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화문 고층 빌딩들 사이에 위치한 일민 미술관.
일민미술관 건물은 일제 문화통치기인 1926년 동아일보 사옥으로 처음 설립됐다. 당초 동아일보는 마땅한 사옥 없이 창업주이자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지낸 인촌 김성수 선생이 운영하던 종로구 화동 중앙학교 교사의 일부를 편집국으로 사용했다. 그러다 발행 부수가 증가하며 독립된 공간이 필요해졌고, 인촌 선생은 민족지의 염원을 담아 조선총독부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광화문 사거리에 사옥을 올렸다.
건물은 당시 서울에서 보기 드문 철근콘크리트 혼용 구조물(지하 1층~지상 3층)로 지어졌다. 외벽은 단아한 느낌의 테라코타 타일로 마감됐고, 이 시기에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내민창을 1층부터 꼭대기까지 수직으로 배치해 3층 건물임에도 더 높고 웅장해 보이는 효과를 냈다. 이처럼 근대적 세련미를 갖춘 건물을 조선인이 세웠다는 점에서 민족적 자부심이 크게 고양되기도 했다.
이후 건물은 시대 변화에 따라 증축과 리노베이션을 거듭했다. 동아일보 강제 폐간과 복간, 한국전쟁과 해방이라는 파고를 넘어 1958년 건물을 오른쪽으로 두 칸 확장했고 1962년에는 위로 두 층을 올려 지상 5층 규모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1963년 동아방송(DBS) 개국으로 늘어난 방송 시설과 장비, 인력을 수용하기 위해 1968년 다시 한 층을 더 수직 증축했다(지상 6층 규모).
동아일보 사옥으로 쓰이던 건물이 일민미술관으로 재탄생한 것은 1990년대다. 1992년 동아일보가 서대문구 충정로 사옥으로 옮겨가면서 1994년 일민문화관으로 새 단장했고, 1996년 일민미술관으로 승인받아 정식 개관했다. 일민이라는 명칭은 1949년부터 45년간 동아일보를 이끈 일민 김상만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인촌 선생의 장남인 일민 선생은 한평생 언론과 문화 발전에 이바지했다. 그가 생전에 수집한 고려·조선 시대 도자기와 서화, 근대 회화 등 일민컬렉션은 현재 일민미술관에서 소장·관리 중이다.

2002년 마지막 리노베이션 당시 설치한 오픈형 아트리움.
“한국의 과거, 현재, 미래 숨 쉬는 일민미술관”
일민미술관 건물은 2002년 마지막 리노베이션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1999년 광화문 동아미디어센터가 완공된 이후 일민미술관도 동아미디어센터와 맞닿은 오른쪽 출입구를 유리와 철제를 활용한 오픈형 아트리움으로 개조해 현대적인 감각을 더했다. 투명한 유리 벽을 통해 건물 내부와 광화문 거리가 소통하도록 했으며, 기둥과 불규칙한 천장 보 또한 그대로 드러내 건물의 전통 및 역사성을 강조했다. 일민미술관은 현재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돼 있다.일민미술관은 개관 이래 전시의 지평을 넓힌 혁신을 다수 선보였다. 특히 지난해에는 패션을 전시 영역으로 들여온 ‘시대복장’이 미술계와 패션계에서 동시에 화제를 모았다. 서울 기반의 떠오르는 패션 브랜드 지용킴(JiyongKim), 포스트아카이브팩션(PAF), 혜인서(HYEIN SEO)가 참여했으며 이들이 지향하는 디자인의 미학을 각각의 전시 챕터로 풀어냈다. 아이돌 그룹 라이즈(RIIZE)를 전시의 테마로 삼는 파격도 보여줬다. ‘고요와 파동 Silence: Inside the Fame’이 그것으로 성장하는 아이돌이 가진 불안과 두려움, 계속해서 도약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 등을 포착했다. 그 밖에 한국적 색채를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전시들도 진행했다. 2024년 국가유산청과 함께 국내 명승지와 한국 전통 조경의 구성 요소를 미디어 아트로 재현한 전시 ‘미음완보微吟緩步, 전통 정원을 거닐다’가 대표적이다.
김연희 국민대 행정대학원 미술관·박물관학과 교수는 “일민미술관은 실험적인 작가들을 발굴하고 혁신적인 기획을 선보이며 전시계에서 한발 앞선 방향성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왔다”면서 “억압적 시대 상황 속에서 싹튼 근대사의 자산이기에 장소적으로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효과가 있고, 그런 공간에서 현대와 호흡하는 도전적인 시도들이 이어진다는 것은 일민미술관에 한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모두 담겨 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일민 김상만 선생 내외

미술관 1층 로비

일민미술관은 1층부터 꼭대기까지 내민창을 수직으로 냈다.
일민미술관 기획전 ‘기.기.기: 동시대와 시행착오’
“100년 잔여물이 쌓아 올린 세계 속의 균열”
5월 일민미술관에서는 ‘기.기.기(奇.己.氣): 동시대와 시행착오’전이 열린다. 이번 전시는 연말까지 일민미술관 건축 100주년을 기념해 개최되는 릴레이 프로그램의 첫 순서다. 정상 범주를 벗어나는 기이함(奇), 의미가 고정되지 않아 혼란스러운 자기 자신(己), 불확정적이고 측정하기 어려운 분위기(氣)를 주제로 한다.전시는 1926년 화재로 폐허가 된 부지에 세워진 일민미술관 건물의 존재론적 의미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잔여물 위에 잔여물이 쌓이고 무엇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으며 무엇도 완전히 새로 시작되지 않는다’는 동시대에 대한 인식 속에서 잔여물로 구성된 세계의 균열과 삐걱거림, 불현듯 찾아드는 외부 감각에 주목한다.
전시는 매끈해 보이는 현실을 각성하고자 기어이 시행착오에 나서는 작가 7명의 작품을 한곳에 모았다. 이탈리아 출신 작가 아그네스 퀘스천마크는 MTF(Male to Female) 성전환 과정에서 마주하는 의료적 개입을 작품으로 풀어냈다. 영상 설치 작업물 ‘의료(수)술’은 의학이 설정한 정상 범주에서 결핍되거나 초과한 신체 일부를 수선하는 과정을 다루며 그를 감시와 권위, 통제라는 정치적 행위로 해석했다. 홍은주는 기계, 의료 등 발전하는 현대 기술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결핍을 비춘다. 그가 자신을 본떠 만든 마네킹 인형 ‘플레이어들’은 사람을 닮았지만 생명력이 없는 인형에 인형 같은 외모를 원하는 사람들의 욕망이 포개져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아그네스 퀘스천마크의 ‘의료(수)술’

홍은주의 ‘플레이어들’

‘기.기.기(奇.己.氣): 동시대와 시행착오’전 포스터
그 밖에 출처와 기능이 불분명한 물질을 엮어 개인의 흔들리는 감정을 표현한 유지오(조각 ‘스테잉’ 등), 중세 종교화 등에서 예술적 이념을 발굴하고 그 위에 새 유화를 덧칠해 완결된 사건의 오염과 변질 가능성을 실험한 캐나다 출신 작가 제니퍼 칼바료(회화 ‘건축과 풍경 속 수태고지’ 연작), 트로피 헌팅 같은 인간의 과오가 AI 시대에 어떻게 증폭되는지를 다룬 언메이크랩(영상 ‘망가진 트로피’), 허위의 스펙터클과 특별한 사건 없이 이어지는 분위기를 전시한 송민정(혼합 매체 ‘오렌지 카푸치노 구멍난 양말’)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기.기.기(奇.己.氣): 동시대와 시행착오’전은 5월 31일까지 이어진다. 관람료는 성인 9000원, 청소년 70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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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박해윤 기자 사진제공 일민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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