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를 통해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서 벌인 각종 만행을 고발하고 항전 의지를 북돋우고 있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부인 젤렌스카(오른쪽).
코미디언 출신의 한 남자는 대통령이 됐고, 지금은 한 국가의 영웅이 됐다. 그와 함께 쇼비즈니스 분야에서 활동하던 동반자는 영부인을 넘어 이제 국가 수호자로 변신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44)와 아내 올레나 젤렌스카(44) 얘기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다음 날인 2월 25일 젤렌스카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사랑하는 우크라이나인과 같은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두려워하거나 울지 않겠다”는 글을 올렸다. 팔로어가 240만 명이 넘는 그는 3월 6일 SNS에 처참한 상황에 놓인 어린 아이들의 사진을 올리며 “러시아군 침공으로 목숨을 잃고 있는 우크라이나 아이들의 참상을 보도해달라”고 호소했다. 러시아군이 쏜 총과 포탄 때문에 사망하거나 중태에 빠진 생후 18개월 영아부터 14세 어린이까지 수많은 피해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론해 보는 이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젤렌스카는 “(전쟁이 시작된 뒤) 최소 38명의 우크라이나 어린이가 목숨을 잃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망자가 늘고 있을 수 있다”면서 “러시아인이 ‘우리나라 군대는 민간인을 해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 사진들을 보여주라”고 했다.
또 SNS를 통해 우크라이나 상공에 비행금지 구역을 설정해줄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하늘에 비행기가 뜨지 못하게 해달라는 것은 일찍이 젤렌스키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요구했던 내용이다. 그러나 나토 회원국들이 러시아와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려고 비행금지 구역 설정 결정을 주저하자 참지 않은 것이다. 젤렌스카는 이렇게 호소했다.
“나토 국가들에 전합니다. 우크라이나의 하늘을 닫아주세요! 지금 우리 아이들을 구해주세요. 내일이면 그들이 당신의 목숨을 구할 겁니다.”
“나는 증언한다, 우크라이나의 참상을”
3월 4일(현지 시간) 우크라이나 키이우 역에서 피란민들이 열차를 타려고 몰려들자 한 군인이 이들을 힘겹게 통제하고 있다.
이 글에서 그는 “러시아가 지원하는 선전 매체들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특수 작전’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우크라이나 시민들에 대한 대량 학살이다”라고 썼다. 그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 태어난 아기, 식량과 의료품 부족 및 질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들, 포탄에서 도망치는 피란 행렬 등 끔찍한 전쟁의 현실을 보여주며 국제사회는 물론 러시아 일반 시민들에게도 절박하게 ‘전쟁 중단’을 호소했다.
젤렌스카는 1978년 남편 젤렌스키와 같은 우크라이나 중부 크리비리에서 태어났다.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지만 서로 알게 된 것은 대학에 간 이후부터라고 한다. 법학을 전공한 젤렌스키는 건축학도 젤렌스카의 마음을 얻고자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고, 결국 젤렌스카는 당시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지금의 남편과 만남을 시작했다. 2003년 결혼한 이들 커플은 다음 해 딸 올렉산드라, 2013년 아들 키릴을 낳았다.
젤렌스카는 쇼비즈니스 분야에서 일한 커리어 우먼 출신이며 한때 시나리오 작가 활동을 하기도 했다. 유명 코미디언이던 젤렌스키는 아내를 보호하고자 미디어에 가족 모습을 최대한 노출하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다 젤렌스키가 정치 일선에 나서기로 했을 때 젤렌스카는-많은 정치인의 동반자가 그러하듯- 남편의 출마를 반기지 않았다고 한다. 2019년 우크라이나 ‘보그’와 한 인터뷰에서 “(남편이 대통령 출마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행복하지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남편은 늘 전면에 나서지만 나는 그늘에 있을 때 더 편안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말 드라마처럼 젤렌스키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젤렌스카는 친구이자 파트너로서 남편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그는 우크라이나 역사상 ‘최연소 영부인’이기도 하다.
미국 방송 CNN은 젤렌스카의 최근 활동을 집중 조명한 3월 9일 보도에서 “그의 SNS 게시물만큼 전쟁의 실상을 정확하게 알린 것은 없다”면서 “젤렌스카는 우크라이나의 생존을 위한 전투에 집중하며 나라의 수호자로 부상했다”고 평가했다. 영국 ‘텔레그래프’ 역시 젤렌스카를 “우크라이나의 비밀 병기”라고 평했다. 전쟁 직후 제자리를 굳건히 지키면서 “내게 필요한 것은 (피신할) 교통편이 아니라 탄약”이라고 말해 우크라이나 영웅으로 떠오른 남편 젤렌스키와 더불어 부부가 함께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모양새다.
젤렌스카의 절박한 호소 때문일까. 최근 세계 주요 도시를 비롯해 러시아 내부에서도 반전시위가 잇달아 벌어지고 있다. 특히 러시아 국민들은 반전시위에 참가하는 순간 당국에 체포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리로 뛰쳐나오고 있다. 3월 9일 기준 반전시위 가담 후 체포된 사람만 1만300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를 비롯해 최근까지 150여 도시에서 반전시위가 열렸다.
각자의 위치에서 반전을 실천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예를 들어 러시아 최고 발레리나로 꼽히는 올가 스미르노바(30)는 최근 볼쇼이발레단을 탈퇴했다. 스미르노바는 2011년 입단 후 줄곧 간판으로 활약했으며 ‘브누아 드 라 당스’라는 최고 여성 무용수상을 받기도 한 스타다. 그는 탈퇴 소식을 전하며 “내가 러시아를 수치스러워하는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이 세계적 재앙에 무관심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죽고, 거처를 포기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고통스럽다”고 밝혔다.
러시아 언론인들의 퇴사도 이어지고 있다. 러시아 국영방송 채널1 TV 편집자인 마리아 오브샤니코바는 자사 생방송 뉴스 현장에 들어가 ‘반전’이라고 적힌 카드를 들어 보였다. 이후 그의 동료들과 경쟁사 뉴스 프로그램 유명 진행자들도 차례차례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러시아 최대 토크쇼 ‘이브닝 유르간트쇼’ 진행자인 이반 유르간트는 자기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두려움과 고통. 전쟁을 중단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검은색 사각형 게시물을 올렸다.
우크라이나 수호의 선봉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3주가 지난 3월 중순 현재, 러시아의 고립은 다양한 모습으로 확인되고 있다. 푸틴은 3월 16일 TV 연설에서 “러시아인은 진정한 애국자와 쓰레기, 배신자를 구별할 수 있다. 후자를 우연히 입안에 들어온 날파리처럼 뱉어낼 것”이라며 “이처럼 자연스럽고 필수적인 사회의 자체 정화는 우리나라를 강하게 할 것”이라는 ‘막말’을 쏟아냈다. 그만큼 절박하다는 의미다.3월 17일 영국 BBC 보도에 따르면 푸틴은 당초 우크라이나에 벨라루스 같은 친러시아 ‘괴뢰 정권’을 세우려 했다. 하지만 전황이 계획과 다르게 흘러가자 점점 우크라이나의 중립국화 방향으로 계획을 수정하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쉽게 함락될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예상치 못한 강력한 저항과 국제사회의 제재가 맞물리면서 뜻을 이루기 어려워졌다는 분석이다.
푸틴이 절박해진 배경에는 무엇보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강력한 투쟁이 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그의 부인 젤렌스카가 있다. 때론 누구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영웅이 나타난다. 이번에는 젤렌스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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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뉴시스
사진출처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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