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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아름다운 선택

버려진 아이 친아들로 호적에 입적시켜 돌보는 처녀엄마 박서희

“핏줄 하나 섞이지 않았지만 우리에겐 혈육보다 더 진한 사랑이 흘러요”

■ 기획·최호열 기자(honeypapa@donga.com) ■ 글·조희숙 ■ 사진·지재만 기자

2003. 04. 15

부모로부터 양육을 거부당한 정신지체 장애아, 입양된 후 다시 버려진 아이, 교도소에 있는 아빠 때문에 갈 곳이 없어진 아이…. 인천시 무의탁아동공동체 ‘해피홈’의 박서희씨는 10년째 버려진 아이들의 ‘왕엄마’로 지내오고 있다. 어릴 때부터 자신을 엄마로 알고 자란 아이를 위해 미혼모를 자청한 박서희씨의 처녀엄마로 살아가기.

버려진 아이 친아들로 호적에 입적시켜 돌보는 처녀엄마 박서희


“학교 다녀왔습니다.” 오후 1시가 지나자 아이들이 하나둘 ‘해피홈’(032-518-2080)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낯선 기자에게도 깍듯이 인사를 건네는 이곳 아이들은 ‘가정교육 잘 받은’ 여느 집 아이들과 다름없이 밝고 씩씩하기만 하다.
인천시 부평2동에 위치한 ‘해피홈’은 비영리 기독교 구제 선교단체. 지난 87년 권태일 목사 부부가 처음 문을 열었다. 초창기 해피홈은 ‘즐거운 집’이라는 이름으로 치매노인과 무의탁 장애인, 고아들을 위한 복지시설로 출발했다. 90년 아동복지시설이 따로 분리되면서 ‘해피홈’이란 이름으로 지금까지 버려진 아이들의 따뜻한 보금자리 역할을 해주고 있다.
90년부터 13년간 해피홈을 지켜오고 있는 박서희씨(33). 그는 해피홈 식구들에게 ‘왕엄마’로 통한다. 현재 해피홈에 있는 아이들은 약 60여명 정도. 박씨를 포함해 7명의 봉사자들이 해피홈에서 숙식하며 18개월 된 영아부터 대학생에 이르는 아이들을 친가족처럼 보살피고 있다. 긴 생머리에 작고 가냘픈 체구의 그녀가 해피홈에 오게 된 사연은 공교롭게도 여성동아와도 인연이 깊다.
“90년에 우연히 ‘여성동아‘에 실린 ‘즐거운 집’ 기사를 보고 주소와 연락처를 적어두었어요. 그후 부평에 사는 오빠 집에 가려고 버스를 탔는데 반대편에 ‘일산동’이라고 써 있는 버스가 보이는 거예요. 저도 모르게 무작정 그 버스로 갈아타고 처음 이곳에 오게 되었죠.”
당시 해피홈은 ‘즐거운 집’이라는 이름으로 일산동 판자촌에 위치해 있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박씨는 건강이 좋지 않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요양을 하던 중이었다. 학창시절 봉사활동 한번 한 적 없었지만 막연하게 복지시설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아보고 싶었던 그였다. 하지만 그가 직접 목격한 복지시설의 환경은 ‘도저히 밥을 먹을 수 없을 것 같은’ 참담한 것이었다. 갈 곳 없는 아이와 노인들은 비닐로 둘둘 말은 판잣집에서 난방시설도 없이 추운 겨울을 나고 있었다.
그런데도 박씨는 이상하게도 처음 들어서는 순간 마음이 편했다고 한다. 그는 매달 5천원씩 후원금을 내기로 하면서 해피홈과 인연을 맺어오다 이듬해인 91년 3월 정식으로 한가족이 되었다.
“그때 해피홈에 6∼7명 아이들이 있었는데 돌보던 교사가 갑자기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당장 목사님께 달려가 돕고 싶다고 했더니 뜻밖에도 ‘쉬운 일이 아니다’며 만류하시더라고요. 처음엔 서운했는데 나중에 편하게 자란 사람 같아서 오히려 상처를 받을까봐 걱정스러웠다고 하시더라고요.”
새롭게 한식구가 된 그를 아이들은 움직이는 곳마다 졸졸 따라다니며 ‘엄마’처럼 따랐다. 특히 가장 나이가 어렸던 세살배기 은총이(가명·15)는 아예 박씨의 왼쪽 팔을 자신의 베개로 점찍어 둘 정도였다. 은총이가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그때까지도 호적이 없는 아이를 위해 박씨는 은총이의 진짜 엄마가 되어주기로 결심했다.
“스물여섯살에 법적으로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거죠. 하지만 남들 생각만큼 힘든 결정은 아니었어요. 호적이 없는 아이에게 서류정리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한 일이었지만 본의 아니게 부모님께는 불효를 한 셈이 되었어요.”

버려진 아이 친아들로 호적에 입적시켜 돌보는 처녀엄마 박서희

10년 넘게 부모 잃은 아이들을 돌보는 박서희씨.


강원도 삼척 출신인 그는 6남매 중 넷째딸로 다복한 가정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형제들 중 유독 몸이 약한 그가 해피홈에서 살겠다고 했을 때도 이틀 만에 안 된다며 찾아온 부모님이었다. 하물며 결혼도 하지 않은 딸이 미혼모가 된다는 사실을 선뜻 용납할 리 만무했다.
“해피홈에 온 첫해에 아이들과 집으로 놀러가고 싶다고 했더니 어머니가 그러시더라고요. 동네에서 이상하게 생각하니까 ‘엄마’라고 부르는 아이는 놔두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아이들만 데리고 오라고요. 하지만 어머니는 함께 간 아이들에게 딸기와 토마토도 따주시며 친할머니처럼 대해주셨고, 나중에는 아이들이 ‘고물고물하니 참 예쁘다’고 말씀해주셨어요.”
하지만 은총이를 그의 호적에 입적시키는 일에 대해 부모님의 반대는 완강했다. “당장 호적을 파가라”는 말까지 하며 그를 말려봤지만 이미 그는 은총이를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킨 후였다. 부모님께 불효한 것이지만 아들 은총이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제 그와 은총이는 가족모임에 꼬박꼬박 참석하는 어엿한 ‘가족’이 되었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6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은총이가 6학년이 되었을 때 어머니가 ‘니는 내 딸이니까, 애는 이쁘지 않지만 이제는 이쁘게 보려고 한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제 조카가 모두 6명인데 요즘 어머니는 사람들한테 손자가 일곱이라고 말씀하신대요. 이번 설에도 은총이는 세뱃돈을 듬뿍 받아왔어요. 은총이에게 ‘가족은 이런 거다’ 라고 말해줄 수 있어서 너무 기뻤어요.”
비록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아들을 키우면서 부모의 마음을 조금씩 헤아리게 되었다는 박씨. 중학교 2학년인 아들은 요즘 사춘기를 겪느라 그의 속을 태우고 있단다. 며칠 전에는 은총이를 야단치면서 자신의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려 퍼렇게 멍까지 들었다는 그는 자신도 다른 엄마들과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며 웃는다.
“해피홈 아이들은 새학기가 되고 가정환경조사서를 쓸 때 가장 예민해져요. 며칠 전에도 은총이와 가정환경조사서를 쓰는데 제 직업란에 해피홈 사무장이 아니라 학생(현재 그는 신학교에 다니고 있다)으로 쓰면 어떠냐고 은근하게 묻더라고요. 해피홈 아이들의 마음속에 친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아물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겠죠.”
버려진 아이 친아들로 호적에 입적시켜 돌보는 처녀엄마 박서희

60명의 부모 잃은 아이들이 사는 해피홈은 국가 지원 없이 후원금만으로 운영한다.


해피홈이 부평동으로 옮긴 지는 햇수로 4년째. 그동안 15명이 해피홈을 거쳐갔고 그중 2명은 결혼해 어엿한 가정을 꾸리기도 했다. 일산동 판잣집 시절, 좁은 방 2개에서 12명의 아이들이 옹기종기 새우잠을 자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구김살 없이 의젓하고 꿋꿋하게 자라준 아이들이 대견하기만 하다는 박씨는 정작 가슴 아픈 일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생기는 일이 많다고 한다.
“가끔 아이들끼리 싸움이 나면 부모들이 아이를 앞세우고 해피홈으로 쫓아와요. 그리고 첫마디가 ‘웬만하면 오지 않으려고 했는데’라고 하시죠.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자기 아이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다면 우리 아이들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주셨으면 해요.”
해피홈의 한달 생활비는 약 2천만원 정도. 국가로부터 정식 복지시설로 인가를 받지 못해 일체 지원금 없이 전적으로 후원금에 의존하고 있어 언제나 빠듯하다. 하지만 박씨는 아이들에게 경제적 궁핍을 사랑으로 채워주고 있다.
“제일 속상한 것은 아이들이 거짓말하거나 공부를 못할 때가 아니에요. 아무런 비전과 꿈이 없는 아이들을 볼 때 제일 가슴이 아파요. 우리 은총이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나중에 ‘잘 컸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도록 바르게 자랐으면 하는 바람뿐이 없어요.”
마지막으로 이제 아들에게 아빠를 만들어줄 때가 아니냐고 묻자 박씨는 “아이 키우는 것만큼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인 것 같다”며 수줍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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