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낮 동안 집에서는 베이비시터가 둘째를 돌보고, 그는 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며 틈틈이 3차례 유축을 한다. 퇴근 후에는 어린이집에서 로빈을 데리고 집으로 간다. 저녁 식사 후에는 아이와 블록 놀이 등을 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분 단위로 움직이는 바쁜 하루지만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모든 걸 혼자 해내야 한다’는 부담 대신 부모님, 베이비시터, 직장 어린이집의 도움 속에서 현실적인 육아 방식을 선택했다.
그는 남편 없이 출산을 결정한 ‘자발적 비혼모’다. 결혼 제도에 따르지 않고서도 아이를 낳고 기를 수 있다는 생각으로 덴마크 정자은행에서 정자를 기증받았다. ‘가족의 형태는 다양하다’는 메시지를 직접 삶으로 증명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크다. 현재 대한민국은 저출생 해법을 찾지 못한 채 불안한 미래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이샘나 씨의 사례는 어쩌면 지속 가능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해답일 수 있다. 그는 “비혼모라고 해서 모든 걸 혼자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움을 구하고 나누는 것도 함께 사는 또 다른 방식”이라고 말한다. “자발적 비혼모도 다른 엄마처럼 혼자 있는 시간을 몰래 즐기며, 아이가 커가는 모습에 뿌듯함을 느낀다. 더 늦기 전에 셋째도 낳고 싶다”고 말하는 이샘나 씨는 “완벽하진 않아도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고 밝혔다.

2025년 9월 열린 둘째 제로미의 백일잔치. 제로미 역시 덴마크 정자은행에서 정자를 기증받아 출산했다.
“둘째를 안 낳을 이유가 없었어요”
자발적 비혼모가 되겠다고 결정한 건 언제쯤이었나요.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게 아니라서 시기를 특정하긴 어려워요. 다만 2019년쯤, 결혼을 앞둔 친구를 축하해주는 모임에서 제가 “나 아이 낳을 거야”라고 말하는 영상이 남아 있더라고요. 그때부터 서른다섯 살 이전에는 꼭 아이를 낳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주위 반응은 어땠나요.
임신 계획을 처음부터 알고 있는 사람들은 아이돌 팬클럽 활동을 같이하는 친구들이었어요. 임신 소식을 듣고 걱정도 했지만 대부분 아낌없이 응원을 보내줬죠. 부모님께는 미리 알리지 않았고, 임신 19주쯤 됐을 때 처음 얘기했어요. 첫 말씀이 “그래서 지금 네 배에 아이가 있다는 거야?”였어요. 부모님이 많이 놀라실 것 같긴 했지만 한편으론 아이를 반겨주실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저희 부모님은 좋은 분들이시거든요. 제 예상대로 임신 기간 내내 잘 챙겨주셨어요. 용돈도 주시고요.
덴마크에서 인공수정 시술을 받았는데,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세요.
먼저 덴마크 정자은행 사이트에서 정자를 몇 개 골라뒀어요. 인터넷 검색을 통해 시술을 진행할 현지 클리닉을 정한 뒤 그곳에서 원격진료를 받았죠. 생리가 시작됐을 때 클리닉에 알리고, 한국에 있는 난임 클리닉을 내원해서 진료와 필요한 약을 처방받는 식이었어요. 시술 날짜가 잡힌 뒤 정자은행에서는 미리 정해둔 정자를 클리닉으로 배송했고, 저는 시술 날짜에 맞춰 덴마크로 날아가 시술을 받았어요.
처음 인공수정은 실패했다고요.
처음 시도는 실패였어요. 이후 검사를 해보니 자궁내막에 용종이 있었더라고요. 용종 제거수술을 받고 다시 인공수정을 시도했죠. 두 번째 시도에 임신이 됐어요. 임신 테스트기에선 음성으로 나와서 포기했는데, 생리를 하지 않아 다시 확인해보니 이미 임신 8주 차더라고요.
덴마크를 선택한 이유는 뭔가요.
한국에서는 비혼 상태에서 정자를 수증할 수 없어요. 덴마크 정자은행에서 정자를 한국으로 가져와 수증할 수도 없고요. 왜냐하면 산부인과 학회의 윤리 지침과 의사협회의 윤리 지침에서 수증 가능한 경우를 ‘부부’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정자 수증이 가능한 여러 나라 중에서 덴마크를 선택한 이유는, 제도가 잘 정비되어 있고 시술에 필요한 비용을 공개하고 있어서예요. 또 덴마크에 세계 최대의 정자은행이 있어서 배송료도 조금 아낄 수 있었고요. 가장 안전하고 경제적인 선택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둘째를 낳기로 결심한 계기도 궁금합니다.
첫째를 키워보니까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둘째를 낳아야 할 이유가 뚜렷하다기보다 낳지 않을 이유가 없었죠. 제가 미디어에 나선 이유 중 하나가 우리 아이들과 같은 과정으로 태어난 아이가 많아지면 사회가 우리 아이들을 더 편안하게 받아들일 것 같아서예요. 저와 같은 케이스가 늘어날수록 사회적 시선도 편해지지 않을까 싶어요. 결국 ‘나라도 하나 더 낳자’는 결론에 도달했죠.
출산 과정은 힘들지 않았나요.
아이가 커서 첫째를 낳을 때 제왕절개수술을 했어요. 제가 미주신경성 실신 증상이 있어요. 하반신 마취 후 아이가 태어나면 절개 부위를 봉합하기 위한 수면마취를 해야 하는데, 수술실에 눕자마자 바로 실신해서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못 봤어요. 둘째 때도 역시 실신해서 두 번 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을 직접 보지 못했어요. 다행히 출산 후 회복은 빨랐어요. 승부욕이 강한 성격이라 다른 산모들이 웃으면서 걸어 다니는 걸 보면 이름표에 적힌 수술 날짜를 몰래 보고 와서 더 열심히 운동하곤 했죠(웃음).

신기한 듯 동생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보는 로빈. 평소 로빈이 “만큼”이라는 말을 자주 해서 제로미의 태명을 ‘만큼이’로 지었다고.
아이 돌봄 ‘혼자’ 짊어지지 않아요
임신 전 가장 큰 두려움은 뭐였나요.정말 현실적인 문제였어요. ‘나이가 적지 않은데 아이를 키울 체력이 될까’ 하는 걱정이 가장 컸죠. 보통은 사람들의 시선이나 아이가 겪게 될 아빠의 부재 등을 생각하는 것 같은데, 저는 워낙 현재에 몰두하는 편이라 미래에 대한 걱정은 별로 하지 않았어요.
자발적 비혼모로 살아가면서 가장 큰 즐거움은 무엇인가요.
모든 엄마가 그렇듯이 아이가 커가는 것을 보는 그 자체는 정말 행복해요. 요즘 로빈이 잠자기 전에 “사랑해요”라고 말하면서 저를 껴안아줘요. 제로미는 다른 사람 품에서는 울다가 저에게 오면 모든 사람에게 너그러워지면서 방긋방긋 웃곤 해요. 이런 모든 순간이 즐겁고 행복합니다.
‘자발적 비혼모’라는 호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 정도면 꽤 잘 만든 호칭이라고 생각해요. 이전에 사용하던 ‘미혼모’라는 단어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상태의 엄마’잖아요. 언젠가 결혼할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든 단어 같아요. 저는 결혼 제도에 비판적이진 않지만, 결혼으로 이루어진 가정만을 지향하며 살지도 않아요. 그저 행복한 가정,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지향하죠. 이렇게 아이를 둘이나 낳고 이 사실을 알리고 살아가는데, 아직도 저의 결혼을 위해 기도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저를 미혼모로 바라보고 있다는 거죠. 하지만 저는 미혼모가 아니라 비혼모예요. 그런 의미에서 자발적 비혼모는 아이를 가진 저의 상황과 선택을 왜곡하지 않은 호칭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육을 엄마 혼자 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을 것 같은데요.
저 혼자 다 짊어지고 있지 않아요. 부모님, 동생, 친척들, 교회 공동체, 직장 동료들이 있거든요. 로빈이 봐주시는 분이 어느 날 출근길에 교통사고가 나서 갑자기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었던 적이 있어요.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데리고 출근했는데, 부원장님과 간호부장님이 아이와 잘 놀아주셨어요. 병원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잠깐 맡아주시기도 했고요. 아이를 키우다 보면 엘리베이터에 유모차를 밀고 들어가면서 양해를 구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어요. 사실 저는 도움을 요청하는 걸 어려워하는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도와달라는 부탁이 오히려 가족이나 공동체의 결속력을 더 키워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열심히 도움을 청하고 다닙니다. 뻔뻔스럽지만 그만큼 더 겸손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이런 공동체의 범위가 가족, 직장, 교회를 넘어서 지역사회와 국가로 확장되면 좋겠어요.

비혼 출산 합법화된 나라에서 셋째까지!
자발적 비혼모로서 사회적 제도 개선을 위해 바라는 것이 있다면요.결론적으로는 비혼 출산과 인공 생식술에 대한 법률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안에 국내 정자은행을 활성화하고 실용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조치도 포함돼야 하죠. 그래야 해외 정자은행과 난임 클리닉이 아닌 우리나라의 질 좋은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으니까요. 비혼 독립출산을 계획하는 가정뿐 아니라 정자은행을 이용하고자 하는 난임 부부에게도 좋은 일이 될 거예요. 이러한 법안이 발의되는 등 정부의 움직임이 있다면 저출산 극복을 위한 그 어떤 캠페인보다도 강한 해결책이 될 거에요.
10년 뒤 가족의 모습을 어떻게 그리고 있나요.
셋째까지 무사히 낳아서 4명의 가족이 돼 있으면 좋겠어요. 저는 아이들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하고 있지 않을까요? 여름방학 땐 세 아이와 함께 어디로 놀러 갈지 고민도 하고요. 혼자 아이 셋을 데리고 가려면 힘들 테니까, 그때도 같이 여행 갈 친구나 가족을 물색하고 있을 것 같네요. 또 겨울이 되면 가족사진으로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들어서 고마운 분들께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어요.
자발적 비혼모를 선택하려는 누군가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요.
‘비혼 가정을 꾸릴까? 말까?’ 고민 중이시라면 신중하게 결정하기를 바라요. 하지만 시기를 조율 중이라면 다른 것 따지지 말고 하루라도 젊을 때 진행하세요.
#자발적비혼모 #정자기증 #여성동아
사진제공 이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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