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쩔수가없다’는 25년간 몸담은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해고된 유만수(이병헌)가 재취업을 위해 3명의 경쟁자를 제거해나가는 과정을 담았다. 삶의 무게 앞에 내몰린 한 남자의 절박한 생존기를 블랙 코미디와 묘한 서스펜스로 그려냈다.
이 영화가 더욱 주목받는 건 창의적인 서사와 아름다운 미장센으로 전 세계 영화 팬을 사로잡은 박찬욱 감독에 있다. 이는 그가 영화 ‘헤어질 결심’ 이후 3년 만에 내놓은 작품으로, 치밀하고 역설적인 스토리 전개를 통해 자신만의 작품 스펙트럼을 넓혔다는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반응 역시 뜨겁다. 제82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공식 초청됐으며 제50회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는 국제관객상을 수상했다. 제63회 뉴욕영화제와 제69회 런던국제영화제에서도 공식 상영을 성료했다. 올해 30회를 맞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개막작으로 선정되는 영광도 누렸다.
‘올드보이’의 강혜정, ‘아가씨’의 김태리 등 캐스팅에 탁월한 선구안을 자랑하는 박찬욱 감독은 손예진을 이번 작품의 여주인공으로 발탁하며 극에 드라마틱한 숨결을 불어넣었다. 손예진이 연기한 이미리는 남편 유만수의 갑작스러운 실직에 긍정적이면서도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인물이다. 박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다소 분량이 적은 여주인공 역할이지만, 매 장면 새롭고 신선한 얼굴을 비치며 박 감독 작품 속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의 계보를 이었다.
‘어쩔수가없다’ 크랭크인 전까지 손예진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2022년 배우 현빈과 결혼을 했고, 그해 11월에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됐다. 이로 인해 약 2년간 작품을 쉬며 육아에 전념하는 시간을 가졌다. 손예진은 “사실 3년 정도 육아에 집중할 계획이었는데, 생각보다 복귀를 빨리 하게 됐다”며 “아이가 있으면 예전처럼 자유롭게 시간을 낼 수 없다. 그렇기에 복귀작에 대해 더욱 신중하게 고민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른 복귀를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박찬욱’이었다. 손예진도 여느 배우처럼 박찬욱 감독과의 작업을 꿈꿔왔던 것이다. 그는 “박찬욱 감독님 작품이기 때문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며 “결과적으론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고 미소 지었다.

영화 ‘어쩔수가 없다’ 포스터.
긴장보다 즐거움과 소중함이 컸던 현장
출연을 결정한 뒤 박찬욱 감독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요.주변에서 “‘미리’라는 역할을 왜 했냐” “박찬욱 감독이라서 그냥 했냐”라는 이야기만 듣지 않게 해달라고 감독님께 부탁했어요. 제가 이 역할을 해야만 하는 명분을 만들어주시길 바랐죠. 그 마음이 닿았는지 감독님께서 미리의 과거와 서사를 더 정교하게 다듬어주셨어요. 너무 만족스러워요.
현장에서 본 박찬욱 감독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집요하고, 허투루 넘어가는 게 ‘1’도 없는 분이에요. 사실 첫 촬영부터 멘붕이었어요(웃음). 제가 생각지도 못한 대사에 디렉팅을 주셨거든요. 만수가 회사에서 받은 장어를 보며 미리가 “비싼 장어를 다 보내고”라는 이야기를 해요. 이 장면에서만 테이크를 8~10번 정도 갔어요. 저는 이 대사에서 ‘장어’가 포인트라고 생각했는데, 감독님께서 장어에 악센트를 주지 말라고 하시는 거예요. 속으로 ‘와! 나 진짜 큰일났다’라고 생각했죠. 이런 감정은 진짜 오랜만이었어요. 긴장해서 식은땀이 나더라고요. ‘앞으로 감독님이 대사의 어미와 장단음까지 디렉팅을 하시면 난 이제 죽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겪어보니 또 다른 재미가 있더라고요. 감독님께서 제가 제안하는 걸 받아들여줬을 때의 즐거움도 있고요. 감독님의 미션을 클리어하면 내심 뿌듯했어요.
박찬욱 감독과 작업 스타일은 잘 맞는 편이었나요.
감독님은 차가운 관찰자 시점 같았어요. 매 신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그 시선이 감독님 작품의 매력인 것 같기도 하고요. 감독님은 촬영 내내 큰 소리 한번 없이 고요하고 차분하게 디렉팅을 하셨어요. 그래서인지 제 연기가 좋은지, 나쁜지 알아차리기 어려웠던 것 같아요. 촬영하면서 “정말 잘했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좋았어”라는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였어요. 안 좋은 연기에 대해선 딱히 코멘트는 없었어요. 단지 감독님이 마음에 드실 때까지 찍었죠(웃음).
같은 신을 반복해서 촬영하면 더 위축되지 않나요.
오히려 더 단단해졌어요. 촬영 중후반을 넘어가자 연기가 더 재미있어지더라고요. 시간이 흐를수록 감독님의 디렉팅이 큰 도움이 된다고 느꼈거든요. 예를 들면 제가 생각한 대사의 톤과 방향을 보시곤 감독님이 “더 진절머리 내며 해보세요” “고개를 흔들어보세요”라고 이야기하세요. 그 디렉팅을 반영하면 더 자연스럽고 좋은 연기가 나온다는 걸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어요. 최종 컷도 만족스러웠고요.

손예진은 남편의 갑작스러운 실직에 긍정적이면서도 이성적으로 대처하는 인물 이미리를 연기했다.
긴장보다는 즐거움과 소중함이 더 컸던 것 같아요. 2022년 종영한 드라마 ‘서른, 아홉’ 이후 처음으로 대중 앞에 섰으니까요. 공백 기간에는 오로지 엄마의 역할에만 몰두했어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이를 만나 제 모든 걸 쏟았죠. 하지만 육아가 항상 즐거운 건 아니잖아요. 그간 쉽게 느껴졌던 것들이 어렵게 와 닿을 정도로 힘든 시간도 있었어요. 그러다 복귀하니 차만 타도 행복하더라고요. 잊고 있던 현장의 긴장감과 몰입감, 희열 등을 다시 느낄 수 있어 너무 즐거웠고요. 또 대단한 선배님들과 함께하기에 분명 멋진 작품이 탄생할 거라는 믿음도 있었어요.
극단적인 캐릭터들 사이에서 미리는 잔잔하게 스토리를 풀어가요. 미리라는 인물을 어떻게 그려내고 싶었나요.
사실 연기자의 입장에서는 이병헌 선배님이 연기한 만수라는 캐릭터가 더 욕심이 나요. 변주가 크고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처음 시나리오를 읽고 ‘나중에 여자 만수 같은 캐릭터가 있다면 꼭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반면에 미리는 어렵게 느껴졌어요. 한정적인 공간에서 극적인 감정을 표현해야 했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나는 어떤 방법으로 이 캐릭터를 풍성하게 표현해야 하나’ 많은 고민을 했어요. 감독님은 미리가 현실적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일상에서 묻어나오는 연기를 바라셨죠. 이를 위해선 미리가 지닌 현실감과 영화의 색깔을 일치시키는 게 중요했어요. 혼자 튈 순 없으니까요. 고민은 많았지만 감정과 대사를 계산해서 조율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감독님을 믿고 따랐죠.
미리는 만수로 인해 겪은 힘든 시간도 참고 살아왔어요. 만수의 살인 증거를 찾았음에도 아들에게는 “돼지”라며 진실을 숨겼죠. 공감이 되던가요.
만수의 만행이 당연히 공감받을 수 없고 이해되지 않지만, 그런 결정이 무섭기보다는 안타깝게 느껴졌어요. 아픈 딸 리원(최소율)을 위해 형편 이상으로 투자해야 하는 상황이니까요. 미리는 우직하고 순수한 만수를 진심으로 사랑했을 거예요. 시원(김우승)이 친아들이 아님에도 누구보다 아껴줬으니까요. 하지만 만수는 술을 먹으면 주사를 부려요. 만수가 이로 인해 온갖 실수를 저지르자 미리와 술을 끊기로 약속을 하죠. 그리고 만수는 9년 동안 그 약속을 지켜내요. 이런 부분만 봐도 만수는 가족에게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미리는 만수를 사랑했을 거고, 아빠로서도 존중받았을 거예요.
아들의 범죄를 은폐하는 장면은 어떻게 받아들였나요.
엄마로서 아이가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동을 하면 혼내는 게 맞잖아요. 그런데 미리는 그걸 덮자는 만수의 제안에 너무나도 동조해요. 자기 아이의 허물을 감싸주는 남편을 보며 안도감이 들었던 거죠. 윤리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지만, 미리는 시원을 끝까지 안고 가고 싶었던 것 같아요. 만약 만수가 시원을 데리고 경찰서에 가자고 했다면 뜯어말렸을 거예요. 시원과 리원을 위해서라면 미리는 만수보다 더한 것도 했을 거고요. 미리의 이런 모습을 보며 ‘가족을 지키고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엄마는 어떤 일이라도 하는구나’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어요.

“엄마가 된 뒤 인생이 바뀌었어요”
엄마 손예진은 어떤 모습인가요.아이를 낳고 1부터 10까지 모두 변한 것 같아요. 예전에는 외출할 때 모자를 써서 얼굴을 가리곤 했는데 지금은 자유롭게 다니죠. 동네 놀이터에서 만나 친해진 쌍둥이 집도 있고요. 그냥 생활 자체가 엄마가 된 것 같아요. 다만 연기자라는 직업이 있어 행복한 엄마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니 확실히 모든 게 단단하고 성숙해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커리어적으로 불안함은 없었나요.
아예 일을 못 할 거라는 생각은 안 했지만, 멜로 여배우로서 관객들이 얼마만큼 몰입해서 봐주실지 노파심과 걱정이 들었어요. 저에게 좋은 멜로 작품이 들어올까 싶기도 하고요. 하지만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면 할 수 있는 새로운 멜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예전과 다르게 요즘은 결혼한 배우도 멜로 작품을 많이 하잖아요. 김희애 선배님이 출연한 드라마 ‘밀회’ 같은 작품을 만날 수도 있고요.
남편인 배우 현빈 씨와 작품에서 재회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할 마음이 있나요.
저는 의향이 있어요. 상대의 의사는 모르겠지만요(웃음). 멜로는 조금 힘들 것 같고 코미디나 액션 작품에서 만나면 어떨까요. 하하.
작품을 본 현빈 씨의 반응은 어땠나요.
저희는 서로 칭찬해주지 않아요(웃음). “수고했다” 정도죠. 굉장히 쿨한 부부입니다. 작품에 대해 아직 깊이 이야기해보진 못했는데, 오늘 집에 가서 대화를 좀 나눠봐야겠어요.
VIP 시사회에 많은 유명 연예인이 참석했어요.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요.
임시완 배우가 남편에게 와서 “부부가 상대 배우자의 연기를 보면 어떠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왜 벌써 걱정하냐. 여자 친구가 못 하게 하냐”고 우스갯소리로 말했는데, “갑자기 궁금했다”고 하더라고요. 민정(배우 이병헌의 아내) 씨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연기는 연기일 뿐이에요. 이 작품에서는 진한 부부 연기를 하지 않아서인지 편안한 느낌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어쩔수가없다’는 어떤 작품으로 기억될까요.
너무 함께하고 싶었던 감독님과 작업을 했고, 베니스국제영화제도 처음 가봤어요. 배우 인생의 2막이 열린 느낌이죠. ‘어쩔수가없다’는 제게 너무 긍정적인 영향을 준 작품이에요. 연기에 대한 열정도 생기고, 작품을 바라보는 시야도 넓어졌죠. 대단한 배우들과의 열연이 저에게 큰 자극이 됐고요. 저를 더 성장하게 해준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올가을은 어떻게 보낼 계획인가요.
나이가 들수록 계절의 변화가 더 빠르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올해 가을은 연기 인생에서도, 육아에서도 또 다른 변화가 찾아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상황에서 쉽지는 않겠지만 매사에 최선을 다해 달려나갈 계획이에요. 올여름엔 너무 더워서 아이와 놀이터에 자주 나가지 못했어요. 가을이 되면서 날씨도 선선해졌으니 아이와 야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손예진 #어쩔수가없다 #여성동아
사진제공 엠에스팀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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