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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프로 직장인 다이어리

직장인 칼럼 | 직장에서 비건으로 살아남기

장은나 광고회사 AE·비건먼지 유튜브 PD

2023. 04. 17

“어떻게 회사 다니면서 비건으로 사세요?” 다들 내게 묻는다. 5년 차 비건 직장인으로 살아 온 생존 비결을 공개한다. 

어느 월요일, 나는 갑자기 비건이 됐다. 주말에 친구 추천으로 보게 된 영화가 계기였다. ‘몸을 죽이는 자본의 밥상’과 ‘카우스피라시’라는 제목의 두 다큐멘터리는 각각 육식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과 공장식 축산업의 잔인함을 알려줬다. 고기를 먹지 않기로 결심했다. 당시 회사에 입사한 지 1년도 채 안 됐을 때였다. 지난주 금요일까지 순댓국에 소주를 걸치던 신입 사원이 갑자기 “저 이제 고기를 안 먹기로 했어요” 선언하게 된 것. 벌써 4년 전 일이다. 그사이 세 번 이직했고, 계속 비건 직장인으로 잘 지내고 있다. 그 비결을 공개한다.

도시락, 요리 못해도 괜찮아

비건 직장인은 무조건 도시락 싸와서 조용히 ‘혼밥’ 할 거라 생각한다면, 땡! 나 홀로 점심시간을 즐기는 비건도 있겠지만 나는 내 요리보다 남이 만든 음식을 더 좋아하고, 혼자 먹는 시간보다 동료들과 함께 식사하며 나누는 대화를 즐긴다. 내가 다녔던 회사마다 도시락이나 간편식 등으로 식사하는 ‘도시락파’와 외식을 하는 ‘외식파’가 있었다. 어느 쪽이었냐고? 나는 ‘둘다파’였다.

도시락을 싸면 100% 비건으로 먹을 수 있어 마음이 편하다. “이 요리도 비건이에요?” 신기해하는 동료들에게 한입 먹어보라고 권하고 맛있다는 말을 듣는 것도 하나의 큰 기쁨! 이렇게 말하면 요리를 잘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 난 엄청난 요리 초보다. 비건을 안 했다면, 아마 내 남은 삶의 식사를 배달 음식과 외식으로 채웠을지도 모른다. 그럼 어떻게 도시락을 쌌냐고?

먹고 싶은 반찬 앞에 ‘비건’ 단어만 붙여 레시피를 검색하면 콘텐츠가 쏟아진다. 엄마, 동료, 비건 친구 등 요리 전문가의 도움도 받았다. 정리하면 기존 레시피에서 고기, 해산물, 유제품, 계란 대신 버섯, 두부, 곡식 등으로 대체하면 된다. 오히려 피 빼고, 고기 자르고, 냄새 없애는 과정이 필요치 않으니 비위 상할 일도 없다. 밥이나 나물은 원래 대부분 채식이고, 고기 뺀 잡채, 버섯으로 만든 장조림, 스크램블드순두부 등 쉽고 맛있는 요리가 많다. 시간을 아끼려면 아예 비건 대체식품을 시도해봐도 좋다. 비건 진미채, 비건 너깃, 식물성 불고기 등을 사두었다 데우면 빠르게 도시락을 쌀 수 있다.

아무리 쉬운 레시피가 있어도 모두가 도시락을 준비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닐 테다. 나도 비건을 시작할 당시 야근이 잦아서 그 어려움을 안다. 그럴 때는 비건 냉동식품이나 간편식을 구매해서 사무실에 쌓아두고 먹으면 된다. 컵라면부터 컵볶이, 냉동 주먹밥, 시리얼 등 비건 간편식 종류는 무궁무진하다. 비건 전용 온라인 쇼핑몰뿐 아니라 일반 오픈마켓이나 새벽 배송 서비스에서도 비건 제품을 많이 판매해, 비건이 아닌 사람도 건강을 위해 비건 프로틴 바나 비건 베이커리류를 사 먹는 경우가 많다. 식단을 조절할 때는 세척 채소와 두부, 식물성 닭 가슴살, 드레싱 등을 사두고 샐러드를 해 먹기도 했다.



외식, 쫄지 말고 “빼도 돼요?” 물어보기

비건 알리오올리오, 채소만 넣은 김밥, 고기와 계란이 빠진 비빔밥(왼쪽부터).

비건 알리오올리오, 채소만 넣은 김밥, 고기와 계란이 빠진 비빔밥(왼쪽부터).

만약 사무실 주위에 비건 식당이나 비건 메뉴 식당이 있다면 그냥 그곳에 가면 된다. 비건 식당 위치를 알려주는 애플도 있고, 카카오맵에서 ‘비건 지도’ 즐겨찾기 그룹을 팔로하면 편하다. 그렇지만 비건을 시작했던 2019년의 서울 강남은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비건이라는 이유로 매일 비슷한 메뉴를 먹고 싶지는 않고, 또 외식을 피할 수 없을 때도 있다. 광고 회사 AE(Account Executive)로 일하면 클라이언트 미팅, 매체사나 제작사 등 협력사 미팅, 광고물 촬영, 팝업 스토어 등 오프라인 행사도 있다. 그럴 때마다 도시락을 지참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최대한 일반 식당에서 동물성 성분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주문하는 스킬을 익히면서, 동료들과 함께 방문할 수 있는 식당을 하나씩 늘려갔다. 외근이나 미팅이 있을 때도 미리 검색만 해보면 어느 정도 채식으로 괜찮은 한 끼를 먹을 수 있다. 완벽한 비건은 아니더라도, ‘비덩주의(육수까지 허용하되, 덩어리로 된 동물성 재료를 먹지 않는 비건)’로 채식을 실천하는 방법도 있다.

먼저 어느 지역이든 사무실이 많은 곳 주위에는 하나씩 있는, 구내식당 느낌의 ‘한식 뷔페’부터 노렸다. 매일 메인 반찬은 바뀌지만, 보통 밥과 여러 가지 반찬이 나오는 게 특징이다. 마음대로 반찬을 골라 담을 수 있으니까 채식으로 먹기 편하다. 밥과 나물 한두 종류와 기본 샐러드는 무조건 나오니 굶을 일은 없고, 채식 반찬도 종종 나온다. 소스나 국물에 동물성 성분이 포함됐을 수 있고, 미팅 때 가기는 조금 어렵지만 합리적인 가격으로 채식 지향의 든든한 식사를 할 수 있다.

한식은 비건 옵션으로 먹을 방법이 많은 편이다. 고기와 계란을 뺀 비빔밥을 시키는 것도 가능하고, 비빔면이나 쫄면에서도 계란만 빼면 된다. 김밥집에서 김밥에 채소만 넣어달라고 해 먹는 방법도 있다. 찌개를 파는 밥집에서 “육수와 해물 빼고 맹물에 된장찌개나 순두부찌개를 끓여주실 수 있는지” 물어보면 흔쾌히 응해주시는 곳도 있다. 나이대가 조금 있는 분들과의 외부 미팅 때 다양한 메뉴로 구성된 한식당을 예약하면 정갈하면서도 내가 먹을 채식 반찬이 많아 모두가 만족하는 식사를 할 수 있다.

파스타나 샐러드를 파는 곳도 비건 친화적이다. 알리오올리오에서 해산물, 치즈, 치킨스톡을 빼달라고 부탁하면 된다. 어느 샐러드 집이든 계란, 유제품, 고기, 해산물 없이 먹을 수 있다. 칼국숫집과 즉석 떡볶이집도 희망이 있다. 들깨 칼국수는 대부분 채식이고, 기본 칼국수도 육수 대신 맹물 또는 채수로 조리가 가능한지 물어보면 되는 곳이 있다. 이렇게 그때그때 재료를 넣고 끓이는 음식들은 채식으로 시도하기 좋다. 그런 의미에서 중식인 마라탕과 마라샹궈, 가지튀김은 비건들이 선호하는 메뉴 중 하나다. 간짜장도 미리 고기나 해산물 빼고 볶아달라고 요청하면 해주시는 경우가 있다. 게다가 요즘은 도시락 집에도 채식 메뉴가 있으니 미리 검색해보고 주문하면 된다.

사무실 주변에서 이렇게 먹고 다니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장님들이 나를 알아봐 주시기 시작한다. “채소만 넣은 김밥, 맞죠?” “오늘도 찌개에 다 빼고~ 김은 먹지? 여기 테이블 김 반찬 좀 줘!” 이런 식으로 단골 취급을 받는 게 반갑고 재밌다. 처음엔 주문할 때마다 재료를 확인해야 하는 게 민망할 수 있는데, 식당 사장님들은 대부분 친절하시니까 걱정하지 말자. 우리는 우리가 먹을 음식에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 확인할 권리가 있고, 먹지 못하는 재료를 빼주실 수 있는지 물어볼 수 있다. 안 된다고 하면 안 먹으면 되고, 되는 경우에는 감사함을 표시하고 맛있게 먹으면 되니까!

세상엔 좋은 사람이 많다

비건 도시락을 싸 와 동료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면 즐거움은 배가 된다.

비건 도시락을 싸 와 동료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면 즐거움은 배가 된다.

이런 주문 방법이 동료들에게 영향을 줄 때도 있다. 예를 들면, 계란을 안 좋아하는데 늘 받고 남기다가 언젠가부터 같이 빼고 시키는 거다. 비건이 아닌데 함께 비건으로 주문해주는 동료들도 있다. 그럴 때마다 그렇게 고맙고 감동적일 수가 없다. 비건을 시작한 순간부터 ‘비건 강요’라는 단어를 들어왔기에 내 추천이 그렇게 보일까 움츠러드는 시기도 있었지만, 좋은 동료들을 만나면서 점차 바뀌었다. 모든 음식이 그렇듯, 채식도 나누면 더 즐거운 거니까.

비건 간식을 발견하면 나보다 더 신나 하면서 사무실로 주문해 함께 먹자던 동료가 생각난다. 한창 믹스커피로 만드는 달고나 커피가 유행일 때 같이 해보자며 두유까지 사 와서 만들어 먹은 걸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비건이 아닌데도 비건 레시피를 전수해주는 동료, 유당불내증이 있어서 비건에 관심이 많았다며 사무실 주위에 두유나 오트밀크로 라테를 만들어주는 카페를 줄줄 읊어주는 동료도 있었다. 비건으로 먹는 기간을 정해서 실천하는 ‘파트타임 비건’ 동료들도 만났다(혹시 궁금하다면 인스타그램 @parttime.vegan).

솔직히 처음 비건을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내가 비건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거나 소외당하지 않을까 걱정도 했다. 그렇지만 아니었다. 혹시 사람들과의 관계를 걱정해서 비건을 시도하지 못하거나 포기하는 분이 있다면 섣불리 포기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물론 세상에는 우호적인 분들만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비건이 아닌 사람도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가끔 ‘빌런’을 마주치는 날이 있지 않나. 내 식단과 신념을 존중해주는 동료가 없을 거라고 단정 짓지 말자. 우리 생각보다 세상엔 좋은 사람이 많다.

회사에서 먹는 점심은 누군가에겐 대충 때워도 되는 그깟 밥 한 끼일 테고, 어떤 이에겐 마음에 점을 찍는 소중한 직장 생활의 꽃일 것이다. 나에게 점심은 일터에서 폭력에 반대하는 내 가치관을 드러내고 육식 중심주의 사회에 조금씩 균열을 내고자 용기를 던지는 시간이다. 한 끼의 비건 식사가 끝나면, 아주 작은 성취감이 쌓인다. 결심한 대로 행동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소소한 만족감, 내 식사가 누구를 죽거나 다치게 하지 않았다는 다행스러움, 앞으로 다른 존재를 폭력이 아닌 다정함으로 대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같은 것이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고 했던가. 때론 팍팍해지곤 하는 직장 생활 속에서 비건을 실천한다는 것은, 나의 다정함을 잃지 않는 방법이다. 모두가 서로 조금 더 다정해지는 세상을 위해, 나는 계속 비건으로 살아갈 것이다.

#채식 #비건 #직장인칼럼 #여성동아

장은나
글쓰기를 좋아해서 언젠가 글로 먹고살겠거니 했는데, 말과 글로 일하는 마케터가 되었다. 본업은 6년 차 AE. 사이드 프로젝트로 ‘비건먼지’ 유튜브와 팟캐스트를 운영하고 블로그나 브런치에 ‘비건 직장생활’에 대한 글을 쓴다. 취미로 그림, 타투, 타로를 한다. 인스타그램 @zzangna_에서 바쁜 비건 직장인의 일상을 더 구경할 수 있다.

사진 게티이미지 사진제공 장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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