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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powerwoman #interview

조배숙 민주평화당 초대 당 대표

#대세는여성당대표 #여검사1호 #성매매특별법

editor 김지영 기자

2018. 03. 07

국회 정당의 대표들이 ‘여다남소(女多男少)’ 구도로 재편됐다. 최근 창당한 민주평화당의 당 대표로 4선의 조배숙 의원이 선출돼서다. 법조계에 여성이 드물던 시절 검사·판사·변호사를 두루 경험하며 몸에 밴 균형 감각과 통찰력, 우리 사회에서 ‘성매매’를 몰아낸 추진력으로 민주평화당의 안착에 속도를 내고 있는 그가 파워우먼 릴레이 인터뷰의 다섯 번째 주자로 나섰다. 

국민의당이 급기야 둘로 쪼개졌다. 바른정당과의 통합에 찬성한 의원들은 2월 13일 바른정당과 손잡고 바른미래당을 창당했다. 국민의당을 탈당한 의원들이 세운 신당 민주평화당은 2월 6일 창당대회를 열고 원내 4당으로 공식 출범했다. 이날 민주평화당 당원들과 의원들은 창당준비위원장직을 수행하며 창당을 이끈 4선의 조배숙(62) 의원을 초대 당 대표로 추대했다.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에 이어 민주평화당에서도 여성 당 대표가 나오자 우리 사회의 성평등 의식이 발전하는 계기가 될 거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더욱이 조배숙 대표는 16대 국회의원이던 2002년 ‘성매매 알선 등 행위의 처벌 및 방지에 관한 법률(이하 성매매특별법)’을 대표 발의해 성매매업을 척결한 주인공이다. 성매매특별법 제정은 2002년 1월 전북 군산시 개복동에서 감금된 채 성매매를 하던 여성 14명이 화재로 사망한 사건이 계기가 됐다. 그 현장에서 성매매의 심각성을 목격한 조배숙 당시 새천년민주당 의원은 개복동 사건 같은 불법적 감금과 착취 관행을 없애고자 여성 시민단체들의 건의를 수렴해 기존 윤락행위 등 방지법보다 강력한 성매매특별법을 발의했다. 2004년 이 법이 시행된 후 ‘성매매=범죄’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국내에서 성매매가 발붙일 곳이 없어졌다. 

조 대표의 고향은 전북 익산이다. 1956년 극장주인 아버지와 전업주부인 어머니의 1남 5녀 중 셋째로 태어난 그의 삶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중학교 때까지 고향에서 지내다 상경, 경기여자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나왔다.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사법연수원을 거쳐 1982년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국내 최초의 여성 검사였다. 1986년 인천지방검찰청에서 수원지방법원으로 자리를 옮긴 후 대구지방법원, 서울지방법원, 서울민사지방법원, 서울고등법원을 돌며 판사를 지냈다. 1995년엔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 사무실을 연다. 

이후 가수 현진영, 고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 앵커 백지연 등 유명인의 변론을 맡으며 스타급 변호사로 이름을 떨치던 그는 1999년 새천년민주당 창당 발기인으로 정계에 입문한다. 2001년 당의 비례대표 자리를 승계해 16대 국회에 입성한 후 지역구(전북 익산 을) 후보로 출마해 2004년 17대, 2008년 18대 총선에서 내리 당선된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뼈아픈 패배를 맛본 그는 2016년 20대 총선에서 4선에 성공해 오늘에 이르렀다. 당 대표가 된 지 일주일 만이던 2월 13일 국회의원회관에서 만난 그는 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 쓸 정도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민주평화당 대표 선출을 축하드립니다. 소감이 어떤가요. 



당 대표로 추대됐을 때 딱 하루 좋더라고요(웃음). 빛의 속도로 창당한 정당이다 보니 빈자리도 많고 할 일도 넘쳐나요. 당원들과 의원 보좌진이 자원봉사로 부족한 일손을 메우고 있어요. 그분들에게 더없이 고맙죠. 어깨가 무겁지만 민주평화당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키고, 6월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끌어야겠다는 소명 하나로 당 대표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지방 선거구 개편 등 정치 구도를 형평성 있게 바꾸는 일에도 앞장설 거고요. 

국민의당에서 나와 신당을 창당한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장 큰 이유는 정체성이죠. 정당은 정체성이 중요해요. 생각이 같은 사람들이 이상을 추구하는 정치 단체니까요. 국민의당은 민주화 정신과 햇볕정책을 계승한 당으로 출발했어요. 저희는 뿌리가 신익희 선생님, 조병옥 박사,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등 민주화 세력인데 합당하려는 상대(바른정당)의 근간은 햇볕정책과 거리가 먼 박정희·전두환·노태우·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이에요. 도저히 섞일 수 없어 당원 대부분이 반대했는데도 합당이 강행됐어요. 저희로선 새로운 당을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의원님을 초대 당 대표로 추대했다고 생각합니까. 

국민의당지키기운동본부가 신당추진위원회, 창당준비위원회로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조직을 이끄는 업무의 연속선상에 있다 보니 당 대표라는 중책을 맡긴 게 아닌가 싶습니다. 검증되지 않은 분이 당 대표를 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지켜봤기 때문에 ‘새로운 변화와 개혁을 상징하는, 안정감 있고 검증된 리더’가 나야와한다는 데 공감한 것 같아요. 

현 정부가 잘하는 점, 아쉬운 점을 꼽는다면요.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노력을 높이 평가합니다. 적폐 청산 의지도 긍정적으로 봅니다. 하지만 개혁을 지향하는 건 좋은데 준비된 개혁, 균형 잡힌 개혁이 아니어서 아쉬워요. 예를 들어 최저임금 인상 폭의 경우 시장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을 내놨어요. 어제(2월 12일) 국회 산자위(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렸는데 준비되지 않은 개혁 때문에 제도의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너무 커 국민들이 힘들어한다는 지적이 많았어요. 오히려 최저임금 인상으로 일자리가 더 줄어드는 안타까운 현상이 발생하고 있답니다. 최저임금이 올라가니 예전에는 6시간에 할 일을 5시간에 하게 해 노동 강도도 더 세졌다고 해요. 

사회생활을 1982년 검사로 시작했습니다. 당시 임숙경 검사와 함께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검사로 화제가 됐죠. 법조계가 남성 중심 조직이었기 때문에 성차별이 심했을 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성차별이 분명 있었어요. 한 번은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일반직 남성 계장이 옆에 있던 타자 치는 여직원에게 “김 양, 김 양도 사시 공부해서 검사 한번 해봐” 하더라고요. 초임 검사 시절에는 민원인들이 여성이라고 얕잡아볼까 봐 입회계장(수사관)을 나이 든 분들로 선임해줬어요. 배려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남성 검사와 동등한 대우로 여겨지지 않았어요. 입회계장들도 여성 검사와 일하는 걸 자존심 상해했고요. 처음엔 그게 불편했지만 8개월마다 입회계장이 바뀌어서 부딪힐 일은 없었어요. 그때는 성차별보다 업무적인 차별이 심했어요. 

최근 서지현 검사가 성추행 피해 사실을 밝히며 법조계 내부의 문제들이 터져 나왔는데, 대표님 검사 시절에는 분위기가 어땠나요. 

최초의 여성 검사라고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집중적으로 받았기 때문인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저를 대하는 태도가 조심스러웠던 것 같아요. 술자리를 함께하는 일도 별로 없었고 회식을 가도 2차는 저를 빼놓고 갔죠. 서지현 검사의 용기로 시작된 미투(Me Too) 운동의 확산은 우리 사회의 성평등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피해자에게 죄를 묻는 식의 폭력을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된다는 점이에요. 


성차별이나 성희롱 등으로 상처받은 여성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습니까. 

과거에는 조직의 안정을 위해 혹은 밝히기가 창피해서 ‘내가 참자!’ 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여성을 위해서도, 남성을 위해서도 얘기해야 해요. 여성이 느끼는 수치심을 남성에게 표현해야 달라지려고 노력할 겁니다. 그러니 적극적으로 고발하고, 민주평화당에도 신고하세요. 언제든지 ‘위드유(With You)’로 함께하겠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판사가 되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고 들었어요. 

아버지가 사업을 하셔서 송사가 좀 있었나 봐요. 법원을 드나들며 판사가 참 멋진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대요. 법정 정중앙에 법복을 입고 앉아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던 분쟁을 해결하고 억울함을 풀어주는 모습을 보고 그 분위기에 압도당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초등학교 2학년밖에 안 된 제게 “딸 중에 네가 가장 논리적이고 착하니까 어려운 사람을 많이 도와줄 수 있겠다”며 “법관이 되라”고 하셨어요. 엉겁결에 각서도 썼어요. ‘저는 앞으로 커서 법대에 가서 판사가 되겠습니다’ 하고요. 아버지가 앉은뱅이책상에서 일을 하셨는데 그 각서를 거기에 붙여놓으셨어요. 오며 가며 제 눈에 잘 띄게요.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신가요. 

아버지는 자수성가형 사업가예요.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배우처럼 잘생기셨어요. 제가 어렸을 때 극장을 운영하셨는데 약속을 천금처럼 여기셨고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셨어요. 그리고 페미니스트셨어요. 여성도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하셨어요. “우물을 파면 고기가 모이는 법”이라는 말로 제게 늘 용기를 주셨고 딸들을 다 귀여워하셨어요. 어머니는 전형적인 현모양처예요. 매우 검소하고 엄하셨어요. 그 당시는 남아선호사상이 강해서 딸 다섯보다 아들을 애지중지하셨죠. 지금은 구순을 넘긴 연세라 건강이 좋지 못해요. 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아요. 정치를 한답시고 어머니와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갖지 못해 늘 죄송해요. 

책을 좋아해 소설가를 꿈꾼 적도 있더군요. 아버지에게 효도하고자 법조인이 된 건가요. 

꼭 그런 건 아니에요. 어릴 땐 유약해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어요. 주로 책을 읽으며 보냈죠. 그 시기가 평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를 배우는 시간이었지 싶어요. 여고 다닐 때도 문학에 관심이 많아 전혜린 작가를 무척 좋아했어요. 그분이 쓴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읽고 여성으로서 새로운 것을 계속 추구하는 모습에 반해 선망하게 됐죠. 근데 그분이 서울대 법대를 나왔더라고요. ‘나도 한번 도전해봐야겠다’는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못다 한 소설가의 꿈을 이뤄볼 생각은 없나요(웃음). 


시간이 되면요(웃음). 제가 법조인이나 정치인으로서 많은 일을 겪었기 때문에 소재는 충분한데 시간이 문제예요. 하하하. 

검사로 지내다 1986년 판사로 전관했더군요. 아버지가 바라던 판사로서의 삶은 만족스러웠는지요. 


검사나 판사나 다 격무에 시달리더라고요. 검사일 땐 한 달에 3백 건을 처리했습니다. 구속 사건은 만기 안에 끝내야 하니 스트레스가 굉장했죠. 판사는 그 많은 사건의 피고인 유무죄를 가려야 하니, ‘이 정도로 증거가 충분한가? 이 사람은 아니라고 하는데 우리가 잘못 판단하는 거 아닌가?’ 하며 끊임없이 제 판단을 돌이켜보느라 마음 편할 날이 없었고요. 

판사 시절 개인적으로 힘든 일도 겪으셨다죠. 1991년 이혼으로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으로 압니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이혼율이 높지 않을 때여서 저한테 이런 일이 닥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상처도 많이 받고 삶에 대한 의욕도 없어지고 망망대해 외딴섬에 혼자 버려진 느낌이었죠. 그러다 ‘이게 내가 예상한 최선의 삶은 아니지만, 차선의 삶이라도 살아야겠다.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부끄럽게 않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정신적으로 힘들어 새벽 기도를 다녔어요. 그러면서 안정을 찾고 새로운 희망도 생겼어요. 신앙의 힘으로 버틴 거죠. 하지만 아버지에게 불효를 해 늘 죄송한 마음이에요. 제가 1991년 3월 이혼했는데 그때 아버지가 암 투병 중이었어요. 이혼 소식을 들으면 충격을 받으실까 봐 어머니가 말씀을 안 드렸죠. 그 상황을 모르는 아버지가 사위를 계속 찾으니 어머니가 어쩔 수 없이 제가 이혼한 사실을 전했는데 아버지가 막 우시더래요. 그게 가장 마음에 걸려요. 그러다 아버지는 1991년 12월에 돌아가셨어요. 어쩌면… (조배숙 대표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티슈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이혼의 아픔을 겪고 나서 정신적으로 강해졌죠. 그런 일을 겪었기에 다른 사람의 고통이나 아픔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됐고요. 

판사에서 변호사로 이직한 이유는요. 

검사, 판사로 일하며 용서받지 못할 범죄자들뿐만 아니라 딱한 사연 때문에 범죄자가 된 이들도 많이 봤어요. 그런 억울한 사람들의 대변자가 되고 싶었어요. 또 1989년엔 게이오기주쿠대학교 객원연구원으로 일본에서 1년간 지냈는데 거기서 넓은 세상을 봤죠. 인생을 한 번 사는데 법원에만 매여 있어서야 되겠나, 싶더군요. 1995년 여성 대법관의 꿈을 버리고 변호사 개업을 했죠. 그때는 여성 변호사는 살아남기 힘들다는 인식이 강했어요. 선배들은 “온실 속에서 있지, 왜 정글로 나갔느냐? 험한 사람들을 어떻게 상대하려고 하냐?”며 걱정하고, 어떤 사람은 “민사와 가사 사건만 맡아라. 형사 사건은 절대 맡지 말라”고 조언하더라고요. 근데 제가 검사도 했으니까 형사 사건을 엄청 많이 맡았죠.

사람을 좋아하고 남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성격이어서 변호사가 적성에 잘 맞았을 것 같아요.

개업하자마자 사건을 엄청나게 수임했어요. 제가 변론해서 승소를 많이 했거든요. 특별한 노하우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변론 준비를 정말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했기 때문이에요. 또 승소 가능성이 있는 건 “있다”, 없는 건 “없다”고 말하는 솔직한 성격도 한몫했다고 봐요. 처음에는 사람들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데 왜 좋은 말을 안 해주나’, 섭섭해하죠. 근데 제 예측대로 결과가 나오니까 그게 소문이 나 ‘거짓말을 안 하는 변호사’ ‘서초동에서 가장 선임하고 싶은 변호사’로 통했죠. 매주 토요일 제가 서울구치소를 찾을 때마다 수감자들이 저와 접견하려고 줄을 섰을 정도고요. 연달아 수십 명의 접견 신청에 응하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피하지 않았어요.

그들 개개인의 억울한 사연을 들어주는 것도 변호사의 일이니까요. 그때 그걸 어떻게 했나 싶은데 생각해보면 검사, 판사 시절 격무에 단련됐기 때문인 것 같아요. 안 그랬으면 못 버텼을 거예요.


2001년 새천년민주당 의원으로 새 인생을 시작한 이유도 궁금합니다.

원래 정치에 뜻을 두고 있었던 건 아니에요. 최초의 여성 검사라는 꼬리표에, 사회적 사건 변호를 연이어 맡으면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계속 받았어요. 주위에서는 여성으로서 대표성을 갖고 정치를 하라는 권유를 많이 했어요. 하지만 제가 먼저 정치인들에게 가서 눈도장을 찍고 싶진 않았어요. “정말 정치를 해야 한다면 기회가 올 거라 생각한다”고 큰소릴 ‘뻥’ 쳤죠.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1999년 정균환 의원, 유선호 의원이 새천년민주당 창당 발기인이 돼달라고 찾아왔어요. ‘이게 그 기회인가 보다. 하나님의 뜻이다’ 싶어 그 자리에서 창당 발기인 서약을 했어요. 2년 후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됐고요.

최근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했을 정도로 일과 가정생활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대표님은 어떤 방식으로 워라밸을 추구하시는지요.

사생활이 없어요. 정치를 시작하고부터는 워라밸이 불가능해졌어요. 주말엔 지역민들의 민원을 들으러 지역구에 내려가야 해요. 호남 지역은 민원이 많아요. 근데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해가 돼요. 제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라면 당연히 돕는 게 맞고요. 저한테 하소연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리되고 위로가 됐다, 들어줘서 감사하다는 분도 많아요. 다른 사람들의 워라밸을 위해 봉사하는 거죠. 그건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면 못 해요. 그렇다고 워라밸에 대한 로망이 없는 건 아니에요. 워라밸이 가능한 상황이 된다면 피아노를 다시 배우고 싶어요. 판소리와 춤도 좀 배우고 싶고, 독서에도 집중하고 싶어요(웃음).

평소 독서를 즐기신다고 들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이 뭔가요.

지금까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은 성경이에요. 늘 마음에 새기는 구절은 시편의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와 빌립보서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요. 최근에는 한시에 관심이 생겨 안희진 교수(단국대 중국어과)가 쓴 ‘시인의 울음’이라는 책을 보고 있습니다. 당나라의 대문장가인 한유의 글을 소개한 책이죠. 거기에 나오는 ‘모든 사물은 균형을 잃으면 운다… 우는 것은 갈망하는 게 있기 때문이다… 모든 소리는 다 무엇인가 균형을 찾으려는 애씀이 아닌가’라는 대목이 가슴 깊이 와 닿더라고요. 정치인의 입장에서 ‘균형’과 ‘갈망’에 공감했어요.

정치인으로서 가장 잘한 일을 꼽는다면요.

2004년 대표 발의해 제정한 성매매특별법이죠. 성매매특별법 시행으로 전국의 집창촌이 자취를 감췄어요. 이후 7번이나 헌법소원이 제기됐어요. 헌법소원을 제기한 측은 성매수자거나 성매매로 이득을 취해온 사람들이에요. 성매매 종사자들이 집단으로 시위를 벌이기도 했고요. 하지만 성매매를 법으로 허용하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문제예요.

가장 후회되는 일은요.

2012년 19대 총선에서 낙선한 일이 가장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지역구 관리에 소홀했던 게 결정적 패인이었어요. 그때 제가 이끌던 조직을 잘 화합하고 추스르지 못한 게 후회스러워요. 그 일로 값진 교훈을 얻었죠. 4년간 성찰의 시간을 보내고 재도전해 4선의 영예를 안았어요. 지역 구민들이 저의 진정성을 인정해주신 결과라 매우 뜻깊게 생각해요.

정치인으로서 지금까지 지켜온 덕목이나 삶의 원칙이 있나요.

약속과 신뢰요. 삼사일언(三思一言)이라 했듯 정치인은 항상 신중히 생각하고 조심히 말해야 합니다. 임기응변식으로 쉽게 말하고, 쉽게 어기면 신뢰를 잃게 돼요. 그만큼 정치인의 약속은 신뢰와 직결되기 때문에 지킬 수 있는 약속을 해야 하고,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해요. 신뢰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입니까.

고 김대중 대통령입니다. 불의에 저항하고 개혁에 앞장서신 분이거든요. 자신은 편견과 차별 속에서 온갖 불이익을 당했지만 화해와 포용의 자세로 국민 통합을 이루고자 하셨고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좋아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는 지도자로 꼽힐 만큼 그의 정치는 독단적이지 않아요. 반대파라고 상처 주는 법도 없죠. 합의제 민주주의를 가장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지도자가 메르켈이라고 생각해요.

민주평화당의 정체성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주세요.

민주평화당은 민주화 정신과 햇볕정책을 계승하고 민생을 중시하는 정당이에요. 한반도 평화 실현 의지를 당명에 담고, 지역 분권과 지역 평등을 슬로건으로 내건 유일한 정당이기도 해요. 저희는 지역, 세대, 성별 간 차별이 없는 세상을 지향합니다. 또한 지역 패권을 부정합니다.

민주평화당을 ‘호남당’으로 보는 시선이 있습니다. 전국에서 표를 모으려면 이런 선입견을 깨야 할 텐데요. 복안이 있습니까.

호남당이라는 딱지 붙이기는 호남 고립화를 바라는 패권 정치의 흘러간 유행가입니다. ‘영남당’이라고는 하지 않잖아요. 호남은 불합리한 제도 개선, 신분 차별 타파, 주체적 민주 행정을 이뤄낸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예요. 시대를 리드해온 개혁 정신의 산실이죠. 민주평화당은 호남 정신의 전국화로 진정한 개혁을 바라는 국민들과 함께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어요. 호남 정신은 동학농민혁명과 5·18민주화운동에서 보듯 불의에 저항하며 역사를 발전시켜온 위대한 시대정신이에요.

당 대표로서 올해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일은 무엇인지요.

개헌과 선거제도 개편 등 정치 개혁입니다. 호남 정신의 전국화는 개헌 헌법 전문에 동학농민혁명과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성을 명시하는 게 목표예요. 또한 패권 정치를 넘어 협치를 통한 생산적 정치는 다당제의 완전한 정착으로 가능해져요. 선거제도 등 정치 개혁이 필요한 이유죠. 당장은 당의 안정과 지방선거에서의 승리를 위해 노력할 겁니다.

차기 대선에도 도전할 계획입니까.

가장 어려운 질문이네요. 군인이면 장군이 되길 꿈꾸지 않을까요(웃음).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최악의 대통령으로 기록되고 있어요. 같은 여성으로서 기대도 있었지만 결국 국회에서 가장 먼저 탄핵을 주장해야 했죠. 여성의 입장에서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이에요. 큰 꿈을 꾸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지만 현실은 냉정해요. 민주평화당이 수권 정당의 면모를 갖추는 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흙수저’는 절대 ‘금수저’가 될 수 없는 세상이라며 좌절하는 청년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금수저, 흙수저라는 표현이 등장한 이후 청년에겐 더 이상 ‘미래’가 희망적인 단어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청년 세대는 절망적인 현재와 암울한 미래 사이에 끼어 일종의 ‘대기 상태’에 놓여 있다고 봐야 합니다. 현실의 절망이 치유되어야지만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당장의 현실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절망, 고통을 나누는 해법을 찾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청년들에게 절대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어요.

1 1977년 서울대학교 법학과 3학년생이던 반바지 차림의 조배숙 대표(맨 앞줄)가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집에서 찍은 가족사진. 맨 왼쪽이 아버지다. 

2 판사 시절의 조배숙 대표(왼쪽)와 강금실 전 장관. 

3 1995년 판사 퇴임 기념 사진.

photographer 조영철 기자 designer 김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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