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YLE

얼룩진 소매·찢긴 봉제선… 낡아서 더 아름다운 패션

안미은 프리랜서 기자

2026. 06. 04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인간적인지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다.
패션 역시 얼룩과 주름, 해진 흔적처럼 한때는 감춰야 할 결점으로 여겨졌던 모습이 이제는 가장 솔직한 스타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놈코어, 블록코어, 발레코어, 포엣코어…. 수많은 ‘코어(core)’ 트렌드가 범람하는 패션계에 또 하나의 강력한 트렌드가 등장했다. 이름하여 더티코어(dirty core).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밴 다소 지저분한 차림의 옷들이 런웨이를 오르내리며 기존의 ‘정돈된 럭셔리’에 반기를 들고 있다.

최근 프라다의 F/W 컬렉션만 봐도 알 수 있다. 얼룩진 셔츠 소매와 흙먼지가 내려앉은 싯누런 코트 자락, 갈기갈기 뜯긴 스커트 밑단과 심하게 마모된 굽의 옥스퍼드 슈즈가 연이어 등장해 혼란을 부추겼다. 특히 군데군데 덧댄 수선 자국과 해진 밑단이 그대로 드러난 아우터들은 불완전함을 포용하는 더티코어의 정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런웨이에 막 오른 새 옷이라기보다 오랜 세월 대물림된 유물처럼 느껴질 정도다. 쇼가 후반부로 향할수록 관객들은 어느새 완벽하게 차려입기보다 결점을 드러내는 스타일에 더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불확실한 시대에 더욱 환영받던 더티코어

물론 더티코어가 완전히 새로운 흐름만은 아니다. 패션의 역사를 돌아보면 경기 침체나 정치적 혼란 같은 불확실한 시기에는 늘 어딘가 흐트러진 미학이 함께 등장했다. 그 기저에는 기존 질서와 관습을 의심하고 거부하려는 반항적인 태도가 깔려 있다. 1970년대 정치·사회적 불안 속에서 등장한 펑크 패션은 찢어진 티셔츠와 헝클어진 헤어, 의도적으로 망가뜨린 스타일링으로 저항했고, 1990년대 경기 침체기에는 낡은 그런지 패션이 부상하며 오래된 체크 셔츠와 해진 데님, 바이커 재킷이 젊은 세대의 유니폼이 됐다. 당대 전설적인 록 스타 커트 코베인은 빈티지 티셔츠에 올리브색 카디건과 낡은 패치워크 데님 팬츠 차림으로 무대를 장악했고, 슈퍼모델 케이트 모스는 슬립 드레스에 바이커 재킷을 무심히 툭 걸친 룩으로 그런지 패션을 대중문화 한가운데로 끌어들였다. 

럭셔리 하우스 역시 지난 수십 년 동안 전통적인 규범에 끊임없이 균열을 내는 시도를 해왔다. 비비안웨스트우드는 남성의 테일러링을 비틀어 주목받았고, 해체주의 정신의 선구자 레이가와쿠보는 비대칭 재단과 실루엣, 미완성처럼 보이는 마감으로 불완전함의 미학을 하이엔드 패션으로 끌어올렸다. 스니커즈 브랜드 골든구스 역시 처음 등장했을 당시 “더럽고 비싼 운동화”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오래 신을수록 멋지다’는 빈티지 감성을 내세운 집요한 브랜드 철학으로 이제는 하이엔드 스니커즈 시장을 대표하는 브랜드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낡음 속에 담긴 인간적인 매력에 주목

오늘날의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인공지능이 단 몇 초 만에 완벽한 영상과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AI 시대에 설 곳을 잃은 디자이너들은 오히려 인간적인 흔적과 실수, 불완전함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번 시즌 런웨이 곳곳에서는 그런 움직임이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MM6메종마르지엘라의 가죽 재킷은 흙먼지를 뒤집어쓴 듯 거칠게 바랜 표면과 군데군데 벗겨진 질감으로 마치 오랜 시간 험한 환경을 견뎌낸 물건처럼 다가왔다. 잘 관리된 새 가죽 특유의 매끈함 대신 닳고 해진 흔적을 전면에 내세우며 낡음 자체를 하나의 미학으로 끌어올렸다. 아크네스튜디오는 거칠게 마모된 데님 팬츠에 페인트 자국처럼 번진 워싱과 찢긴 봉제선 디테일을 더해 막 작업실에서 나온 듯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여기에 몸에 딱 붙는 화이트 슬리브리스 톱을 매치해 완벽하게 계산된 럭셔리 대신 어딘가 어긋난 현실감을 강조했다. 샤넬 역시 전통적인 럭셔리 코드에서 한 발짝 비켜섰다. 소매와 밑단의 올을 일부러 풀어낸 트위드 코트는 하우스 특유의 단정함을 의도적으로 무너뜨린다. 특히 너덜너덜한 소매 아래 속이 훤히 보일 정도로 구겨 쥔 백 연출이 압권이다. 값비싼 백을 애지중지 들기보다 아무렇게나 움켜쥔 모습에서 묘한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졌다. 



디스트로이드 디테일로 더티코어를 한층 적나라하게 밀어붙인 브랜드들도 있다. 일례로 코치는 그간 브랜드를 대표하던 단정한 무드에서 벗어나 날카로운 것에 긁혀 해진 듯 구멍이 난 니트 톱과 올 풀린 티셔츠를 레이어드해 반항적인 무드를 극대화했다.

불완전해서 더 아름다운 패션 

다가올 F/W 시즌에도 불완전하고 아날로그적이며 삶의 흔적이 담긴 것들에 대한 갈망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일례로 디젤은 ‘Dirty Stop Out’을 콘셉트로 내세우며 밤새 클럽과 거리를 배회하다 아침이 되어서야 돌아온 사람들의 흐트러진 차림을 컬렉션 전반에 녹여냈다. 음료를 쏟은 듯 얼룩진 벨벳 촉감의 데님 셋업과 군데군데 색이 벗겨진 코트, 빛바랜 퍼 부츠로 지나치게 말끔한 럭셔리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 것. 정돈되지 않은 헤어와 지친 기색의 메이크업이 더해지자 컬렉션 특유의 퇴폐적인 분위기도 한층 짙어졌다. 메종마르지엘라는 더 나아가 완벽함이라는 개념 자체마저 없애버렸다. 쇼의 엔딩을 장식한 거대한 드레스에는 먼지와 얼룩이 켜켜이 쌓인 듯한 프린트가 가미됐고, 밑단은 생가죽처럼 마감되지 않은 채 미완성 그대로 남겨두었다. 여기에 얼굴 전체를 얇은 베일로 감싼 마스크 연출까지 이어지며 디지털 시대의 익명성과 공허함을 떠올리게 했다. 낡고 빛바랜 가죽 피스를 활용한 더티코어 스타일도 두드러졌다. 미우미우는 세월의 흔적을 감쪽같이 입힌 크랙 장식의 가죽 미니드레스로 시선을 끌었고, 앤드뮐미스터는 패치워크 기법으로 기워낸 스웨이드 스커트와 웨스턴 부츠, 빅 벨트로 자유로운 보헤미안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런가 하면 로베르토카발리는 거칠게 찢어낸 레이스 시스루 톱으로 날 선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지금 자신의 결과물이 얼마나 인간적인지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급변하고 있고, 미래가 불확실할수록 완벽함은 오히려 설득력을 잃는다. 그런 점에서 더티코어는 단순한 유행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본래라면 감춰야 할 얼룩과 주름, 낡고 해진 흔적들을 전면으로 끌어내며 알고리즘으로는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현실감과 진정성을 드러낸다. 어쩌면 그래서 더 묘한 안도감을 받는지도 모르겠다. 앞으로는 셔츠 소매 끝에 커피 얼룩 하나쯤 남아 있어도 굳이 민망해하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게 소매를 걷어 올리며 말할 테니까. “아, 이거요? 프라다인데요.”

#더티코어 #빈티지패션 #여성동아

기획 강현숙 기자 사진제공 디젤 로베르토카발리 메종마르지엘라 미우미우 샤넬 아크네스튜디오 앤드뮐미스터 코치 프라다 MM6메종마르지엘라 사진출처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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