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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일상의 아름다움을 서정시로 전하는 영화 ‘퍼펙트 데이즈’

문영훈 기자

2024. 07. 29

일상이 아름답다거나, 소중하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정확하게 포착해 2시간의 서정시로 만드는 일은 어렵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당연한 명제를 천천히 가슴속에 스미게 하는 일을 해낸다.

동이 틀 무렵, 비질 소리가 들리고 노년에 접어든 한 남자가 잠에서 깬다. 이부자리를 개고 화분에 물을 주고 수염을 정리한다. 싱크대에서 간단히 세수를 하고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뒤 집을 나선다. 하늘을 보며 옅은 웃음을 짓는다. ‘오늘도 시작이구나’ 생각이라도 하는 듯. 집 앞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뽑은 남자는 일터로 향한다. 출근길 차 안에서는 1960~80년대 팝송 카세트테이프를 듣는다. 날씨나 기분에 따라 BGM은 달라진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 히라야마의 일상이다. 그의 삶은 꽤 이상적으로 보인다. 누군가는 허드렛일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 공용 화장실 청소일을 하고 있지만 일에 진심이다. “왜 이렇게까지 하냐”는 동료 타카시의 핀잔에도 굴하지 않는다. 직접 만든 도구로 화장실 구석구석을 놓치지 않고 닦는다. 일이 끝나면 집 근처 목욕탕에서 몸을 개운하게 하고, 지하철 역사에 있는 선술집에서 한 잔의 하이볼과 간단한 안주를 먹는다. 자기 전 100엔짜리 문고판 고전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하루.

한 남자의 평범한 일상이라는 점에서 짐 자무시의 영화 ‘패터슨’(2016)이 떠오른다. 패터슨은 버스를 운전하며 일상에서 받은 영감으로 시를 쓴다. 히라야마는 사진을 찍는다. 신사에서 점심을 먹으며 올림푸스 필름 카메라로 나무와 빛을 담는다. 그렇게 담은 사진은 쉬는 날 선별 과정을 통해 철제 박스에 월별로 가지런히 보관된다. 적어도 수년간 히라야마는 자신의 삶을 나란히 쌓인 철제 캔처럼 정돈된 형태로 차곡차곡 쌓아왔다.

그가 구축해놓은 이상적인 세계에도 약간의 변주가 일어난다. 타카시의 오토바이가 고장 나자 그의 차는 퇴근 후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한다. 그렇게 만난 타카시의 여자 친구에게 음악 취향을 선물해주기도 한다. 청소하던 화장실에서 우연히 틱택토 게임을 걸어오는 쪽지를 발견하고 이름도 알지 못하는 누군가와 게임을 주고받기도 한다.

영화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고 한다면 조카 니코가 방문하는 것이다. 엄마, 그러니까 히라야마의 동생과 싸우고 가출한 니코는 며칠간 히라야마 일과에 동행하며 그의 얼굴에 평소보다 더 큰 미소를 선사한다. 하지만 히라야마는 조카와의 행복이 그리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현재가 중요한 사람. “다음에 바다를 보러 가자”는 히라야마의 말에 니코는 “다음이 언제냐”고 묻는다. 히라야마는 이렇게 답한다. “다음은 다음, 지금은 지금.”

독일의 거장, 일본의 국민 배우

히라야마는 도쿄 공공 화장실 청소부로 일한다.

히라야마는 도쿄 공공 화장실 청소부로 일한다.

‘퍼펙트 데이즈’는 도쿄 시부야구의 ‘THE TOKYO TOILET’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2020 도쿄 올림픽에 맞춰 도쿄의 공중 화장실을 예술적으로 재해석하는 기획이다. 공중 화장실을 무대로 단편 영화와 사진집이 제작될 예정이었다. 단편이 아닌 장편을 찍겠다고 역제안한 독일의 거장 빔 벤더스는 3주 만에 시나리오를 쓰고 17일 만에 촬영을 마쳤다. ‘퍼펙트 데이즈’가 보여주는 히라야마의 2주처럼 거장은 가뿐하게 일상을 담아냈다.

일본의 안성기로 불리는 국민 배우 야쿠쇼 코지가 호흡을 맞췄다. 그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기획은 일본 영화사라면 웬만해서는 통과되지 않을, 평생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모험과 같은 기획”이라며 “배우로서 ‘이런 영화가 나오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라면 선택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 영화로 칸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영화는 지극히 일본적이다.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장인 정신은 히라야마 외에도 서점 주인, 선술집 사장의 모습으로도 언뜻언뜻 느껴진다. 히라야마가 안내하는 도쿄의 풍광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평온하다. 1970년대 뉴 저먼 시네마를 대표하는 독일 감독이 일본의 정수를 담아낼 수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다. 그는 일본의 거장 오즈 야스지로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연출할 만큼 일본 영화 팬임을 자청해왔다. 이번 영화에서도 오즈 야스지로의 유작 ‘꽁치의 맛’ 주인공 이름, 히라야마를 그대로 가져왔다.

삶의 빛과 그림자

주인공 히라야마(왼쪽)와 조카 니코.

주인공 히라야마(왼쪽)와 조카 니코.

‘퍼펙트 데이즈’는 한 남자가 자신이 구축해둔 아날로그식 ‘완벽한 나날’을 보내는 힐링 영화에서 그치지 않는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다. 청소부라는 직업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보여주는 장면이 영화의 초반부에 등장한다. 히라야마는 화장실에 갇혀 있는 한 아이를 구해 그의 손을 잡고 부모를 찾기 위해 공원을 걷는다. 잃어버린 아들을 발견한 엄마는 무슨 일이냐고도 묻지 않고 자식의 손을 물티슈로 닦고는 휙 데리고 가버린다. 히라야마는 조카 니코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준다. “세상은 수많은 세상으로 이뤄져 있어서 어떤 세상은 서로 만나지 않기도 한다.”

히라야마가 살기로 한 세상은 소박하고 정돈된 세계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며 최소한의 관계만 맺는 공간. 관객도 그가 왜 강박에 가깝도록 일정한 패턴을 반복하는지 이유가 궁금해진다. 딸을 찾으러 온 동생은 묻는다. “진짜 화장실 청소일을 하는 거야?” 기사까지 대동하고 검정 세단을 타고 온 동생이다. 히라야마는 동생과 유사한 세계에 속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둘은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세계에 살고 있다. 시종일관 미소를 짓던 히라야마는 동생을 안으며 눈물을 흘린다. 히라야마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말해주지 않지만 과거의 아픔이 그의 초연한 태도에 영향을 줬음을 짐작게 한다.

하루와 하루를 연결하는 그의 꿈 장면에도 언뜻언뜻 어둠이 드리운다. 명멸하는 사진으로 이뤄진 꿈은 그날 촬영한 나무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의 얼굴이기도 하다. 시종일관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밝고 단정한 일상에서는 보지 못한 애수가 느껴진다. 그리고 영화의 정점을 찍는 마지막 장면. 니나 시몬의 노래 ‘Feeling Good’이 흘러나오는 또 다른 하루의 출근길. 그의 표정은 옅은 웃음과 울음 사이를 오간다. 햇빛과 도쿄의 여러 조면이 그의 얼굴에 빛과 그림자를 드리운다. 한 남자의 인생을 보여주는 한 편의 단편 영화로도 손색이 없는 이 장면은 마치 남우주연상을 위해 설계된 게 아닐까 할 정도로 야쿠쇼 코지의 연기가 빛난다.

야쿠쇼 코지의 인장을 끝으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면 마지막 ‘코모레비(木漏れ日)’의 뜻이 등장한다.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 히라야마가 항상 프레임에 담는 소재다. 영화와 일맥상통하는 김연수 작가의 편지 구절로 글을 마친다. 김연수 작가도 과거 인터뷰를 통해 “괴로우면 시급하게 나무를 본다”고 말하는 나무 예찬자다.

“너무나 환한 여름에 안부를 묻습니다. 하얀 구름과 쏟아지는 비, 지나가는 바람과 뜨거운 햇살, 지금 여기에 우리의 모든 게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잘못된 선택은 없습니다. 잘못 일어나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좋아하는 일을 더 좋아하시길. 지금 여기에서 시작해 더 먼 미래까지 술술 나아가시길.”

#퍼펙트데이즈 #무비디깅 #여성동아

사진제공 티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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