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지한 표정으로 이란 전쟁의 향방과 호르무즈 해협 긴장감을 논하던 김지윤 정치학 박사가 이곳에서는 20년 넘게 본전을 뽑고 있다는 자신의 캐멀색 막스마라 코트를 소개한다. 삼성전자에서 최연소 상무를 지낸 것으로 유명한 전은환 전 상무는 이곳에서 이탈리아 포시타노의 ‘인생 호텔’을 만나게 된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14만 구독자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는 유튜브 채널 ‘지윤 & 은환의 롱테이크’(이하 ‘롱테이크’) 얘기다.
30년 지기인 두 사람은 이 채널에서 매주 1시간 남짓 관심사와 취향에 관한 수다를 떤다. 먹는 것, 입는 것, 보고 읽고 듣는 것, 여행에 이르기까지 소재에 한계가 없다. 소위 말하는 ‘고급 취향’만 다루지도 않는다. 유니클로가 잘나가는 이유, 손종원 셰프의 매력처럼 대중성과 트렌디함도 놓치지 않는다. 이 채널에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여성들이 반응하고 있다. ‘50대 지식인 여성은 어떤 취향을 갖고 있을까’ ‘그 취향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를 궁금해하는 모습이다.
국제 정치 전문가인 김 박사와 베테랑 마케터인 전 전 상무는 대학 시절 전공 수업을 함께 들으며 친구가 됐다. 미니멀리스트와 맥시멀리스트, 기혼과 미혼, 비육식파와 육식파, 내향형과 외향형으로 정반대에 가까운 두 사람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다양한 주제로,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지는 상대는 서로뿐”이라고 입을 모은다. 최근에는 ‘롱테이크’의 연장선에서 두 사람이 아끼는 도시에 관한 책 ‘우리가 사랑한 도시’도 출간했다. 신간 출간 직후인 3월 중순 김 박사와 전 전 상무를 마주했다.
수많은 주제 중에 왜 ‘도시 기행’이었나요.
전은환(이하 전) | 사실 여기저기서 출간 제의가 많았는데, 지금까지의 저희 경험과 생각을 가장 잘 녹여낼 수 있는 게 도시 기행이었어요. 역사라든지, 미술이라든지요.
김지윤(이하 김) | 저희 둘 다 여행을 많이 다니고 좋아하는 도시도 많아요. 그중에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좋은 데 말고, 비교적 최근에 다녀와 요만큼이라도 업데이트가 이뤄져서 보는 분들에게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곳으로 8개 도시를 고르게 됐어요.
함께 여행도 종종 가나요. 여행 스타일은 잘 맞는지 궁금해요.
전 | 같이는 잘 못 다녀요. 지윤이는 아이들을 키우고 있고 저는 대학원을 다니다 보니까 아직은 일정 맞추기가 힘드네요. 더 나이가 들어야 가능할 것 같아요.
김 | 둘이 여행 취향은 달라요. 저는 나이가 들수록 스코틀랜드 트레킹 같은 몸 쓰는 여행을 하고 싶은데, 은환이는 들은 척도 안 하더라고요. 이쪽(은환)은 미술 애호가라 문화 여행, 마음의 양식을 쌓는 여행을 좋아해요(웃음).
‘롱테이크’ 구독자가 빠르게 늘고 있어요. ‘50대 여성 둘이 이렇게 풍성하게 대화할 수 있구나’라는 반응이에요.
김 | 아직도 지식, 교양 TV 프로그램이나 유튜브 채널의 패널 대부분이 40~50대 남성이에요. 거기에 여성 한 명이 구색 맞추기로 들어가는 식이죠. 제가 그동안 그 역할을 많이 했고요. 뭐라고 하는 건 아니지만 저는 은환이랑 30년 동안 친구로 지내면서 책, 역사, 음악, 미술, 트렌드까지 재밌는 얘기를 정말 많이 해왔단 말이죠. 그래서 ‘50대 아줌마들도 재밌는 얘기 많이 하는데?’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됐어요. 때마침 은환이가 퇴직하고 새 직장을 구하던 시기라 “어차피 놀잖아. 같이 해볼래?” 했던 거고요. 50대 여성들의 관심사가 좁다는 건 우리 편견일 수 있어요. 남편 은퇴, 자녀 교육·취직 같은 주제에만 관심 있고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저희 채널이 성장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죠. 어디서부터 관심사를 넓혀야 할지 모르는 분들이 많았던 것뿐이라고 생각해요. ‘롱테이크’가 ‘여기서 시작해도 되겠다’ 하는 장이 되는 것 같고요. 그 점이 저희가 ‘롱테이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유예요.

(여동118) “50대 아줌마는 관심사 좁을 거라는 생각, 편견이에요” ‘롱테이크’ 김지윤·전은환 신효정 동아닷컴 기자 hjshin@donga.com
“‘그 브랜드 왜 좋지?’ 전달하려 해요”
젊은 여성들은 왜 이 채널을 볼까요.김 | 제 생각에 20대, 30대라고 하면 인생이 좀 혼란스러운 시기란 말이에요. 늘 누군가에게 조언을 듣고 싶어 하죠. 그래서 각종 자기 계발 영상을 찾아다니다가 여기에 들어왔는데, ‘어? 이 사람들 50이 됐는데도 우리랑 비슷하네?’ 하고 동질감 내지는 안도감을 느끼지 않았나 싶어요(웃음). 진짜로 저희도 아직 헤매고 있거든요. 나름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이고 단단한 기준과 취향이 있는 것 같지만 여전히 삶에서 뭘 추구해야 할지 모르는 때도 많아요. 그런 부족한 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니, 거기서 공감대가 좀 형성되는 것 같아요.
브랜드의 역사와 철학에 관한 폭넓은 해설을 들을 수 있다는 점도 ‘롱테이크’의 인기 비결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전 | 관심이 가는 대상에 대해서 ‘시작이 뭐였지?’는 당연히 따라붙는 질문 같아요. 그걸 알았을 때, 뭔가 의미가 있었을 때 그 브랜드가 만들어내는 상품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하나를 사더라도 더 애착이 가거든요. 예를 들어 저희가 유니클로를 한번 다룬 적이 있어요. 이때 창업자 야나이 다다시의 창업 스토리, 철학을 모르면 유니클로가 그저 싸고 질 좋은 옷을 파는 단순한 브랜드로밖에 안 보여요. 하지만 다다시는 유니클로에 ‘럭셔리의 일상화’라는 아주 큰 야심을 담고 있거든요. 그것에 동의하기 때문에 제가 그 혁신 과정의 일부가 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거고요. 제가 삼성전자에 있을 때도 소비자에게 그런 느낌을 줘야 한다고 늘 생각했어요.
김 | 저는 브랜드에서 가장 흥미로운 게 기술이에요. 일전에 프랑스 실버웨어 브랜드 크리스토플을 소개했어요. 사람들이 럭셔리 제품에 대해 디자인의 정교함이나 아름다움에만 치중하는데, 사실 그건 기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나올 수 없거든요. 크리스토플도 전류를 흘려보내 은을 일정하게 도금하는 기술을 개발했기 때문에 그렇게 완성도 높은 실버웨어를 만들 수 있던 거예요. 값비싼 명품 시계도 별거 아닌 것 같지만 0.001초까지 정확히 시간을 맞추는 기술력을 갖췄기 때문에 지금까지 헤리티지를 유지하고 있는 거고요. 그래서 저도 단순히 ‘이 브랜드가 잘 팔린다’보다는 뒤에서 움직이는 테크놀로지의 역사를 꼭 소개하려고 하고, 그 과정이 아주 재밌어요.
세상에 단 하나의 브랜드만 남겨야 한다면 뭘 남기고 싶은가요.
전 | 어젯밤에 친구들과 와인 한잔하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했어요. 지윤이랑 제가 같이 아는 한 친구가 “너라는 브랜드를 남겨”라고 하더라고요(웃음).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세상 모든 게 사라지면 지킬 건 나밖에 없잖아요. 저는 어떤 물건을 살 때 무심하게 툭 내놓은 것 같지만 사실 그 밑에 굉장한 노력이 있었구나, 하는 것들을 좋아해요. 저라는 사람도 그렇거든요. 겉보기엔 편안하고 여유 있어 보이지만 사실 소심하고 쩨쩨하고 아등바등하는 면이 있어요. 매일 엄청나게 노력해서 잘 덮으며 살려고 하죠. 그런 저라는 브랜드가 좋아요.
김 | 크… 역시 제일기획! 동감입니다.
“실선 인간과 점선 인간, 시너지 나요”
서로 성향이 극과 극으로 갈리잖아요. 나와 다르지만 멋지다고 느끼는 지점이 있다면요.김 | 은환이는 물건에 정말 관심이 많아요. 좋은 의미로(웃음). 사실 저는 좋아하는 게 그렇게 많지 않아요. “대충 이 정도면 됐다” 하는 스타일이라 “이걸 써봤더니 너무 좋다” “이걸 꼭 먹어보고 싶다”의 영역이 별로 넓지 않죠. 사실 뭔가를 좋아한다는 게 다 관심이고 에너지거든요. 그래서 어느 날 ‘아 나는 은환이가 세상에 대해 가진 관심의 10분의 1밖에 없는 사람이구나’ ‘은환이는 지속적으로 그런 애정을 갖고 살아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부럽더라고요.
전 | 제가 보이는 것보다 물건을 더 많이 사들이는 걸 알고 지윤이가 엄청나게 놀라워했어요(웃음). 공부라는 명분하에 태그를 안 뗀 물건이 집에 이만큼 있죠. 대신에 파고드는 집중력은 약한 것 같기도 해요. 지저분한 제 방을 볼 때, 지윤이가 멋있게 산다는 생각도 많이 하고요. 그래서 저희가 시너지가 나나 봐요.
나만의 기준이나 취향을 만들기 위해 시도해보면 좋다 하는 것들이 있나요.
전 | 저희 둘은 사실 삶의 폭이 그렇게 넓은 사람들은 아니에요. 공부해서 대학 가고 회사 취직하고, 말하자면 엘리트의 길을 걸었죠. 그래서 젊었을 때 너무 방 안에서, 학교에서 모든 것을 학문적으로만 접근하지 말고 ‘한 달 살기’ 같은 것들을 거침없이 경험하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내 생각이나 취향이 틀에 너무 갇히기 전, 더 넓은 세상에 노출되고 넓은 시야로 받아들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김 | 나를 제일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아닌 것을 아는 것’인 것 같아요. 경계를 알아야 그 안에 있는 나를 알 수 있거든요. 전에 읽은 움베르토 에코 책에 이런 내용이 있었는데, 정말 마음에 와닿았어요. 타자가 누구인지 명확해져야 내가 규정되죠. 그러려면 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많은 실패도 하면서 ‘이건 나를 위한 거구나, 아니구나’ ‘이건 내가 좋아하는 거구나, 싫어하는 거구나’를 알아가야 하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나이가 들면 좀 편해지는 게 있어요. “너무 자기를 규정해버리고 그 안에서만 사는 거 아니야?”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그런 부분도 필요하죠.
채널명이 ‘원테이크’예요. 좋은 취향이란 ‘오래 바라본다’는 의미인가요.
김 |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이혼하고 슈퍼마켓에 장을 보러 가서 평소처럼 고기 한 덩이를 집은 거예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자기는 원래 고기를 안 좋아하는 사람인 거죠. 결혼 생활 동안 상대와 맞추기 위해 항상 고기를 사서 요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또 고기를 집어 들었던 거예요. 그걸 알아챈 순간 뭔지 모를 해방감을 느꼈다고 해요. 취향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뭐가 좋고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다만 아까 말한 것처럼 내게 가장 편안한 것, 내게 잘 맞는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나를 잘 아는 게 곧 좋은 취향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전 | 여기서도 저희가 좀 다른데(웃음), 저는 나와 내가 아닌 것의 바운더리가 실선이 아니라 점선이라고 생각해요. 외부의 것들이 많이 밀려들어 오고 또 제 것도 내보낼 수 있는 거죠. 물론 자기 심지는 필요하겠지만 늘 열려 있으면서 환경에 따라 자신을 변화해가는 것도 좋을 듯해요. 그래서 “취향이 어떻다” “뭐가 좋다, 싫다” 하는 의사 결정을 좀 미루면서 살아가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 | 저희가 이렇게 차이가 납니다. 실선 인간과 점선 인간이에요(웃음).
#김지윤 #전은환 #롱테이크 #여성동아
사진 지호영 기자 사진출처 ‘롱테이크’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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