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얀 차를 탄 여자’는 당초 2부작 단막극으로 기획돼 2022년 단 14회차 촬영 만에 마무리됐지만, 완성된 편집본은 예상 밖의 반전을 가져왔다. 드라마 ‘검사내전’ ‘로스쿨’, 넷플릭스 시리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등에서 섬세한 심리 묘사와 인물 중심 연출력을 다져온 고혜진 감독은 자신이 가장 강점을 가진 ‘편집’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그 결과 ‘하얀 차를 탄 여자’는 영화로 만들어져 제22회 샌디에이고국제영화제 ‘BEST INTERNATIONAL FEATURE’상 수상, 제66회 BFI런던영화제 스릴 부문 공식 초청, 제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코리안 판타스틱 배우상’과 ‘왓챠가 주목한 장편상’을 수상하며 작품성과 화제성을 인정받았고, 극장 개봉까지 이어지는 기적 같은 여정을 만들어냈다.
영화는 모두가 다르게 기억하는 ‘그날’의 진실에 다가가는 서스펜스 스릴러다. 하얀 눈이 소복이 내리던 어느 겨울밤, 피투성이가 된 두 여자가 병원으로 들어오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누가, 왜 칼에 찔렸는지는 화자에 따라 다르다.
정려원은 조현병을 앓는 추리소설가 도경을 연기했다. 도경은 현실과 망상이 교차하는 경계에서 끊임없이 의심을 받는다. 차근차근 드러나는 진실 속에 누구보다 무거운 비밀을 갖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정은은 날카로운 직감과 인간적인 온기를 지닌 산골 경찰 현주 역을 맡아 사건의 실체를 좇는다. 두 배우가 만들어내는 서사는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인간의 구원이라는 묵직한 주제로 수렴된다.

‘하얀 차를 탄 여자’는 원래 단막극으로 제작될 예정이었으나 뜻밖으로 여정을 거쳐 극장에서 개봉했다. BFI런던영화제에 참석한 정려원과 고혜진 감독.
고혜진 감독 입봉 돕기 위해 이정은과 의기투합
그동안 세련되고 도회적인 이미지를 주로 보여줬던 정려원은 이번 작품에서 완전히 다른 얼굴로 등장한다. 화장기 없는 피부, 거칠어진 머리카락, 생기 잃은 눈빛. 그는 이번 작품에서 “화장을 안 해도 된다는 것에 해방감을 느꼈다”고 말했다.‘정려원’이라는 이름은 2000년대 초반 대중에게 익숙하다. 2000년 4인조 걸 그룹 샤크라로 데뷔해 독특한 콘셉트와 카리스마로 사랑받았고, 2002년 배우로 전업한 이후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똑바로 살아라’ ‘안녕, 프란체스카’ ‘마녀의 법정’ ‘기름진 멜로’ ‘검사내전’ ‘졸업’ 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지만 2018년 ‘게이트’가 마지막일 정도로 영화와는 유독 인연이 없었다. 그는 “마음속으로는 늘 기다리고 있었지만 영화판이 멀게만 느껴졌다. 주어진 것부터 열심히 하자는 마음으로 드라마에 집중했는데,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지는 것 같다. 신기하기도 하고, 선물 같기도 하다”고 말했다.

처음엔 2022년 추석 특집 단막극 대본으로 받았어요. 그런데 촬영을 마치고 편집본을 보던 중 감독님과 CP님이 “이건 영화로 가도 되겠다”는 의견을 주셨죠. 사실 갑작스러워서 ‘정말요?’ 싶었어요. 그런데 완성본을 보니 납득이 됐죠. 드라마 1, 2부를 붙여 한 편의 영화로 재탄생한 셈이에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출품 당시 테마가 ‘TV와 영화의 경계가 허물어지다’였는데, 우리 영화가 그 주제에 딱 맞았고, 수상까지 이어지게 됐어요.
고혜진 감독의 입봉작에 출연한 이유가 의리 때문이라고요.
감독님과는 ‘검사내전’ 때 만났어요. 배우들과 컷 미팅에서 분위기가 건조해 제 휴대전화 플레이리스트에 있는 음악을 틀었는데, 감독님이 영어 가사를 다 따라 하는 거예요. 어쩐지 내적 친밀감이 느껴졌죠. 사람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분이었고, 작은 역할의 배우에게도 애정이 깊었어요. 배우가 연기를 잘 못하면 다가가서 귓속말을 하시더라고요. 그러면 신기하게도 배우의 연기가 좋아져요. 배우들한테 인기가 많아서 작품을 제안하면 함께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대다수일 거예요. 저도 크게 한번 도와주고 싶어서 입봉작에 출연하겠다고 약속했죠. 다만 의리로 출연했는데 작품이 안 좋으면 서로 어색해질 수 있으니, 친분만으로는 안 되고 대본이 좋아야 한다고 못 박았어요.
대본을 받았을 땐 어떤 느낌이었나요.
제가 F와 N 성향이라 감성적이고 직관적인 편인데, ‘이거 너무 춥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웃음). 그런데 시나리오가 너무 재밌었고, 읽자마자 ‘이건 내 거다’ 싶었죠. 화자의 시점에 따라 기억이 달라지는 구조가 흥미로웠고, 캐릭터의 해석 여지가 많았어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변화를 표현하는 게 매력적으로 느껴졌죠.


영화에서 조현병을 앓는 작가를 연기한 정려원. 거의 모든 장면에서 ‘생얼’로 등장한다.
이정은은 ‘좋은 사람’ 롤 모델
실제로 한겨울에 맨발로 촬영한 장면이 많았다고요.2022년 2월, 강원도 인제에서 찍었는데 정말 너무 추웠어요. 클로즈업이 아니면 신발을 벗어야 해서 발을 지키느라 고생했죠(웃음). 세트도 따뜻하지 않았고, 폐가나 야외 신은 특히 고역이었어요. 그런데 강정우(정만 역) 배우가 눈 속에 파묻혀 있는 걸 보고 ‘아, 나도 이럴 때가 아니구나’ 싶어서 바로 신발 벗고 뛰어들었어요.
14회차면 촬영 일정이 꽤 빠듯했을 텐데,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요.
서로 예뻐하고 응원해주는 분위기였어요. 이런 현장이 흔치 않기 때문에 뭔가 재미있게 다 불사르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또 감독님이 연기자들에게 “어렵게 모셨다” “고맙다”는 식으로 얘기하니까 다들 진짜 ‘이 사람을 위해서 하자’는 마음으로 움직였던 것 같아요. 현장에서 연출이 비는 시간이 있어도 바로 찍을 준비가 됐었고, 덕분에 14일 안에 다 끝냈죠. 다른 작품이었으면 절대 이 시간 안에 못 찍었을 거예요.
도경이라는 인물을 연기할 때 가장 집중한 부분은 어디였나요.
도경은 피해자이자 가해자일 수 있는 인물이에요.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 바로 그거였어요. ‘피해자는 끝까지 피해자로만 살아야 할까?’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는 피해자이자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해자이기도 하잖아요. 그 미묘한 결을 따라가고 싶었어요.
기존에 맡았던 전문직 캐릭터들과는 많이 다른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전문직은 한번 하면 레퍼런스가 있어서 다음에 더 잘할 수 있는데 이번 배역은 제 안에 없는 걸 형상화해야 하는 작업이었어요. 설득이 안 되면 끝나는 게임이라 ‘모 아니면 도’라고 생각했죠. 찍으면서 ‘지금 내 커리어를 이 친구(고혜진 감독) 손에 쥐여줬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웃음). 하지만 재밌었어요. 감독님이 ‘이게 문제’라고 지적하기보다 다음 신으로 넘어가는 걸 보면서 조금씩 확신을 얻었죠.
이정은 배우와의 호흡은 어땠나요.
정말 너무 좋았어요. 현장에서 연기하다 보면 외롭다 느껴지는데 내공이 느껴지는 배우를 만나면 큰 기둥이 내 옆에 기대라고 버티고 있는 것 같아서 든든해요. 이번엔 선배가 바로 그런 존재였죠. 정은 선배가 연기한 현주를 보면 말투도 그렇고 분명히 따뜻한 순경의 느낌이 있는데 의심할 때 입꼬리가 내려가면서 눈이 뾰족해지는 장면에서 소름 돋았어요. ‘이렇게 온도가 한 번에 바뀔 수가 있구나’ 싶었죠. 정은 선배를 보면서 뭔가 연기를 할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돼야겠다 생각했어요.
이정은 배우에 대해 여러 차례 “좋은 사람”이라고 언급했던데요.
정은 선배는 마음이 예쁘고 사는 방식도 멋있어요. 보통 사람들은 음식을 먹을 때 소금을 미리 치는데 선배님은 먼저 맛을 보고 나서 소금을 넣더라고요. 그만큼 매사에 선입견이 없다는 뜻 아닐까요? 쉴 때는 부모님이 결혼 전 데이트하던 곳을 찾아다니고, 걸스 힙합도 배운대요. 사람이 멋있으니까 그런 모든 게 다 멋있어 보여요. 현장에서 후배들과 격 없이 어울리시는 모습도 멋있고, 후배들이 선배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아, 저분이 진짜 좋은 사람이구나’ 싶어요. 한번은 제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제 안의 감정을 다 언어화해보라고 하셨는데, 그 훈련을 하다 보니 정말 나아지더라고요. 응어리가 풀리기 시작했어요. 그 모든 게 선배님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들이라 감히 흉내 낼 수가 없어요. 선배처럼 좋은 배우이기 전에 좋은 사람이 돼야겠다고 느꼈죠.

개봉 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샌디에이고 국제영화제 등에 출품돼 호평을 받은 ‘하얀 차를 탄 여자’.
하루에 1시간 이상 산책하며 자신과 채널링
평소에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나요.예전엔 일기를 썼는데 요즘은 산책을 해요. 산책은 몸으로 쓰는 일기 같아요.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나한테 말을 걸게 돼요. 명상에서 말하는 채널링 비슷한 거죠. 한번 나가면 1시간 반쯤 걸어요.
이번 작품이 개인적으로는 어떤 의미였나요.
‘내려놔도 된다’는 걸 배웠어요. 촬영 중에 “콧구멍 샷(얼굴 클로즈업)이 너무 많은 거 아니냐”고 농담했는데, 그걸 하면서 ‘아직 내려놓지 못한 게 있었구나’를 깨달았어요. 하다 보니 그게 전혀 중요하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붙잡고 있던 게 방해였어요.
영화시사회에 김연경 선수가 응원하러 왔다고요.
네, 친해요. 제가 배구를 무척 좋아하거든요. 저는 ‘신인 감독 김연경’을 보면서 울어요(웃음). 선수들이 스스로에게 화낼 때 그 감정이 너무 이해돼서요.올림픽을 보면서도 만날 울어요. 이기거나, 져서 우는 장면에 그 사람의 서사가 다 담겨 있는 것 같아서 너무 슬퍼요.
샤크라 동료 보나가 ‘싱어게인4’에 출연했던데요.
너무 반가웠어요. 노래도 랩도 다 잘하는 친구예요. 뭐든 해내는 친구라 진심으로 응원했죠.
그러고 보니 올해가 데뷔 25년 차네요.
나름대로 잘 걸어온 것 같아요. 가수 시절이 없었다면 배우는 꿈도 못 꿨을 거예요. 샤크라 덕분에 카메라 앞에 서는 법, 사람을 대하는 법, 스스로를 지키는 법을 배웠죠. 그게 지금의 저를 만든 방패 같아요. 사실 연기는 하면 할수록 어렵지만 자신감도 생겨요. 좋은 연기는 ‘진솔함’에서 온다고 믿어요. ‘좋은 사람이 좋은 연기를 한다’는 말이 정말 와닿아요.
#하얀차를탄여자 #정려원 #여성동아
사진제공 바이포엠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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