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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배부른 여자들’의 유쾌한 수다

연극 <헤이 걸!> 통해 임신부에 대한 오해와 고통 밝히는 여자들

“여성에겐 자긍심을, 남성에겐 존경심을 갖게 한다면 작품은 성공한 거죠”

■ 기획·최미선 기자(tiger@donga.com) ■ 글·박진숙 ■ 사진·지재만 기자

2002. 11. 14

누구나 안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임신에 관한 진실과 오해의 유쾌한 에피소드를 연극무대에 올렸다. 다섯명의 여배우들이 끝없는 재치와 유머로 관객을 사로잡으며 임신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일깨워주고 있는 유쾌·상쾌·통쾌한 현장을 찾아보았다.

연극  통해 임신부에 대한 오해와 고통 밝히는 여자들
다섯명의 여자들이 빙 둘러서서 손에 손을 얹고 크게 외친다.“헤이 걸!”이라고. 조명이 비추는 무대 위로 여자들은 그들만의 특별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화사한 홈드레스가 어울리는 세상물정 모르는 전업주부 미영, 몸매가 드러나는 검은색 가죽옷 차림의 화끈한 커리어우먼 설하, 딸을 기다리는 귀여운 왕비병에 빠진 민숙, 열아홉살에 결혼해서 딸만 넷을 낳고 아들을 원하는 베테랑 아줌마 보영, 힙합머리에 먹을 것만 있으면 행복한 연익. 이 다섯명의 여자들은 임신부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모인 파주시 어느 한 동네의 ‘엄마 되기 모임’의 회원들이다.
“대기실에서 진료를 기다려 / 일곱번이나 화장실을 들락날락 / 임신을 한다는 건 성스러운 일이야 마치 수녀처럼 / 더부룩한 배와 변비, 임신한 여자들의 이 고통 / 아침엔 구역질 변덕스런 감정 / 눈물 치질과 가려움의 고통 못 잊어 / 임신을 한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야”
무반주 아카펠라 뮤지컬로 진행하는 연극 <헤이 걸!>은 이렇게 임신부들의 기쁨을 노래하며 관객들을 맞는다.
임신한 이유도 제각기 다양한 아줌마들. 결혼 6년 동안 불임인 줄 알았다가 임신을 한‘미영’은 새로 장만한 집에서 아이를 낳고 싶어한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출산하고 싶은 그녀의 작은 소망을 남편과 의사는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 앞에는 사회와 맞서야 하는 문제들이 속속 찾아온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아이를 낳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살아갈 세상을 만들어갈 책임도 함께 지게 된다고 역설하는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점점 용감한‘엄마’가 되어간다.
“주부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가족들을 위해 정성껏 마련한 식탁에 유전자변형식품이 버젓이 올라가게 놔둘 것 같아요? 지금껏 모르고 먹어서 우리 몸에 남아있는 독소들이 우리 아기들에게 미칠 영향은 어쩔 거죠? 끝까지 참지 않고 싸울 거야”라고 외치는‘미영’의 대사는 한 평범한 여자가 엄마로 거듭나는 모습을 유감 없이 보여준다. 한편 ‘엄마 되기 모임’의 회원들은 동네의 유전자변형 실험공장에서 불법으로 유출된 식품에 대해 분노하여 뱃속 아기를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공장을 상대로 싸울 것을 결의한다.
연극 <헤이 걸!>은 기악 반주가 없는 합창인 아카펠라로 ‘배부른 여자’들의 수다를 표현하고 있다. 아카펠라는 무대에서 음을 살려 줄 악기연주가 없기 때문에 흥을 살리기 위해서는 소리의 화성과 조화가 필수적이다. 그리고 덧붙여 흥겨운 손장단과 춤이 함께 어우러지는 쉽지 않은 장르다. 더욱이 목소리로 트럼펫, 트럼본, 마림바, 드럼 등 악기 흉내도 내야 하기 때문에 아카펠라 뮤지컬은 배우들이 온몸을 던져야 비로소 가능한 뮤지컬이다.
이 쉽지 않은 뮤지컬을 장연익, 장설하, 김민숙, 박미영, 김보영씨 등 5명의 여배우가 여러가지 역을 동시에 부산스럽게 맡아가며 앙증맞게 만들어내고 있다.
“자궁도 없는 남자들이 임신에 대해 뭘 안다고…”

“여러분은 듣게 되죠 신음소리 / 우리들의 고함치는 소리를 / 우리는 엄청난 일들을 겪을 테죠 엄마 되는 고통 / 우린 산부인과 병원 여인들 / 그 날이 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 / 아기가 나올 그곳을 면도하고 관장을 하고 기저귀를 차겠죠 / 우린 엄청난 일들을 겪을 테죠 / 여기저기 들려오는 고함소리 그곳에 우리들 침대가 있겠죠 / 아 생각조차 하기 싫어지네요”
유전자변형식품 제조 공장 앞에서 물건을 교묘히 빼돌리려는 공장 측과 맞서 싸우다 ‘미영’이 공장 앞 아스팔트에서 출산하는 장면은 그들이 싸워왔던 ‘사회적 편견과 현실과의 싸움 끝에 아기로 표현되는 고통을 세상에 토해내고 화해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진지한 주제를 경쾌하게 풀어나가는 <헤이 걸!>은 시종일관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툭 불거진 배를 이리저리 휘두르며 재치 있는 유머를 내뱉는 임신부들의 모습은 예사롭지 않다. 여배우들은 비록 연출한 모습이지만 자신들의 배부른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면 좋겠다며 “임신부들이 너무 섹시하게 나온다고요? 임신한 여자가 얼마나 매력 있는데요. 의학적으로 여자들은 임신을 하면 성적 욕구를 더 느낀다고 해요. 임신하면 고결해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거죠. 오히려 성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배부른 여자의 당당함이 아름다운 것 같아요”라고 입을 모은다.
공연을 하루 앞두고 시연회를 마친 불꺼진 무대에서 만난 그들은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노래를 부르던 것과는 달리 그저 이웃집의 잘 아는 여자들처럼 정감이 가는 모습이다. 이미 연극계에서는 쟁쟁한 이력을 지닌 그들이 한자리에 모여 공연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김보영씨(22)는 막내로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에, 김민숙씨(33)는 <캣츠> <넌센스> 등에 출연한 전문 뮤지컬 배우들이다. 장설하씨(31)는 <불 좀 꺼주세요> <마지막 춤을 나와 함께> 등에 출연, ‘신춘문예 단막극 최우수연기상’을 받기도 했다. 이번 작품에서 남편이 안무를 맡았다는 박미영씨(32) 또한 <하드락 카페> <왕과 나> 등에 출연한 결코 만만치 않은 이력을 지녔고, ‘왕언니’ 장연익씨(37)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사랑이 가기 전에>로 이미 이름이 잘 알려진 배우다. 이렇게 저마다 바쁜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부터가 연극계에서는 화제가 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들은 오래전부터 선후배 관계로 친하게 지내온 끈끈한 관계다.
“연출가와는 10년지기 친구예요. 그래서 그의 작품에 꼭 출연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번 작품을 선택했죠. 좋은 작품이라서 힘든 줄도 모르고 연습했어요.”

연극  통해 임신부에 대한 오해와 고통 밝히는 여자들

뮤지컬연극 <헤이걸>의 한장면.

장씨는 걸쭉한 아줌마인 ‘연익’역과 아이를 받아주는 ‘할머니 간호사’역을 연기하고 있다. 그녀는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역할도 맡고 있어서 연극이 진행되는 내내 재미있는 입담을 선보인다.
“아기를 가져보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출산의 고통과 입덧의 괴로움 등에 대한 편견에 치우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작가와 함께 임신부들의 심리상태나 몸가짐 등을 의논하면서 준비하다 보니 감정이입이 쉬웠어요”라며 장씨는 이번 배역에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헤이 걸!>은 체르노빌 방사능 유출사건을 계기로 10년 전에 영국에서 무대에 올려졌던 을 우리 실정에 맞게 각색한 작품이다.
“가깝게 지내는 분이 영국에 가셨다가 우연히 이 연극의 원작을 보시고 제게 번역을 맡기셨지요. 그게 한 4년 전일 겁니다. 그 대본으로 극장에서 공연을 했어요. 하지만 원작의 핵폐기물 사건 등 환경문제가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해 주목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이번엔 제가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내용으로 연출하게 되었습니다. 임신부들의 에피소드를 더 부각시키고, 방사능 사건보다는 현실에 맞는 유전자변형식품으로 문제를 돌렸지요.”
배우들이 연습하는 내내 무대를 지켜보며 말없이 격려하던 연출가 권은아씨(37)의 설명이다.
권씨는 원로 연출가 권오일씨의 딸로 부녀가 연출가의 길을 걷고 있는 셈. 권씨는 현재 아버지가 키운 극단 성좌를 맡아 그 맥을 잇고 있다. 막상 공연을 앞두자 긴장이 된다는 권씨는 “극이 끝났을 때 여성관객들에겐 자긍심을, 남성관객들에겐 존경심을 느낄 수 있게 한다면 이 작품은 성공한 것”이라고 한다.
“집에서 애를 낳는 것이 위험하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데 저도 집에서 태어났어요. 집에서 출산한다는 건 산모나 남편, 아기 모두에게 가장 편안한 환경 아닌가요? 아기를 낳는 것이 병도 아닌데 병원과 약품에 너무 의존하는 지금 현실을 꼬집고 싶었어요.”
그래서일까? 연극 무대서에는 기존의 틀을 깨는 모습이 꽤 엿보인다. ‘임신부 트로트 체조 교실’의 흥겨운 노래 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임신부들의 모습은 클래식 음악만이 태교에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비웃는 듯하고, 만삭으로 배가 터질 듯한데도 배꼽티를 입은 ‘설하’의 모습도 그러하다.
극중에서 지극히 남녀평등을 지향하는 인물이지만 단지 애 가진 아줌마라는 이유로 승진을 하지 못한 ‘설하’역과 유전자식품연구소 소장 역을 소화해낸 연익씨는 이번 연극을 준비하면서 힘들었던 점을 토로했다.
“1인 2역을 해내야 하는 것이 만만치 않더라고요. 더군다나 두 인물이 완전히 상반된 캐릭터잖아요. 공연 시작 며칠 전까지도 두 인물 사이의 차별화를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고민했어요. 인물 표현이라는 게 대사만 가지고 하는 게 아니잖아요.”
유일하게 결혼한 ‘미영’역의 박씨는“솜으로 만든 배를 달고 춤을 추는 것이 처음엔 힘들었어요. 연극을 하면서 엄마들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게 되었죠. 나중에 아기를 낳으면 저도 용감한 엄마가 되고 싶어요”라며 얼굴을 살짝 붉혔다.
“승진이 코앞인데 짤리게 생겼네. 짤리는 0순위가 왜 아이 가진 아줌마냐구”
공연 첫날인 10월8일, 설레는 마음으로 관객을 맞이하는 여배우와 전 스태프들의 발걸음이 분주했다.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든 때문인지 임신부에서부터 40대 직장남성, 발랄한 여대생까지 관객들의 연령층도 다양했다. 공연 내내 관객들은 여배우들의 노래와 몸짓, 쏟아내는 대사에 몰입하면서 때로는 박수로, 때로는 웃음으로 배우들과 하나가 되어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친구들과 함께 공연을 보러 왔다는 한 대학생은 “임신한 여자들의 이야기라서 그런지 독특하고 재미있어요. 아기 낳는 장면이나 임신부들에 대한 묘사가 생생해서 공감이 많이 갔어요”라며 이 세상의 모든 임신부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고 했다.
연극이 끝난 뒤 여배우들을 만나러 분장실로 들어서자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관객이 많고 호응이 좋았다며 매우 흡족해 하는 다섯명의 여배우들은 긴장을 풀면서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출연한 배우들이 서로 스케줄이 조정된다면 지방공연도 꼭 가고 싶어요.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편하게 볼 수 있는 연극이면 좋겠고, 애를 낳은 여자나 그렇지 않은 남자 모두가 공감했으면 좋겠어요. 임신과 출산이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경사스런 일이니까요.”
불룩한 배를 들이밀며 춤을 추는 다섯명의 임신부들이 만들어가는 <헤이 걸!>은 임신은 여자뿐만 아니라 예비 아버지가 될 남자들을 한층 성숙하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11월5일까지 대학로 바탕골 소극장에서 공연한다. 문의 02-765-5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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