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영화제는 최근 계급에 대한 고민에 깊이 빠져 있다. 2019년 한국의 계급을 고급 저택 안에 녹여낸 ‘기생충’, 2022년 크루즈 좌초 후 계급의 전복을 꼬집은 ‘슬픔의 삼각형’에 최고상의 영예를 안겼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칸영화제가 열리지 않았단 점을 감안하면 퐁당퐁당 계급을 다룬 영화에 최고상의 영예를 안긴 셈이다. 2024년엔 미국 사회를 비꼰 블랙코미디 ‘아노라’에게 황금 월계관이 씌워졌다.
뉴욕 스트립 클럽에서 일하는 러시아계 이민자 자녀 ‘애니’. 본명 ‘아노라 미히바’ 대신 미국식 이름인 애니를 사용한다. 연쇄 살인마 분위기를 풍기는 손님이 “너희 가족이 여기서 일하는 거 알아?”라고 물어도 웃으며 응대해야 한다. 동료와 담배를 피울 때나 새벽 퇴근길이 돼서야 애니는 잠깐 자신의 원래 표정으로 돌아간다.
그런 애니가 스트립 클럽에서 한 남자를 만난다. 구글링하면 나오는 러시아 재벌의 아들 ‘이반’(심지어 약간 티모시 샬라메를 닮았다). 전형적인 스포일드 차일드(spolied child)인 이반은 애니를 집으로 초대하기도 하고, 1만5000달러에 일주일간 파트너가 돼달라고 제안하기도 한다. 부모의 간섭에 반항하고자 했던 이반은 미국 국적을 획득하려는 목적으로 애니에게 프러포즈한다. 둘은 라스베이거스 24시간 드라이브스루 결혼식장에서 키스를 나누고 치기 어린 신혼 생활의 단꿈을 누린다.
리처드 기어와 줄리아 로버츠가 출연한 ‘귀여운 여인’(1990)이 생각나는 평범한 신데렐라 스토리처럼 보였던 이 영화는 43분 시점에 반전을 맞는다. 부모가 결혼 사실을 알고 ‘애새끼’ 이반을 감시하기 위해 고용한 토로스, 가닉, 이고르(나열한 순서는 이들 간의 위계)가 등장한다. 이반의 부모는 토로스에게 내일 미국에 도착할 때까지 결혼을 무효화해놓을 것을 요청한다. 세 남자는 이반의 집으로 쳐들어오고, 이반은 애니를 내버려두고 도망친다. 이제부터 결혼을 지키기 위해 이반을 찾아야 하는 애니와 결혼을 무효화하기 위해 이반을 찾아야 하는 세 남자가 뉴욕을 쏘다니기 시작한다.
칸영화제 수상작이라고 하면 보통은 ‘노잼 영화’로 통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도 유머를 놓치지 않는 션 베이커의 영화는 다르다. ‘버럭이’의 인간화나 다름없는 토로스, 애니의 가격으로 코가 부러지자 그 고통을 계속 하소연하기만 하는 가닉, 역시 성격이 보통은 아닌 애니가 합쳐져 소동이 끊이지 않는다.
이 중 압권인 장면이 있다. 늦은 저녁을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서 토로스는 러시아계 미국인들에게 이반의 사진을 보여주며 “본 적 있냐”고 묻고 다닌다. 한 무리의 젊은이는 “방해하지 말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이반을 찾지 못하면 큰일 나는 상황에서도 토로스는 “요즘 애들은 근성이 없다”고 화를 내며 “나는 17세 때부터 일했는데 너희들은 틱톡과 인스타그램이나 한다”며 소리를 지른다. 영화관 곳곳에서는 폭소가 터졌다. ‘아노라’는 아트하우스 영화라는 흥행 마이너스 요소를 뚫고 개봉 10일 만에 3만 관객을 모았다. 거대 제작사가 선물한 매끈한 퀄리티도 접근 가능성을 높인다.
로맨스와 우당탕탕 로드무비라는 예쁜 포장지로 싸여 있지만 이 영화를 지배하는 장르는 블랙코미디다. 감독 션 베이커는 아메리칸드림의 이면을 다루는 데 능하다. 아이폰5s로 촬영해 그해 최고의 화제작이 됐던 ‘탠저린’(2015)에서는 LA에 사는 트랜스젠더를, 한국에서 10만 관객을 모았던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에서는 디즈니랜드 옆 모텔촌에서 장기 투숙하는 홈리스의 삶을 그렸다.
“나의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세상의 편견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이 영화를 통해 사람들이 성 노동자를 보다 긍정적인 관점에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상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성 노동자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션 베어커는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애니가 하는 성 노동은 사회에서 지워진 일이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을 받는다. 영화 속에 ‘창녀’를 뜻하는 수많은 영어 단어가 등장하는 것도 이를 방증한다. 애니는 ‘어쩌다 저 일을 하게 됐는지’ 같은 인식 속에서 돈을 번다. 이반과 결혼한 뒤에는 ‘재벌을 꼬셔 인생 역전하려던 꽃뱀’ 취급을 당한다.
‘아노라’가 신선한 점은 애니를 사회 구조가 낳은 순진한 피해자 혹은 한탕하려던 나쁜 년 정도로 두지 않기 때문이다. 애니는 프로페셔널하다. ‘일주일 여친’ 조건으로 1만 달러를 제시받자 1만5000달러로 역제안할 줄 아는 사업가 기질과 받은 만큼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직업윤리를 갖고 있다. 성격도 불같다. 스케줄을 빼주지 않겠다는 클럽 매니저에게 “사대보험 들어주면 네 말을 듣겠다”고 말하고, 가닉이 집에 쳐들어오자 코뼈를 아작 낸다.
일에 진심인 건 애니만이 아니다. 천문학적인 재산을 가진 이반 가족을 제외하면 모든 이가 임금의 위계에 귀속돼 있다. 영화는 스쳐 지나갈 법한 이반의 집 가정부들이나 코니아일랜드 거리에서 불법주차 차량을 견인하는 노동자를 카메라로 놓치지 않고 담는다. 누군가에게 꼼짝없이 고용돼 일해야 하는 건 하수인 3인조도 마찬가지. 이반의 엄마가 토로스에게 전화를 걸면 버럭이답지 않게 매우 공손한 태도로 전화를 받고 곧장 그 일을 시행해야 한다.
사회의 주변부를 다루지만 많은 사람이 션 베이커의 영화에 공감할 수 있는 건 그가 택한 영화 만들기 방식 때문이다. 우디 앨런, 마틴 스코세이지를 배출한 미국 티시예술대학을 졸업한 션 베이커는 자신이 모르는 세상을 그리기 위해 함께 생활하며 리서치 작업을 한다. 관련 업계 종사자들과 친해지고 그 속에서 영화에 출연한 배우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번 영화를 찍을 때도 뉴욕의 스트립 클럽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친분을 맺었고 이들의 자문을 받았다.
25세의 배우 마이키 매디슨도 이 과정에 함께했다. 스트립 클럽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이들을 따라다녔다. 폴 댄스와 러시아 악센트도 익혀야 했다. 그 결과, 가장 찬란한 기록을 남겼다. 그가 클로즈업 샷에서 보여주는 표정은 압도적이다. 매디슨이 아니었다면 ‘아노라’가 이토록 반짝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매디슨은 내년 3월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후보로 점쳐지고 있다.
영화 속 유일한 빛은 3인조의 막내 이고르다. 난장판 속 애니를 묵묵히 쳐다보고 위기가 생기면 무심하게 돕는다. 영화 ‘밀양’에서 험한 일을 당하는 ‘신애’(전도연) 옆에 항상 서 있던 ‘종찬’(송강호)이 떠오른다. 애처로운 눈빛으로 23세 애니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관객의 위치를 영화 속에 형상화해낸 인물처럼 보인다. 2막이 시작된 후 이고르는 대환장 로드무비에 함께하지만 서사에 영향을 주는 건 마지막 10분에 불과하다.
이고르와 아노라가 함께한 마지막 장면은 올해의 라스트 신으로 꼽힐 만하다. 지금껏 애니에게 남자는 돈을 버는 수단이거나 자신을 강간하려는 존재였다. 이고르가 무심한 친절이라는 반짝임을 건넬 때 애니가 해줄 수 있는 건 자신이 잘하는 서비스였을 것이다. 그리고 곧장 무너지는 애니를 이고르가 안아준다. 감독은 애니의 새출발 혹은 재벌 이반의 개과천선 같은 쉬운 선택을 하지 않으면서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아노라 #션베이커 #마이키매디슨 #여성동아
사진제공 UPI코리아
로맨스인가, 로드무비인가
‘아노라’ 포스터.
그런 애니가 스트립 클럽에서 한 남자를 만난다. 구글링하면 나오는 러시아 재벌의 아들 ‘이반’(심지어 약간 티모시 샬라메를 닮았다). 전형적인 스포일드 차일드(spolied child)인 이반은 애니를 집으로 초대하기도 하고, 1만5000달러에 일주일간 파트너가 돼달라고 제안하기도 한다. 부모의 간섭에 반항하고자 했던 이반은 미국 국적을 획득하려는 목적으로 애니에게 프러포즈한다. 둘은 라스베이거스 24시간 드라이브스루 결혼식장에서 키스를 나누고 치기 어린 신혼 생활의 단꿈을 누린다.
리처드 기어와 줄리아 로버츠가 출연한 ‘귀여운 여인’(1990)이 생각나는 평범한 신데렐라 스토리처럼 보였던 이 영화는 43분 시점에 반전을 맞는다. 부모가 결혼 사실을 알고 ‘애새끼’ 이반을 감시하기 위해 고용한 토로스, 가닉, 이고르(나열한 순서는 이들 간의 위계)가 등장한다. 이반의 부모는 토로스에게 내일 미국에 도착할 때까지 결혼을 무효화해놓을 것을 요청한다. 세 남자는 이반의 집으로 쳐들어오고, 이반은 애니를 내버려두고 도망친다. 이제부터 결혼을 지키기 위해 이반을 찾아야 하는 애니와 결혼을 무효화하기 위해 이반을 찾아야 하는 세 남자가 뉴욕을 쏘다니기 시작한다.
칸영화제 수상작이라고 하면 보통은 ‘노잼 영화’로 통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도 유머를 놓치지 않는 션 베이커의 영화는 다르다. ‘버럭이’의 인간화나 다름없는 토로스, 애니의 가격으로 코가 부러지자 그 고통을 계속 하소연하기만 하는 가닉, 역시 성격이 보통은 아닌 애니가 합쳐져 소동이 끊이지 않는다.
이 중 압권인 장면이 있다. 늦은 저녁을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서 토로스는 러시아계 미국인들에게 이반의 사진을 보여주며 “본 적 있냐”고 묻고 다닌다. 한 무리의 젊은이는 “방해하지 말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이반을 찾지 못하면 큰일 나는 상황에서도 토로스는 “요즘 애들은 근성이 없다”고 화를 내며 “나는 17세 때부터 일했는데 너희들은 틱톡과 인스타그램이나 한다”며 소리를 지른다. 영화관 곳곳에서는 폭소가 터졌다. ‘아노라’는 아트하우스 영화라는 흥행 마이너스 요소를 뚫고 개봉 10일 만에 3만 관객을 모았다. 거대 제작사가 선물한 매끈한 퀄리티도 접근 가능성을 높인다.
로맨스와 우당탕탕 로드무비라는 예쁜 포장지로 싸여 있지만 이 영화를 지배하는 장르는 블랙코미디다. 감독 션 베이커는 아메리칸드림의 이면을 다루는 데 능하다. 아이폰5s로 촬영해 그해 최고의 화제작이 됐던 ‘탠저린’(2015)에서는 LA에 사는 트랜스젠더를, 한국에서 10만 관객을 모았던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에서는 디즈니랜드 옆 모텔촌에서 장기 투숙하는 홈리스의 삶을 그렸다.
“나의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세상의 편견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이 영화를 통해 사람들이 성 노동자를 보다 긍정적인 관점에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상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성 노동자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션 베어커는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애니가 하는 성 노동은 사회에서 지워진 일이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을 받는다. 영화 속에 ‘창녀’를 뜻하는 수많은 영어 단어가 등장하는 것도 이를 방증한다. 애니는 ‘어쩌다 저 일을 하게 됐는지’ 같은 인식 속에서 돈을 번다. 이반과 결혼한 뒤에는 ‘재벌을 꼬셔 인생 역전하려던 꽃뱀’ 취급을 당한다.
‘아노라’가 신선한 점은 애니를 사회 구조가 낳은 순진한 피해자 혹은 한탕하려던 나쁜 년 정도로 두지 않기 때문이다. 애니는 프로페셔널하다. ‘일주일 여친’ 조건으로 1만 달러를 제시받자 1만5000달러로 역제안할 줄 아는 사업가 기질과 받은 만큼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직업윤리를 갖고 있다. 성격도 불같다. 스케줄을 빼주지 않겠다는 클럽 매니저에게 “사대보험 들어주면 네 말을 듣겠다”고 말하고, 가닉이 집에 쳐들어오자 코뼈를 아작 낸다.
일에 진심인 건 애니만이 아니다. 천문학적인 재산을 가진 이반 가족을 제외하면 모든 이가 임금의 위계에 귀속돼 있다. 영화는 스쳐 지나갈 법한 이반의 집 가정부들이나 코니아일랜드 거리에서 불법주차 차량을 견인하는 노동자를 카메라로 놓치지 않고 담는다. 누군가에게 꼼짝없이 고용돼 일해야 하는 건 하수인 3인조도 마찬가지. 이반의 엄마가 토로스에게 전화를 걸면 버럭이답지 않게 매우 공손한 태도로 전화를 받고 곧장 그 일을 시행해야 한다.
사회의 주변부를 다루지만 많은 사람이 션 베이커의 영화에 공감할 수 있는 건 그가 택한 영화 만들기 방식 때문이다. 우디 앨런, 마틴 스코세이지를 배출한 미국 티시예술대학을 졸업한 션 베이커는 자신이 모르는 세상을 그리기 위해 함께 생활하며 리서치 작업을 한다. 관련 업계 종사자들과 친해지고 그 속에서 영화에 출연한 배우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번 영화를 찍을 때도 뉴욕의 스트립 클럽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친분을 맺었고 이들의 자문을 받았다.
올해의 마지막 장면
라스베이거스에서 사랑에 빠진 애니와 이반. 영원할 것 같던 둘의 관계는 세 남자의 등장으로 전혀 다른 국면을 맞는다.
영화 속 유일한 빛은 3인조의 막내 이고르다. 난장판 속 애니를 묵묵히 쳐다보고 위기가 생기면 무심하게 돕는다. 영화 ‘밀양’에서 험한 일을 당하는 ‘신애’(전도연) 옆에 항상 서 있던 ‘종찬’(송강호)이 떠오른다. 애처로운 눈빛으로 23세 애니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관객의 위치를 영화 속에 형상화해낸 인물처럼 보인다. 2막이 시작된 후 이고르는 대환장 로드무비에 함께하지만 서사에 영향을 주는 건 마지막 10분에 불과하다.
이고르와 아노라가 함께한 마지막 장면은 올해의 라스트 신으로 꼽힐 만하다. 지금껏 애니에게 남자는 돈을 버는 수단이거나 자신을 강간하려는 존재였다. 이고르가 무심한 친절이라는 반짝임을 건넬 때 애니가 해줄 수 있는 건 자신이 잘하는 서비스였을 것이다. 그리고 곧장 무너지는 애니를 이고르가 안아준다. 감독은 애니의 새출발 혹은 재벌 이반의 개과천선 같은 쉬운 선택을 하지 않으면서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아노라 #션베이커 #마이키매디슨 #여성동아
사진제공 UPI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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