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퀴리(1867~1934).
나이가 들면서 그 책이 내 인생에 도움이 되었을까 생각해보게 됐다. 천재성으로 포장된 괴팍함으로 주변 사람들이 참 고생했겠다 싶은 인물들이 적지 않다. 한 인물의 성공에 좋은 시기와 뜻밖의 만남 같은 우연한 행운이 없지 않으니 성공담을 덮어놓고 믿기도 어려웠다. 성공담으로 편집해놓은 이야기와 실제 인생의 거리는 나이가 들수록 너무 멀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일을 여전히 좋아한다. 세상일은 내가 어쩔 수 없을 때가 많다. 내가 해야 할 건,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현명한 사람들의 삶을 통해 용기를 얻을 수 있다면 참 고마운 일이다. 폴란드 출신 여성 과학자 마리 퀴리의 인생 이야기를 읽는 건 ‘꺾이지 않은 마음’이 찾아간 길을 따라가 보는 경험이다.
꿈이 시들고 다시 피어나다
1904년 피에르 퀴리와 마리 퀴리(위). 1900년 마리 퀴리의 실험실.
퀴리는 1867년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교육자였던 집안의 다섯째 중 막내였다.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의 지배 아래 있었다. 10세의 퀴리가 겪은 다음의 일화는 식민 지배를 당한 역사가 있는 우리에게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퀴리는 학교에서 역사 시간에 폴란드어로 폴란드 역사를 배우고 있었다. 갑자기 벨이 울렸다. 장학관이 온다는 비밀 신호였다. 몇몇 학생이 폴란드어 교과서와 공책을 모아 기숙사에 숨기고 돌아왔다. 들이닥친 장학관은 교실을 조사하고 선생에게 학생을 지목해달라고 했다. 똑똑한 학생이던 퀴리가 지목됐다. 장학관은 기도문을 외워보라고 명령했다. 당시 러시아 황제는 매일 러시아어로 주기도문을 외우게 함으로써 폴란드인들을 모욕했다. 퀴리는 정확히 암송했다. 그리고 러시아 황제의 이름과 칭호 같은 질문에 대답했다. 장학관이 나가자 퀴리는 울음을 터뜨렸다.
화목하지만 가난한 집안이었다. 퀴리의 형제들은 가정교사로 일해야 했다. 퀴리 역시 가정교사 일로 돈을 벌며 다른 젊은이들과 함께 민족 부흥의 꿈을 꿨다. 비밀리에 이뤄지던 ‘이동 대학’에서 공부하던 17세의 퀴리는 서민층 여성들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퀴리는 당시 자신을 ‘이상적 실증주의자’로 생각했다. 에브 퀴리는 이 시기의 퀴리를 조국애와 인류애, 학문에 대한 동경이 뜨거운 열정으로 엉켜 있었다고 기록했다.
학문에 대한 동경을 실현할 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당시 폴란드 대학에는 여성이 입학할 수 없었다. 공부를 계속하려면 프랑스 파리로 가야 했다. 퀴리의 언니 역시 파리로 가서 의학 공부를 하고 돌아와 폴란드에서 의사로 일하고 싶어 했다. 퀴리는 파리 소르본대학에 유학해서 지식에 대한 갈망을 해소하고, 폴란드로 돌아와 동포들에게 지식을 나눠주는 교육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자매는 모두 파리에 유학 갈 돈이 없었다. 퀴리는 자신이 입주 가정교사 일을 하며 언니의 학비를 대고 돈을 모은 다음, 언니가 공부를 끝내고 자신을 도와줄 것을 제안했다. 1885년, 18세의 퀴리는 직업소개소에서 입주 가정교사 자리를 구했다. 처음 바르샤바에서 구한 부잣집은 실망스러웠다. 게다가 도시에 살면서 저축을 많이 할 수 없었다. 퀴리는 보수를 더 받을 수 있는 자리를 구해 시골로 떠났다.
퀴리는 입주한 집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편 동네 아이들을 모아 폴란드어 교육을 하기 시작했다. 공장 도서실에서 빌려온 사회학과 물리학 책을 밤늦게까지 읽었다. 시대에 뒤처진 교과서의 개략 정도를 읽는 것에 불과했다. 시간이 흘러 입주 가정교사를 하는 집의 장남과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남자는 부모가 가난한 가정교사와의 결혼을 반대하자 결혼을 포기했다. 그런데도 퀴리는 계속 그 집에 머물렀다. 퀴리에겐 돈이 필요했다.
책에는 당시 퀴리의 심경을 보여주는 편지들이 실려 있다. 어떤 편지에서는 어떻게든 지금을 헤쳐나가다 안 되면 세상에 안녕을 고하겠노라고 낙담했다. 어떤 편지에서는 자신은 꿈을 포기했으니 언니와 오빠만은 잘되었으면 좋겠다고 체념했다. 국민과 국가를 위해 일하겠다는 큰 뜻을 품었음에도 마을에서 12명쯤 되는 아이에게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는 게 고작이라고 한탄하는 내용의 편지도 있었다.
1890년 퀴리가 가정교사를 한 지 5년쯤 됐을 때, 언니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다음 해에 결혼하게 됐으니 1년 후에는 파리로 와 함께 살면서 공부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뜻밖에 퀴리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퀴리는 “이미 꿈은 날아가 버렸고, 지금 갑자기 그 가능성이 다시 열린다 해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답장을 썼다. 어린 소녀의 꿈이 어떻게든 세상을 헤쳐나가려다 그만 시들어버린 것이다. 회복은 천천히 이뤄졌다. 퀴리는 입주 가정교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교사인 아버지와 지성을 자극하는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며 원기를 찾아갔다. 이동 대학에도 다시 참여했다.
이때 퀴리에게 큰 기쁨을 준 것은 ‘농공업박물관’이란 이름의 연구소에 들어간 일이었다. 러시아 당국을 속이고 폴란드 청년들에게 과학을 가르치는 연구소였다. 퀴리는 훗날 이곳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해보며 실험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졌다고 회고했다. 마침내 1891년, 여학교를 졸업한 지 8년, 가정교사를 한 지 6년이 지난 어느 날 퀴리는 언니에게 파리로 가도 되냐는 편지를 보냈다.
두 차례 노벨상의 성취
마리 퀴리는 123년의 노벨상 역사에서 두 번의 수상을 한 다섯 명 중 한 명이다.
1895년 퀴리는 피에르 퀴리와 결혼했다. 피에르 퀴리는 이미 소르본대학에서 연구로 많은 업적을 쌓은 물리학자였다. 행복하기만 했으면 좋았겠지만, 결혼으로 퀴리에게 많은 일이 가중됐다. 하루 중 과학 연구에 8시간, 집안 살림에 2∼3시간을 할애했다. 요리와 청소는 온전히 자신의 몫이었다. 퀴리는 곧 임신했고, 아이를 키워야 했다.
왕성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었다. 퀴리는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방사선에 주목했다. 우라늄 화합물이 적은 양의 에너지를 계속 발산하는 것을 발견했다. 방사선 연구는 당시 미지의 영역이었다. 피에르 퀴리는 물리화학 학교에 거듭 부탁해 퀴리가 실험할 공간을 얻었다. 실험을 거듭한 결과 퀴리는 새로운 원소 ‘라듐’을 발견한다. 피에르 퀴리도 연구에 합류했다. 퀴리는 이어서 다른 새로운 원소를 발견하고 ‘폴로늄’이란 이름을 붙였다. 모국인 폴란드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었다.
“물리학자는 언제나 자신이 연구한 것을 모두 발표해야 해요. 우리의 발견에 상업성이 있다 해도 그것은 우연일 뿐이니 우리가 이용해선 안 돼요. 게다가 라듐은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는걸요. … 거기에서 이익을 얻다니 과학자로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라듐이 암 치료 등에 효과를 보임에 따라 상업적 가치를 가지게 됐다. 라듐 관련 산업이 생겨났지만 퀴리 부부는 여전히 가난했고 허술한 실험실에서 연구했다. 라듐 추출 기술에 특허를 받아놓으면 막대한 부를 얻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퀴리는 라듐에서 물질적 이익을 얻으려 하지 않았다. 그것이 퀴리가 생각한 과학의 정신이었다.
1903년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는 노벨물리학상을 앙리 베크렐과 퀴리 부부에게 공동으로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방사선 현상에 대한 연구 업적에 따른 것이었다. 퀴리 부부의 연구에 국제적인 관심이 쏟아졌다. 그때가 돼서야 퀴리는 피에르 퀴리의 실험실에 정식으로 출입할 수 있는 실험주임에 임명됐다. 이전엔 실험실에 젊은 여자가 있다는 걸 그저 묵인했을 뿐이고 퀴리에게는 아무런 자격도, 수당도 주어지지 않았었다.
3년 뒤 피에르 퀴리가 마차에 치어 세상을 떠났다. 에브 퀴리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퀴리의 어깨에 고독과 비밀의 망토가 영원히 걸쳐졌다”고 썼다. 퀴리에게 피에르 퀴리는 사랑하는 남편이자 학문적 동료였다. 퀴리는 피에르 퀴리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실험소장 자리에 임명됐고, 피에르 퀴리의 후임으로 소르본대학 강사 자격을 얻었다. 프랑스 고등교육 사상 여성에게 직급이 부여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퀴리는 여성 과학자로 수차례 최초의 기록을 세웠다. 1922년 퀴리는 여성 최초로 파리의학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됐다. 이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회원 35명이 청원했고, 65명이 선언문에 서명했으며, 후보자들이 모두 입후보를 사퇴해서 가능한 것이었다. 퀴리는 1911년 1월 과학아카데미에 입후보해 1표 차이로 낙선한 적이 있다. 같은 해 12월 라듐과 폴로늄을 분리하고 화합물을 연구한 업적으로 두 번째 노벨상(화학상)을 수상했음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국민과 국가를 위해 일하겠다는 신념대로 퀴리는 2개의 조국, 프랑스와 폴란드를 모두 잊지 않았다. 프랑스에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퀴리는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방사선 차를 만들어 전쟁터로 달려갔다. 전쟁이 끝나고 모국 폴란드가 123년 만에 주권을 찾았을 때 퀴리는 폴란드 바르샤바에 라듐 연구소를 세울 결심을 했다. 1925년 여러 단체와 폴란드 국민들의 도움으로 연구소 건립이 시작됐다.
1934년 7월 4일 퀴리는 세상을 떠났다. 병은 고열을 동반한 악성빈혈이었다. 제1차세계대전 당시 엑스선에 과다하게 노출됐고, 라듐의 방사선에 오랫동안 피폭되었던 게 원인으로 지목됐다. 1995년 퀴리는 피에르 퀴리와 함께 여성 최초로 프랑스가 국가적 위인들을 안치해 기리는 팡테옹으로 이장됐다. 뒤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중꺽마’ 마리 퀴리의 선물
꿈이 시들지 않도록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해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건 개인의 일이다. 이 꿈이 꺾이지 않도록 돕고 개인의 역량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도록 하는 건 사회의 일이다. 개인으로서의 여성이 공적인 삶을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해 사회의 역할이 중요한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훌륭한 과학자였던 퀴리에게 장애물은 너무 많았다. 남성 중심적 교육제도와 경제적 가난을 모두 넘어서야 했다. 또 여자라는 이유로 연구를 위한 직책이나 사회적 지위를 얻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실험실에서 엄청난 연구를 진행하는 동시에 요리하고 청소하고 아이를 키워야 했다. 퀴리는 당시 가족제도와 사회제도가 부과한 어려움을 묵묵히 감당해냈다.
퀴리는 결코 꺾이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개척해갔다. 과학과 가족을 위해 자신의 생을 갈아 넣었다. 유럽의 변방인 폴란드에서 태어난 퀴리가 걸어간 길은 이후 많은 여성 과학자에게 용기와 힘을 안겨줬다. 자신의 꿈이 꺾이지 않도록 온 힘을 기울인 퀴리의 노력은 다음 세대 여성과 인류를 위한 선물로 남았다.
노벨상 수상이 최고의 과학자가 되는 조건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노벨상은 분명 영예로운 상이다. 지금까지 노벨상을 두 번 받은 과학자는 5명뿐이다. 퀴리가 최초로 노벨상을 두 번 수상한 과학자였다. 2023년 경제학, 평화, 생리의학, 물리학 분야에서 4명의 여성이 노벨상을 받았다. 퀴리가 여성 최초의 노벨상을 받은 지 120년 만의 일이다. 더디지만 역사는 이렇게 앞으로 나아간다.
성지연의 다시 만난 그녀들
1970년 출생.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어른의 인생 수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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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동서문화사 wellcomefoundation
사진출처 다음영화 노벨상홈페이지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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