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모래마을책방

책방지기 김소민 씨는 책방을 열기 위해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를 기억한다. 그는 “독립서점은 독창적인 콘셉트가 있어야 성공한다고들 했지만 듬성듬성 남아 있는 목욕탕의 잔해에 더해진 빵집의 흔적은 그야말로 애매했다”며 “고민 끝에 완전히 갈아엎기보다는 그 모습 그대로를 살리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사우나실은 이제 어린이들이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 됐고, 수십 년 전에는 물이 가득 차 있었을 탕 위에는 지금 책들이 쌓여 있다. 이 외에도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목욕탕의 흔적을 살필 수 있는 재미 요소들이 녹아들어 있다.
세상에 세련된 공간은 많지만 누구나 마음 편하게 슬리퍼 차림으로 와도 환영인 곳은 많지 않기에, 은모래마을책방은 그런 다정한 공간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다. 정가의 30~50% 수준으로 할인해서 판매하는 중고책도 있다. 단, 소민 씨는 ‘헌책’이라는 표현보다는 ‘시간으로 검증받은 책’이라고 부른다. 40여 년간 존재해온 이 공간에 하는 말인 듯도 하다. 그는 “목욕과 독서는 비슷한 메타포가 있다”며 “목욕탕에서는 모두가 계급장 떼고 알몸으로 마주하는 것처럼, 책방에서도 모두가 옳고 그른 것 없이 자유롭게 생각을 나눌 수 있다”고 말한다.

리:피움 미술관

겉보기에는 깨끗했지만 막상 교정에 들어서니 온통 수리할 것투성이였다. 물이 새서 썩어버린 바닥, 완전히 굳어버려 열리지 않는 자물쇠 등 20년간 방치된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손수 쓸고 닦고, 도색이 벗겨진 곳은 페인트를 칠하고, 화장실 등을 고치는 데만 2년이 걸렸다. 휑한 운동장에는 꽃을 한가득 심어 마치 정원처럼 만들었다. 보수는 했지만 개조를 하지는 않았다. 옛 학교 특유의 나무 바닥과 알루미늄 새시, 목재 창틀은 그대로 뒀다. 전시실로 사용하는 교실 한편에는 녹색 칠판도 자리해 있다. 갤러리의 이름도 다시 피어난다는 뜻의 ‘리(re)피움’으로 지은 만큼 멈췄던 학교의 시간을 다시 움직였다. 이제 한지 조형 작품으로 가득 찬 미술관은 고흥을 들르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방문해보는 명소가 됐다. 리:피움 미술관장은 “남양동초등학교 졸업생이 찾아오거나 옛 교장 선생님의 자녀가 찾아와서 추억에 빠지곤 한다”며 “의외로 현직 교사들도 많이 오는데, 학교가 미술관이 된 모습이 색다르다며 좋아한다”고 말했다.

위크엔더스

1970년대에 지어진 여인숙은 강릉역이 생기기 이전에 존재한 터미널 가까이에 위치해 예전부터 여행가들이 자주 다녀간 곳이다. 2년여간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아 황폐해졌지만 지붕에 낸 창과 이국적인 구조의 뼈대에서 한 대표는 가능성을 보았다. 그는 “1970년대부터 이어진 여행자들의 서사가 계속 쌓이길 바랐다”며 “흙으로 만든 바닥과 벽의 질감에서 느껴지는 옛이야기들을 남기고 싶어서 원형을 최대한 보존했다”고 설명했다. 물론 새롭게 단장하는 과정에서 바뀐 부분도 있다. 작은 객실들이 줄지어 있던 내부는 벽을 터서 더 넓은 공간으로 재구성했다. 그럼에도 사용감이 느껴지는 움푹 팬 바닥, 옛날 방식으로 만든 벽돌 등 오래된 건축적 요소는 그대로 남겼다. 과거 이 여인숙을 운영했다면서 찾아온 방문객이 바닥 한쪽이 유난히 패어 있는 곳을 보고 “옛날 가스통을 두었던 자리”라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1층은 북 바, 2층은 게스트 하우스로 운영되는 위크엔더스는 이제 강릉을 테마로 여행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지역 명물인 초당순두부를 조식으로 제공하거나 강릉 해변에서의 요가와 서핑 등 지역 특색을 살린 콘텐츠로 여행객들을 이끈다. 솔직히 말하자면 방음이나 단열 같은 최신식 건물의 기본적인 기능은 다소 부족할 수도 있다. 하지만 깔끔하게 새로 지어진 공간에서 쉽게 느낄 수 없는, 과거의 여행자들이 남긴 공기와 정서는 위크엔더스만의 고유한 매력이다. 오랜 기억이 깃든 공간에서 오늘의 여행자들이 또 다른 시간을 쌓아가고 있다.

커피키친한일

그렇게 방치된 공간에 다시 온기가 돌기 시작한 건 2021년. 건축사 김기석 씨가 동료들과 함께 이 건물을 사들이며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과거 병원이 있던 자리 앞은 한때 하양에서 영천으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였지만 신작로가 개설되면서 상권도 쇠퇴했다. 점차 조용해지는 동네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그는 사람들의 발길이 머무를 수 있는 공간, 즉 ‘사랑방’ 같은 장소를 구상했다. 복합문화공간 ‘커피키친한일’이 탄생한 배경이다.
1950~60년대의 콘크리트 건축물 자체가 희귀한 만큼 김 씨는 이 공간이 가진 건축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며 최소한의 개입으로 재생을 이끌었다. 과거 진료실이 있던 본관은 카페로, 입원실로 사용되던 별관은 문화공간으로 꾸몄다. 곡선 형태의 원형 계단은 그대로 남겼고, 나무 창호와 천장 몰딩, 벽돌 외벽 등도 손대지 않았다. 벽 한편에는 과거 환자들이 남긴 낙서들이 그대로 있다. 동네 사람들이 어린 시절 한 번쯤은 방문한 기억이 있는 공간인 만큼 그 시절을 추억할 여지를 남기고 싶었던 것. 김 씨는 “건축물이 새롭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라며 “불편함이 있더라도 시간이 쌓인 건물에는 그만의 이야기와 정취가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커피키친한일이 유럽의 오래된 건축물처럼 시간이 지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가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 과거 병원을 기억하는 이들이 다시 찾아와 추억에 젖고, 동네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들러 이야기를 나누는 곳.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이곳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더해지고 있다.

#공간업사이클링 #공간리브랜딩 #여성동아
사진제공 김소민 한귀리 리:피움미술관 김기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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