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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노래와 글이 있는 만남

명동문학카페 현장 중계 소설가 박완서 가수 전인권

“만난 적은 없지만 서로가 서로의 팬이었습니다”

■ 글·정지연 기자(alimi@donga.com) ■ 사진: 조영철 기자

2002. 11. 14

‘우리 문학계의 거목’ 박완서씨와 ‘한국 록의 살아있는 신화’ 가수 전인권이 한자리에 모였다. 처음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만 생각했던 그들은 어색한 첫인사를 접고 이내 의기투합했다. 가을밤의 쌀쌀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같이 있어 훈훈하기만 했던, 명동문학카페의 밤을 지상 중계한다.

명동문학카페 현장 중계 소설가 박완서 가수 전인권
명동이 지금처럼 세련된 패션의 거리가 된 지는 그리 오래지 않다. 지금의 명동은 가난에 찌들어 본 일 없는 젊은이들의 ‘풍요’와 ‘소비’를 상징하는 첨단 유행의 거리가 됐지만 50년대와 60년대만 해도 명동은 비록 가난했어도 멋과 낭만이 넘치던 문화예술인들의 ‘해방구’나 다름없었다.
그런 명동의 멋과 낭만을 오늘날에 되살리려는 자리가 있어 눈길을 모은다. 매주 금요일마다 열리고 있는 명동문학카페가 바로 그것. 시인 신경림과 가수 한영애가 초대손님으로 나왔던 첫째 날(9월6일)에 이어, 10월 11일에는 우리 문학계의 거목 박완서씨와 ‘타협하지 않는 자유의 정신’ 가수 전인권이 한자리에서 만났다. 이날 사회를 맡은 소설가 하성란은 “화려한 명동거리 한 복판에서 우리는 예술의 거리였던 원래의 명동을 기억한다”는 인사말로 명동문학카페의 밤을 열었다.
하성란 문단의 거목과 음악계의 거목 두분을 한자리에 모시니 영광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두분은 어떠신지 모르겠네요. 오늘 초면이시죠?
박완서 참 대조적으로 보이는 것 같아요. 제가 너무 좋아하는 가수분인데, 저렇게 파격적인 분인 줄은 미처 몰라서 깜짝 놀랐어요(관객 웃음). 규칙이나 규범에 얽매인 채 사는 저 같은 이들은 저런 분들에게 매력을 느끼죠.
전인권 전 영광스럽고요. 좋은 얘기 많이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관객 박수).
하성란 이런 질문해서 외람되지만, 머리분장하시느라 고생이실 거 같은데, 보통 세팅하는 데 얼마나 걸리세요?
전인권 20분이고 40분이고 맘에 들 때까지 합니다.
하성란 머리 손질하시는 동안 주로 무슨 생각하세요?
전인권 특별히 무슨 생각을 한다기보다, 거울 보면서 ‘어, 이쪽 부분이 죽었네 살려줘야지’ 뭐 이런 생각을 합니다.
말이나 글보다는 노래와 그림이 더 편한 전인권은 행사 내내 특유의 어눌한 말투와 유머감각으로 관객의 폭소를 자아냈다. 10대 고등학생부터 동창생으로 보이는 40, 50대 아주머니까지 한데 어우러진 관객석은 같이 웃고 박수 치고 한 단어라도 놓칠세라 쫑긋 귀를 세워 세대간의 장벽 같은 건 느낄 틈이 없어 보였다.

하성란 박완서 선생님은 얼마전에 원주 토지문학관에서 강연을 하신 데 이어 이 자리까지 나와주셨어요. 대중과의 만남이 참 드문 분으로 알고 있는데요.
박완서 이처럼 피할 수 없는 자리에나 나오지 잘 안 나오려고 해요. 사실 책을 내고 나면 작가를 바깥으로 끌어내려고들 그러는데, 저는 책 뒤에 숨어 있고만 싶어요. 뭐랄까, 남들이 의식하면 불편해서 죽겠어요. 전철 속에서라도 누가 ‘어, 박완서 아니야?” 이러면 불편하고 의식이 돼서 미처 내릴 정거장도 아닌데 내리기도 하고요. 길거리에서 뭐 사먹기도 눈치 보이잖아요. 뭐랄까… 남들이 보고 있으면 ‘작가 같은 표정을 지어야겠다’(관객 웃음) 이런 생각 때문에 불편해요. 활자 외에는 안 나서고 싶어요. 그게 제 성격에 맞는 것 같고요. 오늘 이 자리는 특별한 자리이기에 의무감을 가지고 나왔지만요.
사실, 박완서씨는 몸을 다쳐 15일 동안 깁스를 한 상태였다고 했다. 리허설 때 “몸이 안 좋아서 걱정이다”라더니,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전인권은 이내 “박완서 선생이 좋아한다는 노래 ‘사랑한 후에’를 부르겠다”면서 일어섰고, 탁하지만 시원하게 뚫린 특유의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울려퍼져 나오는 동안 박완서씨는 내내 턱에 손을 괴고 음악에 빠져들었다.
“명동은 처녀작 <나목>에도 등장한 추억의 장소예요”

박완서 사실 제가 전인권씨의 팬이에요. 전인권씨가 투명하게 예쁜 목소리는 아니잖아요. 걸쭉한 찌꺼기가 있다고 할까, 그런 목소리인데, 그게 우리가 견뎌내온 세월이나 한처럼 느껴져서 들으면 들을수록 좋아요.
전인권 (고개를 크게 숙이고 인사하며) 감사합니다. 제가 이런 자리는 난생 처음이라서 지금 어쩔 줄을 모르고 있어요. 이해해주세요(관객 폭소).
하성란 제가 이 근처 학교에 다녔거든요. 저만 해도 명동에 추억이 많은데, 두분 모두 명동에 얽힌 추억이 있으시다면 얘기 좀 해주세요.
전인권 저는 명동의 추억하면 장발, 청바지, 음악다방이 떠오른다고 말하라고 이 원고에 써있네요(관객 폭소). 사실, 생각해보면 전 명동에서 여자를 많이 꼬신 것 같아요.
박완서 신세계백화점이 있는 이 명동은 전쟁중에 미8군 PX였어요. 그 한 구석에 초상화 그리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 간판쟁이 중에 유명한 화가 박수근씨가 있었어요. 그때 저는 매장에 앉아서 ‘이거 사세요’ 하는 호객행위를 했는데, 당시만 해도 박수근씨가 그렇게 유명한 줄 알지도 못했어요. 그때 전 대학교 1학년이었는데 속으로 ‘내가 어떻게 이 지경까지 왔나’ 하면서 자괴감을 느끼던 차라 저런 유명화가도 저러고 있는데 하면서 위안을 삼을 수 있었지요. 생전에 그토록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신 후에야 그분의 그림이 엄청나게 비싼 값으로 팔리는 걸 보고 분통을 떠뜨렸어요. 아, 나라도 그분의 삶을 증언해야겠다 해서 쓴 것이 바로 <나목>이죠.
전인권 전 국민학교 때까지는 책을 많이 읽었어요. 그 이후로는 거의 책을 안 보다가 요즘 <그 많던 싱아는 다 어디로 갔을까>를 보고 있는데, 사실 40쪽까지밖에 못 봤어요. 그런데 농담이 아니고요. 전 박완서 선생님의 유년기를 사랑하게 됐어요. 저하고 닮은 부분이 참 많다는 생각을 했어요. 물론 표현은 다르지만 속으로 느끼는 건 참 비슷하구나 생각했어요. 정말… 제 가슴속에 인쇄하고 싶을 정도입니다(관객 ‘우와’ 하는 함성과 박수).
하성란 오늘 들은 말씀 중 가장 시적인 표현인데요(웃음). 전인권 선생님은 아주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렸고, 또 언어나 글보다도 그림이 더 편하다고 들었는데요.
전인권 다섯살 때 기억인데 지프차를 그렸더니, 할머니가 칭찬을 해줬어요. 잘 그린다고. 그 이후로 계속 그렸죠. 칭찬받고 싶어서. 그러다가 그림을 자연스레 그만두게 된 건 노래를 하니까 여자들이 다 좋아해주는 거예요(웃음). 그래서 자연스레 음악으로 넘어갔죠.
하성란 지금 그림은 안 그리세요?
전인권 틈틈이 데생은 하고 있어요. 60대쯤 되면 동양화나 서예를 배워볼 생각도 있고요.

여기까지 얘기한 후 박완서씨의 글 낭독시간이 있었다. 그는 특유의 자분자분한 말투로 <죽은 새를 위하여>라는 수필을 읽어 내려갔다. 아차산 자락에 자리잡은 작가의 집 유리창에 와 부딪혀 죽은 새를 보며 연민을 느낀다는 내용. 하성란의 말마따나 ‘죽은 새 한마리에도 이런 연민과 슬픔을 느끼는 데 왜 우리는 외국인 노동자에게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가’ 새삼 되새기게 하는 글이었다.

명동문학카페 현장 중계 소설가 박완서 가수 전인권
하성란 참, 이 쯤에서 다들 궁금해하는 걸 여쭤 볼게요. (대마초) 지금은 안하시죠?
전인권 잡힐까봐서. 5년 동안 안하겠다고 약속했거든요. 이제 3년째니까 지나면 다시 시작하려고(관객 폭소).
하성란 그룹명인 들국화라는 이름은 어떻게 지으시게 된 건가요?
전인권 처음에는 전인권 트리오, 블루 스카이, 뭐 이런 걸 생각했어요. 최성원이 어떤 이름으로 할까 그러는데, 마침 최성원의 손에 들국화껌이 들려있는 거예요. ‘들국화 어떠냐?’ 그러길래 다들 ‘좋다’해서 이 이름이 된 거지요. 그런데 이름을 참 잘 지었어요. 제가 사주팔자 비슷한 육갑법을 짚어본 일이 있는데, 제가 사군자 중 국화로 들어가 있대요. 어쩌면 운명 같은 것이지요.
하성란 치열한 음악적 고집으로 음악을 해오신 분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전인권 제가 음악을 하게 된 구체적 계기는 비틀스를 알고부터예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노래해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85년에 큰 인기를 얻은 후 86년에 미국으로 갔어요. 그래도 우리나라에서는 최고의 록을 한다는 우리가 갔는데, 엄청 깨졌어요. 너무 형편없는 거예요. (미국)얘들이 잘하는 이런 걸로는 안되겠다, 우리 거를 해야겠다 마음 먹고 사물놀이하는 김덕수씨에게 창도 배우고 했어요. 단가를 한 2년 배웠는데, 김덕수씨에게 이런 식으로 노래해야 하는 거 아니냐 제안했더니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열 받아 만든 단가가 있는데 한 소절 들려드릴게요.



이날 전인권은 ‘사랑한 후에’를 시작으로 하성란의 특별 요청에 응해 비틀스의 ‘이매진’, 자신이 만들었다는 단가 한 소절과 ‘사노라면’ ‘이등병의 편지’까지 총 5곡의 노래를 들려주었다. 비록 신시사이저 한대 가지고 하는 라이브 공연이었지만 그의 노래 실력은 조금도 녹슬지 않고 쩌렁쩌렁했다. 그러면서 “ 예정에 없던 ‘이매진’을 부른 건 하성란씨 때문이다. 대마사범으로 감방에 들어가 있을 때 탄원서를 써줬는데, 앞으로 또 하게 되면 부탁한다”고 너스레를 떨어 관객석을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하성란 제가 인터넷을 통해 80년대부터 죽 전인권 선생님 변모과정을 보니까 머리는 그대로인데 몸무게가….
전인권 (손을 내저으며) 몸무게만큼은 제 팔자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관객 폭소).
하성란 음악적 욕심이 있으실 거 같아요.
전인권 서양음악 중에 정말 좋은 음악들 있잖아요. 예를 들면 ‘호텔 캘리포니아’ 같은 그런 노래들, 그걸 뛰어넘는 우리 곡을 만들어 여러분께 들려드리고 싶어요. 13년 동안 판을 안 낸 것은 정말 좋은 노래 만들어 노래하고 싶었기 때문인데, 지금 드디어 앨범 작업중이에요.
하성란 박완서 선생님은 늘 후배들이 모범으로 삼고 싶은 작가로 꼽히는 분이신데요. 후배 작가들에게 혹은 문학 지망생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요.
박완서 훈련이 안된 상태에서 글을 쓰는 걸 경계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물론 자꾸 써야 는다는 말도 있지만. 발표하는 데 급급하면 곤란하죠. 전 좀 참으라고 말하고 싶어요. 당신 아니어도 문학판에 나올 이들 많으니까, 정 쓰지 못하면 못 참겠다 하는 정도가 아니라면 참으라고 말이에요. 요즘 글 쓰는 엄마들이 참 많은데, 전 문학을 액세서리로 생각하는 건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류 수필가, 작가, 이런 게 근사해 보인다는 생각에서 하는 건 아닌가 스스로 물어보세요. 참, 전인권씨가 얼마전에 신문 칼럼을 썼다고 들었어요.
전인권 개천절날 기념으로 쓴 글이에요. 제가 생각했을 때 우리는 저마다 생일엔 신나게 놀잖아요. 그런데 왜 나라의 생일에 놀지 않느냐고 썼어요. 개천절 같은 날 국민을 신나게 해주면 좋잖아요. 그렇게 즐겁게 한판 논다고 아무 문제 없거든요. 지난 6월 대~한민국 사회를 봐도 아무 문제 없잖아요.
하성란 월드컵으로 태극기 붐이 일기 이전부터 누구보다 태극기를 사랑했다고 들었어요.
전인권 10년 전 라이브 카페 할 때 무대에 늘 태극기를 걸었어요. 사실 애국심 그런 것 때문이라기보다 90% 정도는 디자인 때문이었고, 10%는 마음에서 오는 감동 때문이었어요.
하성란 박완서 선생님은 벌써 필력이 30여년에 이르시는데요. 그 감회가 남다르실 거 같아요.
박완서 생각해보면 아무한테도 청탁 받지 않고 쓴 글은 처녀작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후로는 스스로 감동하면서 쓴 게 없는 것 같아요. 청탁했으니까 어쩔 수 없어서 써왔을 따름이죠. 과연, 늘 원고 조르고 채근하는 이가 없었다면 이걸 다 쓸 수 있었을까 저도 신기해요. 그래도 늘 요 다음번엔 이걸 써야지 버릇처럼 그래요. 만약 쓸 게 없다면 제겐 예금통장에 돈이 한푼도 없는 것보다 더 비참할 거 같아요.
그러면서도 제가 소설 쓰는 일에 절망하는 건 보통 무슨 일을 하든 10년만 하면 도가 튼다고 하잖아요. 숙련되는 데 10년이라는 단위가 필요하다는 건데, 이 노릇은 아무리 해도 숙련, 그러니까 저절로 되는 단계가 안되는 거예요. 그것이 너무 힘든 것 같아요. 10년이 세번이나 지났는데, 왜 쉬워지지가 않을까 절망하면서도 쓰고 또 쓰는 거지요.
대담이 끝난 후에는 춤패 ‘불림’의 2인 안무와 부천외국인 노동자센터의 신부가 쓴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글이 낭송되었다. 박완서씨는 “우리 동네에도 조그만 공장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있다”면서 “이 땅에서 최소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전인권도 “평생 음악밖에 모르고 살아왔지만, 앞으로 ‘아름다운 재단’ 등에 음반 수익금의 1%를 내놓기로 했다”고 밝혔다.
명동문학카페 행사는 11월말까지 매주 금요일마다 진행된다. 곧 황석영과 권진원, 고은과 이은미, 강은교와 크라잉넛의 만남이 이어질 예정. 문의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국 02-313-1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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