 배연정

일흔이 넘은 노모와 함께. 젊어서 식당을 경영했던 어머니는 그의 식당창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가볍게 비가 흩뿌리던 지난 6월 중순, 점심식사 때가 한참 지난 시간이었지만 그의 식당은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늦게까지 손님이 있어 바쁘니 잠시만 기다려달라”며 그가 내온 국밥 한 그릇. 생김새야 여느 소머리국밥과 다를 바 없었지만 일단 한 숟가락 뜨고 보니 그 맛이 달랐다. 오랜 시간 제대로 우려낸 진한 사골국물과 주인장의 인심을 짐작케 하는 많은 양의 고기, 그리고 사각사각 씹히는 김치는 ‘역시 장사가 잘되는 곳은 다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비가 와서 뜨끈한 국물이 생각나는지 오늘은 손님이 늦게까지 많네요. 이제 휴가철이 다가오니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대목이에요. 겨울에 손님이 많을 것 같지만 오히려 여행객이 많은 여름벌이가 좋거든. 한여름 벌어 겨울을 나는 거지.”
장사꾼이 다된 듯한 그가 앞치마를 벗으며 자리에 앉았다. 코미디언 배연정(54). 71년에 가수로 데뷔한 직후 코미디언으로 변신, 뛰어난 미모와 재치 있는 입담으로 오랫동안 인기를 얻었던 그는 어느날 국밥집 주인이 되어 나타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충격으로 입 돌아간 남편 본 후 장사 결심
“배연정이 국밥집을 한다니까 별의별 말이 많았어요. ‘유명세를 이용해 돈 벌려고 한다’ ‘체인점 장사하는 거 아니냐’ 등. 하지만 처음 장사를 시작했을 당시 우리 부부에게 이것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요즘 인기 연예인 중엔 연예활동에 따른 수입이 불안정해 부업 차원에서 카페나 식당을 내는 일도 많지만 그의 경우엔 ‘생활고’때문이었다고 한다. 바로 남편이 IMF의 첫 총탄을 맞았던 것이다.
“하룻밤 만에 62억원이 날아간 거예요. 당시 남편은 오퍼상을 하고 있었는데 페루에 생활용품을 팔아 꽤 재미를 봤어요. 그런데 물건을 공급하던 사람들이 돈만 먼저 받고는 거짓말처럼 하룻밤 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거예요. 5억, 10억 하는 식으로 모두 모았더니 62억원이더군요. 수십년 동안 남편이 벌어 모은 전재산이었어요”
그 충격으로 남편은 입이 돌아가고 말았다. 화통한 성격의 그는 “이왕 이렇게 된 것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다른 살길을 찾자”고 했지만 꼼꼼하고 소심한 성격의 남편에겐 너무도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요일마다 양복을 바꿔 입고 다닐 정도로 부족함 없이 산 사람이었으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겠어요. 하지만 저까지 실의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남편의 양복을 모두 보따리에 싸서 장롱 깊숙이 처박아놓고는 청바지를 꺼냈죠. 이제부턴 몸으로 뛰어 먹고 살자고 하면서.”

IMF 이후 재기, 6년 만에 42억원 모은 코미디언 배연정

‘배연정 소머리국밥’의 성공 노하우는 주인의 직접 경영. 식당의 청결과 음식의 맛에 대해 그는 엄격하기 짝이 없다.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고, 때마침 연예계에도 IMF의 바람이 불어 각종 오락프로마다 출연진을 줄이는 일이 벌어졌다. 출연료가 높았던 중견 코미디언들의 ‘정리해고’는 당연. 그와 함께 13군데나 됐던 야간업소 수입도 한순간에 끊겨버렸다.
“우리 부부에겐 커다란 위기였죠. 그러나 어려서부터 많은 고생을 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생각도 정리할 겸 해서 남편과 말로만 1백번을 더 갔던 설악산에 처음으로 여행을 갔어요.”
1주일간 설악산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충격을 달래고 돌아오는 길, 출출하던 차에 들린 식당이 바로 현재 그가 운영하는 ‘배연정 소머리국밥’ 터였다. 당시 테이블 두개의 썰렁한 그 식당은 빚으로 넘어가기 일보직전의 상태. 그를 알아본 식당 주인은 “싸게 넘길 테니 인수 좀 해달라”는 말을 농담처럼 던졌다고 한다. 그러나 돌아오는 그의 머릿속엔 이미 청사진이 하나씩 그려지고 있었다. 더구나 그날 밤 TV에선 ‘IMF를 이기는 식당창업’이라는 프로그램까지 방영됐다.
“곤지암이면 서울에서 가깝고, 어려서 어머니가 식당을 한 경험도 있으니 한번 해보자는 결심을 하게 됐어요. 그리곤 시장 조사에 들어갔죠. 하루 차량 통행량은 얼마나 되는지, 신호대기로 차가 밀리는 곳인지, 인근에서 이름난 식당의 음식 맛은 어떤지…. 당시만 해도 국밥의 ‘국’자도 모르던 때라 그전 식당 주인을 고용해 장사를 시작했어요.”
그때가 바로 97년 5월. ‘IMF 체제로 들어간다’는 정부의 공식발표가 나기 전이었지만 그의 식당에 동네 여행사 사장이 주차요원으로, 보험과 화장품 판매원들이 종업원으로 들어올 만큼 이미 불경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식당을 준비하는 동안 기존에 장사를 하시던 분들의 텃세가 굉장했어요. 간판도 개업하는 날 새벽에야 몰래 올릴 정도였다니까요. 일단 3백명분의 솥을 걸고 문을 열었죠. 한 그릇에 5천원씩, 하루 1백50만원만 벌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결과는 대박이었다. 손님이 너무 몰려 무서워서 도망가고 싶을 정도였다고. 3백명분은 두 시간 만에 바닥이 났고, 솥을 3개를 걸어도 반나절을 넘기지 못했다. 며칠 뒤부터 1천명분의 솥을 걸고 장사를 했지만 그도 마찬가지. 문 밖에서 기다리는 손님을 위해 DJ까지 동원, 음악을 틀었고, 어느날은 쌀과 고기가 떨어져 못 파는 경우도 발생해 기다리던 손님들에게 거친 항의를 받기도 했다.
“제 이름을 걸고 있으니까 호기심에 찾아온 분들도 많았지만 맛 때문에 오는 분들이 더 많은 것 같아요. 한번 들른 사람은 꼭 다시 찾곤 했으니까요. 이윤을 많이 남기지 않고 좋은 재료를 쓰는 데 힘썼더니 음식 맛이 좋다고 하더군요.”

IMF 이후 재기, 6년 만에 42억원 모은 코미디언 배연정

최근에 미국에서 이탈리아 남자와 결혼한 큰딸 현혜(28·왼쪽 사진 뒷줄 가운데)와 늦둥이 딸 예지(11·오른쪽 사진)의 모습. 그는 천식이 있어 몸이 안 좋은 예지가 늘 걱정이다.


그의 재테크 실력이 빛을 발한 것은 이때부터. 사업의 미래를 분석한 그는 밤업소 출연할 때 사두었던 모텔을 16억원에 팔아 급랭시설과 저장창고 등 시설 투자에 들어갔다. 차량을 타고 온 손님이 많은 것을 감안, 식당 옆에 4백여평의 주차장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후 더 많은 손님이 모여든 것은 당연했다.
“남편은 주차를 맡고 저는 주방에 들어가 채소를 다듬고 육수를 끓였죠. 주인이 직접 하지 않으면 위생이나 음식의 질이 유지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한푼 두푼 모았더니 저희도 모르는 사이에 꽤 많은 돈이 생기더군요.”
그렇게 만 6년을 벌어 일군 총재산이 무려 42억원. 물론 국밥집만으로 번 것은 아니고, 목돈이 모일 때마다 부동산 등에 투자한 덕분이다. 한때 ‘괴산 땅을 지나려면 배연정의 땅을 밟아야 한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남편의 말수가 줄어들고, 술 담배만 해대면 그건 뭔가 문제가 생긴 거예요. 우리 남편도 새벽녘에 잠은 안 자고 베란다에서 담배만 뻑뻑 피워대고 있더라고. 부도가 난 것을 미리 말만 했어도 내가 모은 돈으로 조금이라도 막아봤을 텐데…. 하여튼 IMF 와중에 거금을 잃었지만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다시 재기했다는 게 너무 고마워요. 돈 62억원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인 셈이죠.”
요즘 남편은 슬슬 뭔가 사업을 준비하는 눈치라고. 그러나 재정권을 그가 틀어쥐고 있고, “지금 무너지면 다시는 못 일어선다”는 말에 그나마 작은 규모로 준비하는 것 같다고.
“이런 말 하기는 우습지만 인생엔 굴곡이 있는 것 같아요. 정상을 향한 오르막길이 있으면 또 한없이 추락하는 내리막도 있죠. 사람들은 큰 고통을 대하면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내게 이런 시련이 오는가’ 하고 좌절하지만, 현실을 빨리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길이 아니면 빨리 돌아 가야죠.”
그는 그 많은 돈을 벌어 어디에 쓰려고 하는 걸까? 사람들이 그렇게 물어오면 예전엔 “큰돈 번 다음에 말하겠다”고 하던 그도 요즘은 “쓸 곳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버려진 노인과 아이들, 그리고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는 화상환자들을 위한 복지시설을 만드는 것이다.
“저희 식당엔 장애인도 많이 오세요. 불편한 몸을 이끌고 다니는 그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죠. 제가 괴산에 땅이 좀 있거든요. 그곳에 양로원과 보육원, 그리고 화상환자를 위한 생활터전을 마련하고 조그만 학교도 짓고 싶어요. 서로 외로운 사람들끼리 의지하면서 살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물론 소머리국밥집도 지어야겠죠. 그 수입으로 복지시설을 유지해야 할 테니까요.”
현재 그의 소유인 괴산 땅 2만5천평엔 터를 잡는 공사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이미 딸들의 이름인 현혜, 예지와 자신의 이름을 섞어 ‘혜지연’이라는 이름도 만들어놓았다고.
“요즘엔 장사가 끝나면 ‘오늘은 벽돌 몇장을 마련했나’ 하며 수익금을 세요. 10년 뒤엔 여러 아이들의 엄마, 여러 노인들의 며느리로 살아가는, 검게 그을린 채 채소밭에 웅크리고 앉아 일하고 있는 저를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지금껏 웃음으로 남에게 즐거움을 주었다면 이젠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다는 배연정. 그의 또 다른 변신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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