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년 전 여러 매스컴에 출연해 사법시험 합격 소감을 전한 박지원 씨. 1992년생으로 당시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던 그는 2012년 객관식, 주관식, 면접으로 이뤄진 제54회 사법시험을 만 20세에 모두 단 한 번에 패스한 ‘역대 최연소 합격자’다. 당시 언론은 박 씨를 ‘어린 천재’라고 칭하며 성공한 인생을 장담했다. 박 씨는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2016년 만 24세의 나이에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법률사무소에 입사했고, 억대 연봉에 빠르게 승진하며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로펌 2년 차였던 2017년 사법연수원에서 만난 9살 연상 남편과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2020년 첫 아들을 출산하며 안정적인 생활을 이루던 박 씨에게 방황이 찾아온 건 서른 살이 되던 해였다. 말 잘 듣는 장녀, 전교 1등, 명문대 졸업에 변호사까지, 엘리트 코스만 밟아왔지만 정작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해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다. 박 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너무 혼란스러웠다”고 말한다. “왜 변호사 일을 하고 있는지, 이 일을 통해 즐거움을 느낀 적이 있는지 오랜 시간 고민했다”고.
우울감과 후회로 힘든 시간을 보내던 박 씨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건 2021년 로펌에서 우연히 만난 통역사 덕분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언어를 정말 좋아했지만, 좋아하는 것이 직업이 될 순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교수 아버지에 교사 어머니까지, 학구열이 남다른 집안에서 자란 박 씨는 “집과 학교를 오가며 부모님이 원하는 인생을 살아왔던 것 같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던 와중에 평소 자신이 좋아하는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이를 업으로 삼는 통역사를 보곤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통역사가 2~3시간 동안 영어를 정확하게 쏟아내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진짜로 원했던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순간”이었다고 한다.
결국 박 씨는 지난해 2월 김앤장에 사표를 내고 그해 3월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에 입학했다. 현재 그는 단정한 오피스 룩 대신 청춘의 상징인 ‘과잠’을 입고 제2의 인생을 준비해나가고 있다. 만 3세, 5세의 남자아이 둘을 키우며 학업과 육아, ‘지원피셜’이라는 일상 유튜브까지 병행 중인 박 씨는 “정신없고 힘들 때도 있지만 선택을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마이 웨이’의 삶 덕분에 인생이 더욱 충만해졌다”며 웃었다.
요즘 일과는 어떤가요.
날마다 다른데, 보통은 아침에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오전 10시쯤 학교에 가요. 하루에 2시간짜리 수업을 2개 정도 들은 뒤 2시간 스터디를 하고 귀가하죠. 집에 도착하면 거의 저녁 시간이에요.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저녁을 먹고 폴 댄스 학원에 가요. 1시간 운동하고 집에 온 뒤 씻고 아이들이랑 시간을 보내죠. 아이들이 자면 조금 더 공부하거나 유튜브 편집을 하고 새벽 1시 정도에 잠이 들어요. 매시간을 효율적으로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육아, 공부, 영상 촬영 등을 모두 해내려면 시간 관리가 중요하겠어요.
은연중에 몸에 배어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잠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요. 불면증도 있고, 잠이 부족하면 삶의 질이 금방 떨어지거든요. 그래서 졸리면 무조건 잡니다. 학생 때도 그랬어요. 졸면서 공부하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건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대신 푹 자고 일어난 뒤 주어진 시간 안에서 집중력 있게 공부했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스스로 시간을 깊이 있게 보내는 방법을 깨닫고 난 후부터는 효율성을 따지게 된 것 같아요.
서울대 입학에 최연소 사법고시 합격까지, 공부 방법이 궁금합니다.
머리가 엄청 좋거나 특별한 재능이 있진 않아요. 공부를 즐기는 타입도 아니고요. 대신 저는 무슨 일이든 끝까지 끈기 있게 해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성취욕도 강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하고요. 이런 성향이 좋은 성적을 받는 데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부모님이 공부를 굉장히 강조하셨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TV처럼 공부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은 완전히 차단하셨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때까지 약간은 통제된 환경에서 학교와 집을 오가며 공부만 했습니다. 그때는 공부가 제 인생의 전부였어요.
어렸을 때 꿈은 무엇이었나요.
꿈이 없었어요. 제가 무엇을 좋아하고, 뭘 하고 싶은지 전혀 몰랐으니까요. 그래서 결국 부모님의 꿈이 미래가 됐죠. 사실 부모님께서는 의사가 되길 바라셨어요. 그런데 제가 수학을 잘 못 해서 문과 쪽으로 진로를 바꾸자 부모님은 판사를 권하셨죠. 당시 저는 부모님께 순종적인 편이었어요. 또 자식이 잘못되길 바라는 부모는 없다는 마음에, 그 뜻을 이어받아 사법고시를 준비했죠.

틀에 짜인 안정적인 삶에서 벗어나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찾아 새로운 꿈을 꾸고 있는 박지원 씨. 두 아이에게도 쿨한 엄마다.

부모님 뜻에 끌려다닌 꿈이 없는 아이
수능과 사법시험은 공부의 스케일이 다르지 않나요.하늘과 땅 차이예요. 수능은 친구들과 다 같이 공부하기 때문에 외롭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 또 합격, 불합격이 아닌 성적에 맞춰 대학을 가잖아요. 쉽게 말하면 수능은 플랜 B·C를 만들어놓을 수 있지만, 사시는 불합격하면 모든 게 끝난다고 생각하니 초조하고 불안하더라고요. 또 서울에서 혼자 생활하며 학교 친구들과 클럽도 가고, 밤새 술도 마시는 등 세상에 재미있는 것이 많다는 걸 알아버렸거든요. 그걸 모두 포기하고 다시 공부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게 너무 답답했죠. 그래도 ‘어차피 해야 할 거라면 빨리 끝내자’는 생각에 더 악착같이 사시 공부를 했어요.
1년 4개월 만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는데, 비결이 뭐였나요.
‘무조건 붙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지긋지긋한 시험공부를 빨리 청산하고 싶었거든요. 또 저는 무언가 결심한 일을 해내지 못했을 때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는 성격이에요. 시험에 떨어져 괴로워하고 있을 제 모습을 상상하는 것 자체로도 괴로웠죠. 그래서 ‘나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은 오로지 공부에만 집중하자’는 마음으로 정말 열심히 했어요. 물론 쉽지 않았어요. 벽돌만 한 책을 거의 다 외워야 하니까 미치겠더라고요. 내용도 너무 어렵고요. 그럴 때마다 ‘떨어지면 어떡하지?’ ‘죽고 싶다’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고 포기를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해온 것들이 너무 아까웠거든요. 또 일단 시작한 이상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는 의지가 강했고요. 그때는 제 몸을 이루는 모든 세포가 합격으로만 향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더욱 공부에만 전념했고, 빨리 합격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법시험 합격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뭔가요.
시험을 치르고 다음 날 눈뜨자마자 신림동 일대를 돌며 카페 아르바이트를 알아봤어요. 1년 4개월 동안 책상에 앉아 오로지 공부만 해서 활동적인 생활이 그리웠거든요.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면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돈까지 벌 수 있으니 안 할 이유가 없었죠. 아르바이트를 쉽게 구할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호기롭게 구인 공고가 붙은 카페들을 돌아다녔는데, 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모두 거절당했어요. “정말 열심히 할 수 있다”고 어필해도 받아주질 않더라고요. 그렇게 며칠을 돌아다니다 무경력자를 뽑는 카페를 찾아냈고, 바로 입사 원서를 넣어 약 6개월 동안 일을 했죠. 그 후에는 영국으로 교환학생을 다녀왔어요. ‘해리 포터’를 너무 좋아해서 영국에 대한 로망이 있었는데 운 좋게 교환학생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거든요. 6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때가 제 인생의 리즈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사법시험에 합격한 상태에서 그간 하고 싶었던 것들을 모두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꿈만 같은 1년의 시간을 보낸 뒤 사법연수원을 거쳐 김앤장에 입사하게 됐어요.
당시엔 대형 로펌에 입사하는 게 궁극적인 목표였나요.
꼭 그렇진 않아요. 판검사와 변호사 중 선택을 할 수 있었는데, 저는 변호사가 적성에 더 맞는 것 같았어요. 사실 부모님은 판사가 되길 원하셨어요. 그러려면 3년간 재판연구원(로 클러크·법관의 재판 업무를 돕는 일을 수행하는 전문 임기제 공무원) 경력을 쌓아야 했는데, 어차피 바로 판사가 되지 못할 바에는 ‘멋지게 변호사 일을 하면서 돈을 벌자’는 생각이 강했어요. 솔직히 그때는 별생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주체성이 없는 평범한 만 스물네 살이었거든요(웃음).
변호사 생활은 어땠나요.
초반에는 정말 힘들었어요. 로펌 특성상 일단 들어가면 전문 분야 없이 주어진 일들을 닥치는 대로 처리해야 하거든요. 또 뉴스에 나올 법한 형사사건은 급박하게 돌아가요. 이런 사건을 맡았을 때는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일했던 것 같아요. 회의를 1시간 정도 하고 오면 메일이 30개씩 쌓여 있고, 새벽 2시에 잠들어 아침 7시에 일어나면 메일 100개 정도가 와 있었죠. 말 그대로 밤낮없이 일만 했어요. 당시 생각했던 게 로펌은 마음이 여유로운 사람에게 잘 맞는 직장이라는 거예요. 주위를 봐도 ‘어차피 몸은 하나고 시간은 정해져 있으니 안 되면 내일 하자’는 마인드를 지닌 사람이 몸과 멘털을 건강하게 지키며 롱런하더라고요. 반면에 저는 일을 제때 처리하지 않으면 잠을 못 자는 스타일이에요. 핸드폰 메시지도 확인하면 바로 답장해야 하고, 다음 주까지 써도 충분한 서면을 그 전에 즉시 처리해놓아야 마음이 편했죠. 거의 2년 동안은 스스로를 괴롭히며 힘든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요. 그 후 조세라는 전문 분야가 정해졌고, 입사 6년차였던 2021년 둘째를 임신하면서 조금 여유가 생겼죠. 특히 같은 팀원들이 많이 배려해주셨어요. 선배 변호사님께서 만삭 때 업무 부담을 줄여주시거나, 밤을 새워야 하는 큰 사건들은 가급적 덜 주시는 등 업무 부담이 가중되지 않도록 도와주셨어요. 제 인생에서 무척 고마운 분들이죠.
안정적인 로펌을 그만두고 통번역대학원을 선택한 계기는요.
어렸을 때부터 언어를 정말 좋아했어요. 국어는 항상 전교 1등이었고, 중학교 때 미국에서 1년 정도 살다 오면서 영어가 확 늘었던 것 같아요. 고3 때까지 영어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아도 상위권을 유지할 수 있었죠. 수능도 만점이 나왔고요. 대학교 때는 심심풀이로 중국어 교양수업을 몇 개 들었는데, 너무 재미있었던 기억이 나요. 하지만 언어를 입시나 장래 등과 연관 짓진 못했어요. 단지 좋아하는 별개의 영역이라고만 여겼죠. 그러다 로펌에서 조세 업무를 보는 과정에 통역사님을 접하게 됐는데, 그때 적잖은 충격을 받았어요. 통역사는 제가 너무 좋아하는 영어를 날마다 구사하면서 돈까지 벌 수 있잖아요. 또 통역이 끝나면 그 길로 바로 업무가 종료된다는 점도 매력적이었어요. 그렇다고 당장 변호사를 그만둔 건 아니에요. ‘이 직업을 조금만 더 일찍 알았다면 참 좋았을 텐데’ ‘나도 꽤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면서 아쉬워만 했죠.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나’ 중심의 삶
통번역대학원은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했나요.둘째를 임신하면서요. 로펌에서 6~7년 차쯤 되면 복지의 일환으로 유학을 보내주는 제도가 있었어요. 당시 저는 임신한 상태여서 외국에 갈 수 없어 6개월 정도 그냥 쉬겠다고 했죠. 로펌에서는 너무 아까운 기회이니 영어학원이라도 다니라고 권하시더라고요. 학원비는 로펌에서 부담하겠다고요. 그래서 인터넷에서 광화문 영어학원을 검색했는데, 순간 소름이 돋았어요. 통번역대학원 입시학원이 떴거든요. 당시 서울에 통번역대학원 입시학원이 4개 있었는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제가 검색하자 관련 학원이 나열되더라고요. 사실 그 전까지는 통번역 입시가 있는지도 몰랐어요. 통역사라는 직업에 대한 선망은 있었지만 제가 이룰 순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모니터 화면에 뜬 ‘통번역대학원 입시학원’이라는 문구를 보자 심장이 빠르게 뛰더라고요. ‘어쩌면 나도 통역사를 할 수 있겠구나’라는 기대와 희망이 솟아났거든요. 바로 관련 학원에 전화했고, 7개월 뒤에 통번역 입학시험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죠. 그때가 3월이었어요. 시험은 10월 말이었고, 복직은 12월로 예정돼 있었죠. 공부할 시간이 많진 않았지만 ‘무조건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거의 사법고시 때처럼 공부했어요. 둘째를 출산한 뒤에는 인터넷 강의를 하루에 3개씩 들었죠.
수능과 사법시험, 통번역 입시까지 지겹진 않았나요.
사실 수능, 사법시험은 스스로 정한 목표를 위한 공부가 아니었어요. 부모님의 꿈을 이뤄드리기 위한 관문이었죠. 반면에 통번역 입시는 태어나 처음으로 스스로 정한 목표였어요. 공부하는 시간이 재미있고 즐겁게 느껴졌죠. 성취감도 더 컸고요.
시험 합격 후 로펌은 바로 그만둔 건가요.
아니요. 예정대로 12월에 로펌에 복직한 뒤 1년 더 다녔어요. 솔직히 최연소 사법고시 패스와 변호사, 김앤장 등 가지고 있는 타이틀을 버리기가 아까웠거든요. 원래는 11월에 통번역 입시 결과가 나와 합격하면 다음 해 3월 대학원에 입학하려 했는데, 도저히 결론을 못 내리겠더라고요. 알아보니 대학원 등록 후 1년 휴학을 할 수 있어서, 1년 동안 로펌에 다니며 다시 한번 고민해보자고 생각했죠. 휴학 마지막 날을 디데이로 잡고 매일 고민했어요. 이렇게 좋은 직장을 나오는 게 맞는지, 가끔 현타가 오기도 했거든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통번역 공부를 안 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더라고요. 또 현실 때문에 어렵게 찾은 꿈을 눈앞에서 놓치는 건 비겁하다고 느꼈어요. 그해 연말에 대학원 입학을 확정 짓고 퇴사를 결심했어요. 지금까지 그때의 선택에 전혀 후회는 없고요.
퇴사를 결정했을 때 가족들 반응은 어땠나요.
남편은 전적으로 제 의견을 존중해줬어요. 평소에도 제가 하고 싶은 일에 반대하지 않고 인정해주며 저를 있는 그대로 봐주거든요. 무얼 하든 너무 훌륭하다며 응원해주죠. 표현은 잘 못 하지만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부모님께는 퇴사 이야기를 아직 못 했어요. 요즘 거의 연락을 안 하거든요. 대학원 입학도 아마 SNS를 통해 아셨을 거예요. 제가 로펌을 퇴사하겠다고 했을 때 크게 반대하셨어요. 대학원에 입학하기 전까지 저는 줏대가 없었어요.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학생이어서 싸울 일도 없었죠.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라요. 과거에는 부모님께 인정받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면 지금은 저 자신이 진짜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애쓰고 있어요. 그게 진짜 행복이라고 믿고요. 현재 부모님과 소원한 관계가 너무 안타깝고 서럽지만 언젠가는 제 마음을 이해해주실 거라 믿어요. 그날을 위해 더욱 열심히 공부할 거고요.
집에서는 어떤 엄마인가요.
쿨한 엄마요(하하). 아이들보다는 저 자신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하다”는 말을 전적으로 믿어요. 아이는 엄마의 감정을 항상 예민하게 관찰하거든요. 엄마가 짜증 나거나 화나 있을 때 아이들이 눈치를 보는 상황은 성장 과정에도 영향을 준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억지로 기쁜 척, 즐거운 척할 순 없잖아요. 아이들에게 진짜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려면 무얼 해야 하나 고민해봤더니 저만의 시간을 갖는 거였어요. 이를 위해 폴 댄스를 가거나 혼자 공부하는 시간을 갖는 등 매일 짧게라도 저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어요. 또 아이들에게 무엇이든 절대 강요하지 않아요. 스스로 원하는 걸 찾아서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 역할을 하죠. 다양한 것을 자연스럽게 접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많은 기회를 주려고 노력합니다. 저는 항상 아이들에게 “불법이 아니라면 네가 뭘 하든 항상 지지하고 응원해줄 거야”라고 말해요. 사회나 주위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본인이 원하는 걸 잘 찾아가는 것이 진짜 성공이라고 생각하거든요.
10년 후 어떤 모습이길 바라나요.
개인적으로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바쁘게 살고 싶어요. 사실 제가 10년 후에 통역사를 하고 있을지 장담할 순 없어요. 통역 일이 저와 맞지 않아서 다시 로펌으로 돌아갈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어떤 일이든 타인의 강요가 아닌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하고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더불어 아이들에게는 요리 잘하는 엄마가 되고 싶어요. 아이들이 원하는 음식을 레시피 없이도 뚝딱 만들어주고 싶은 로망이 있거든요. 또 올해 말 셋째 임신을 계획 중인데, 꼭 성공해서 행복한 다섯 가족을 꾸리고 싶어요(웃음).
#사시최연소합격 #여성동아
사진 조영철 기자 사진제공 박지원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