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16년 론칭한 김해김은 올해로 브랜드 설립 10주년을 맞는다. 김해김은 매 시즌 파리 패션위크를 통해 컬렉션을 선보여왔는데, 얼마 전 3월 파리 패션위크 주간에는 프랑스 파리 현대미술관 ‘팔레 드 도쿄’에서 지난 10년의 디자인을 집약한 컬렉션 ‘ENTER THE SPECTRUM’을 진행했다. 조형적 헤어 장식과 절제된 윤곽이 돋보이는 의상으로 시작해 점차 정교한 재단과 장식 요소가 더해진 의상들이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특히 이번 파리 쇼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원하고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주관하는 ‘컨셉코리아’의 일환으로, 3월 2일에는 단독 쇼를 펼치고 다음 날은 다른 국내 브랜드들과 함께했다. 일종의 한국 패션 국가대표로 발탁된 셈이다. 파리 패션위크 쇼를 성공적으로 마친 김해김의 김인태 디자이너를 서면으로 만났다.
“우리는 모두 예술 작품이에요”
평소 어디에서 지내나요.저는 서울과 파리를 오가며 지냅니다. 서울에는 브랜드의 아틀리에와 팀이 있고, 파리에는 쇼와 세일즈 쇼룸이 있거든요. 지금 이 답변은 서울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작성하고 있어요. 패션위크가 끝난 직후라 조금은 고요하게 지난 몇 주 동안의 일들을 천천히 정리하는 마음으로 답하고 있습니다.
이번 파리 패션위크에서 총 몇 벌의 옷을 선보였나요.
이번 시즌 파리에서 약 40벌의 룩을 선보였어요. 컬렉션 하나를 준비하는 데는 보통 6개월 정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축적된 생각과 감각들이 모여 하나의 시즌으로 나타나요. 특히 이번 컬렉션은 브랜드 1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기도 해서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과정이 함께 있었어요. 감정적으로도 꽤 긴 여정이었습니다.

지난 3월 2일 파리 쇼에서는 브랜드 설립 10주년을 축하하는 깜짝 이벤트가 열렸다.
10년이라는 시간을 지나면서 브랜드의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바라보게 됐어요. 사람들은 늘 더 특별해지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편안함도 원하고, 새로운 것을 향해 가면서도 과거의 감정들을 놓지 못하잖아요. 그런 다양한 감정과 욕망이 하나의 스펙트럼처럼 존재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번 컬렉션의 제목을 ‘ENTER THE SPECTRUM’이라고 정했어요. 또 하나 중요했던 생각은 “우리 모두가 예술 작품이다”라는 메시지였는데요. 패션쇼는 옷을 보여주는 자리기도 하지만 결국 사람에 의해 완성되는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김해김을 입는 사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 그 공간에 있는 모든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하나의 작품이 되는 순간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이번 패션위크 기간 접한 현지 반응 중 기억에 남는 평가가 있다면요.
쇼가 끝난 후 한 에디터가 “당신의 컬렉션은 점점 더 조용해지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더 깊어지고 있는 것 같다”라고 해준 말이 기억에 가장 남아요. 디자이너로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것을 보여주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불필요한 부분들을 덜어내며 본질에 가까워지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거든요.
런웨이만큼 궁금한 곳이 백스테이지인데요. 아찔했던 순간이 있었나요.
패션쇼 백스테이지는 늘 작은 소용돌이 같은 공간이에요. 하지만 오랜 기간 숙련된 어시스턴트들이 도와줘서인지 이번 쇼 백스테이지는 꽤 수월했어요. 아, 작은 실수가 있을 뻔하긴 했어요. 한 모델이 나가기 바로 전 칼라가 잘못 놓인 상태임을 발견했는데, 헤어 아티스트 팀의 한 멤버가 칼라를 바로 놓아주고 저에게 윙크를 보냈어요. 그때 또 한 번 느꼈어요. 패션쇼는 결코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요. 수많은 손과 마음이 모여 하나의 순간을 만들어낸다는 점이 늘 감동적이에요.


앙드레김과 발렌시아가, 그리고 김해김
김인태 디자이너는 2019년 한국인 최연소로 파리의상조합 정회원으로 이름을 올렸으며, 이듬해인 2020년 삼성패션디자인펀드(SFDF)에서 역대 최초로 단독 수상했다. 어린 시절에도 할머니에게 바느질을 배우고 한복을 만들며 놀던 될성부른 떡잎이었지만 하마터면 패션계에서 그의 이름을 보지 못할 뻔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다 뒤늦게 패션으로 눈을 돌렸기 때문.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무작정 앙드레김을 찾아갔다가 “여기서 일하고 싶으면 패션을 배우고 오라”는 조언에 2005년 에스모드 서울에서 패션 공부를 시작해 2009년 파리 스튜디오 베르소를 졸업했다. 이후 당시 발렌시아가 수석 디자이너였던 니콜라 제스키에르(현 루이비통 여성복 아티스틱 디렉터) 밑에서 2년 반, 여러 브랜드에서 7~8년 일하면서 습득한 노하우로 2016년 마침내 자신의 브랜드 김해김을 론칭했다.김해김은 우아한 한국적 럭셔리로 주목받고 있다. 김인태 디자이너는 그가 추구하는 한국적 럭셔리에 대해 “에르메스, 샤넬 같은 명품 브랜드가 유럽에 몰려 있는 건 그들이 풍부한 문화유산을 갖고 있고 그걸 잘 보존했기 때문”이라며 “고가의 김해김 옷을 사고 결혼식 같은 중요한 행사 때 우리 브랜드를 입는 걸 보면 이제 한국형 명품 브랜드도 허황된 꿈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바느질, 매듭 공예를 배웠다고요.
어릴 때 저는 할머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았어요. 바비 인형에 한복을 만들어 입히는 놀이는 마치 저에겐 게임 같았죠. 집 옆에 한복집 아주머니가 자투리 천들을 제게 주셨고 할머니는 바느질하는 법을 알려주셨어요. 돌이켜보면 패션을 처음 배운 곳은 학교가 아니라 할머니 옆자리였던 것 같아요.
무작정 앙드레김 의상실을 찾아갔던 일화에서 예사 사람은 아니란 느낌을 받았어요. 실제로 빠른 성장을 보여줬고요. 비결이 뭔가요.
저는 빠르게 성장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좋아하는 일을 끈기 있게 붙잡고 있었죠. 어느 분야든 달리다 보면 잘나가고 신나는 시간도 있지만 막히고 어려운 시간도 있잖아요. 함께 달려주는 팀원들이 있어 계속 힘을 얻고 달릴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해외에서 론칭 후 한국에 들어온 역진출 케이스입니다. 해외와 한국 고객 비중이 어떤가요.
브랜드 초기에는 해외 비중이 더 컸지만 지금은 한국 고객도 많이 늘었습니다. 대략 절반 정도로 균형이 맞춰지는 중이에요. 재미있는 점은 한국과 해외에서 인기 있는 아이템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거예요. 리본, 진주, 오간자처럼 브랜드의 시그니처가 담긴 아이템들은 어느 나라에서든 비슷하게 사랑받고 있어요. 예전에는 K-패션이 하나의 흥미로운 현상처럼 보였다면, 지금은 하나의 문화적 흐름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아요. K-콘텐츠 전반이 세계적으로 사랑받으면서 패션 역시 자연스럽게 그 흐름 속에 들어가게 된 게 아닌가 생각해요.
김해 김씨 고객을 실제로 만나본 적이 있나요.
실제로 몇 번 만난 적이 있어요. 재미있는 순간이었어요. 같은 성씨라는 이유만으로도 어떤 묘한 친근함이 생기더라고요. 김해김은 저의 본관이자 가야라는 금빛 왕국을 상징해요. 이런 정체성을 지닌 김해김이란 브랜드가 한국 장식예술에, 현재까지도 영감을 주는 고대 왕국 이야기에, 많은 사람의 새로운 추억까지 함께 담아가는 이름으로 성장하고 있어 기뻐요.
지난해 명품 브랜드 지방시 가문 후손과 결혼한 정다혜 씨가 결혼식 리허설 저녁 식사 자리에서 김해김의 비너스 시리즈 재킷을 입어 화제가 되기도 했죠. 대표님이 생각하는 한국적 럭셔리란 무엇인가요.
정다혜 씨가 우리 옷을 입었다는 건 사전에 알지는 못했어요. 나중에 사진을 보고 알게 됐는데, 굉장히 감사한 마음이 들었죠. 누군가의 중요한 순간에 김해김이 함께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큰 영광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한국적 럭셔리는 ‘간결하지만 시적인 아름다움’이에요. 화려함을 과시하기보다는 깔끔한 라인과 의미 있고 정교한 디테일 속에서 드러나는 아름다움이죠. 조용하지만 오래, 강하게 남는 아름다움. 그것이 한국적 럭셔리의 한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프랑스 명품 브랜드 지방시 가문의 후손과 지난해 8월 3일간의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 정다혜 씨는 리허설 복장으로 드레스 위에 김해김의 여성스러운 블레이저를 매치했다.
처음 시작할 때 10년 계획을 세웠어요. 돌이켜보면 SFDF를 수상하고 파리의상조합 멤버로 쇼를 해왔고 글로벌 바이어와 거래하며 서울 청담동에 매장도 열어 고객들과 소통하고 있으니 많은 부분이 현실로 이루어진 듯해요. 하지만 10주년을 기념해 새로운 10년 계획을 세우고 있어서 또 다른 새 시작점에 선 기분이 더 큽니다. 앞으로 10년 동안은 파리를 시작으로 세계 주요 도시에 김해김의 공간을 오픈할 계획을 갖고 있어요. 단순한 판매 공간을 넘어 한국과 세계의 문화적 소통을 만들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장소를 만들고 싶습니다. 나아가 아티스트들이 서로 아이디어를 공유할 수 있는 재단도 만들고 싶고요.
또다시 열심히 달려야겠네요. 창작자로서 늘 새로움을 선보여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나요.
물론 있죠. 아직도 새 컬렉션을 시작할 때 기존과 다른 스타일을 보여줘야 한단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새로운 것을 만들려고 하기보다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즐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표현들이 나오곤 하더라고요.
지난 10년 동안 수고한 스스로에게 셀프 선물을 한다면요.
셀프 선물이라,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문득 나를 위한 블랙 슈트를 하나 만들어 입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언제나 중요한 자리는 블랙 & 화이트로 차려입는 편인데요. 앞으로 있을 재미있는 이벤트들을 기대하며 나만의 블랙 슈트를 스스로에게 선물하겠습니다. 우리 아틀리에 선생님들께 제가 입을 옷을 부탁드리는 경우가 흔하지 않은데, 이번에 의미 있는 착장을 함께 만들어봐야겠어요.
#김해김 #패션위크 #여성동아
사진제공 김해김 사진출처 정다혜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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