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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반가운 얼굴

말기암 이기고 왕성한 연기활동 펼치는 중견배우 이주실

“매일 소풍 가는 기분으로 즐겁게 촬영하고 있어요”

글·최호열 기자 / 사진ㆍ김형우 기자

2006. 01. 10

13년 전 말기암 판정을 받았지만 정신력으로 암과 싸우며 봉사활동을 하고 지난해에는 대학을 졸업해 진한 감동을 주었던 중견배우 이주실. 그가 최근 암을 떨치고 영화와 드라마에 잇따라 출연하며 왕성한 연기활동을 펼쳐 화제다. 제 2의 배우인생을 시작한 그와의 유쾌한 만남.

말기암 이기고 왕성한 연기활동 펼치는 중견배우 이주실

KBS 수목드라마 ‘황금사과’를 보다 보면 반가운 얼굴이 눈에 띈다. 사람들에게 포근한 사랑을 나눠줘 시청자들에게 절로 ‘그리운 할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경숙(박솔미) 할머니, 93년경 말기암으로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고 브라운관을 떠났던 중견배우 이주실(62)이다. 그는 이후 간간이 암투병을 잘 하고 있다, 사회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뒤늦게 대학에 들어가 졸업을 했다는 소식을 전하긴 했지만 연기를 통해 시청자들과 본격적으로 만난 것은 13년 만의 일이다.
이주실을 근 1년여 만에 다시 만났다. 그는 전보다 더 건강해보였다. 대학에 다닐 때는 이따금 무리하면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는데 지금은 ‘까딱없다’고 한다. 이젠 암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 같다고 말할 정도.
“지난해 2월 현도사회복지대학을 졸업한 후 내친김에 대학원까지 진학했어요. 그리고 지방 5개 지역 TV에서 공동으로 진행하는 난치병환자 돕기 프로그램 ‘365 천국보다 아름다운 세상’에 2년째 고정출연하고 있고요. 또한 전남 영광에 있는 대안학교인 송악중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연극을 가르치고 있어요. 이제 방학하면 그곳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아이들과 지낼 거예요. 게다가 드라마와 영화 촬영 일정이 계속 잡혀 있어 일주일이 바빠요.”
그의 얼굴엔 미소가 넘쳐흘렀다.
“텔레비전에 출연한 게 무척 오랜만인 것 같아요. 단막극에 간간이 출연하긴 했지만 그것도 몇년 전부터는 안 했거든요. 연속극은 13년 만이에요. ‘먼동’을 하다가 암 판정을 받았고, 그 출연료로 수술비를 감당했었죠. 그때도 쪽진 머리를 했는데 이번에도 쪽진 머리네요(웃음). 그래서 여러모로 감회가 새로워요.”
연속극 출연은 그에게 아직 무리가 아닐까 싶었다. 영화나 단막극과 달리 장기간 불규칙한 생활을 해야 하고, 촬영장을 이곳저곳 옮겨다니며 촬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역시 이런 이유 때문에 이전에도 여러 차례 연속극 출연 제안을 받았지만 사양했다고 한다.
“제 건강보다도 아픈 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신경을 쓰는 게 폐를 끼치는 것 같아 사양을 했어요. 그리고 솔직히 배역도 고려하게 되더라고요. 비중이 크든 작든 의미가 있는 역할이었으면 좋겠는데 들어오는 역할이 대부분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그래서 경제적으로 쪼들리더라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영하의 추위 속에 4시간을 떨어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아
이번 드라마 역시 처음에 할머니 역이라는 말을 듣고 거절했다고 한다. 요즘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할머니 역이라는 게 숫자 채우기 이상의 의미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운경 작가의 작품이란 말에 마음을 바꿨다고.
“그분의 작품을 아주 좋아해요. ‘옥이 이모’ ‘서울 뚝배기’ 등 그의 작품은 다른 드라마와는 달라요. 사람의 심성을 이리저리 비틀고, 인연을 억지로 만들고, 가족관계를 해체하는 드라마가 아니라 사람냄새가 진한 드라마잖아요. 그래서 전부터 그런 작품에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어요.”
물론 건강이 받쳐줄까 걱정이 되긴 했지만 한번 부딪쳐보기로 했다고 한다.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되는 거잖아요. 더구나 제작진에서도 아픈 제가 할 만하니까 캐스팅 한 거 아니겠어요. 만약 너무 아프면 그때 또 뭔가 해결할 방법이 있을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어요.”

말기암 이기고 왕성한 연기활동 펼치는 중견배우 이주실

이주실은 캐나다 유학 중에 잠시 귀국한 딸 도란씨와 함께 촬영장을 다니며 모녀의 정을 쌓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일주일에 3일 정도 드라마에 온 힘을 쏟고 있다. 경북 문경, 충남 온양, 강원도 횡성, 경기도 수원 KBS제작센터를 옮겨가며 촬영하는 빡빡한 일정이다. 벌써 촬영을 시작한 지 두 달이 돼가지만 아직까지 건강에 큰 문제가 없다고 한다. 오히려 더 건강해진 것 같다고.
“지금 캐나다에 유학 중인 큰딸 도란이(35)가 한국에 와 있어서 둘이 매일 여행 다니는 기분으로 촬영하고 있어요. 촬영 중에 시간이 남으면 가까운 곳으로 놀러 가기도 하고요. 나중엔 어떨지 모르지만 지금은 정말 재미있어요.”
도시락을 가져와 딸 도란씨와 함께 먹으며 깔깔거리면 다른 배우와 스태프들이 “모녀가 소풍 나온 것 같다”고 한다고. 또한 혼자 촬영장에 갈 땐 방송국 촬영차를 타고 가기보다는 여행을 떠나듯 혼자 배낭 둘러메고 고속버스 타고 간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촬영을 즐기고 있는지 상상이 갔다.
물론 어려움도 있다. 폭우를 맞으며 촬영하기도 하고, 영하의 추운 날씨 속에서 한 신을 찍기 위해 4시간 동안 추위에 떨어야 했던 적도 있다고 한다. 보다 못한 감독이 비를 피해 처마 밑에 서서 연기를 하고, 카메라에 상반신만 잡히니까 무릎을 담요로 덮고 연기를 하라고 했지만 그러면 제대로 된 연기가 안 나오기 때문에 젊은 배우들과 똑같이 했다고. 그런데도 감기 한번 안 걸렸다고 한다.
“정신력인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암을 이긴 것도 정신력인 것 같고요.”
처음 만나는 배우들과 연기를 하는 게 어렵지 않냐고 묻자 그런 것은 없다고 한다. 그보다는 항암치료 후유증으로 인해 한쪽 귀가 잘 안 들려 처음엔 감독이나 상대 배우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애를 먹었다고 한다. 또한 사투리를 익히는 것도 어려웠다고.
“6년 전에 연극 ‘마요네즈’를 하면서 대구 사투리로 연기한 적이 있어요. ‘황금사과’에선 부산 사투리를 해야 하는데 자꾸 대구 사투리가 나오는 거예요. 감독이 그걸 지적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날부터 부산사람이 하는 말을 녹음해서 악보에 옮기고 그 악보를 보며 노래 배우듯 악센트를 배웠어요. 부산 사투리는 억양이 올라갈 때 쇳소리가 나서 억세게 들려요. 그런데 제 배역은 인내하는 스타일이어서 쇳소리가 나면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사투리 억양을 살리면서도 쇳소리가 안 나게 노력했죠. 한 열흘 정도 연습을 하니까 후배 연기자들이 ‘왜 똑같이 사투리를 하는데도 선생님이 하면 부드럽게 들리냐’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들으며 성공했구나 싶었죠.”
시청자 게시판에서 “어제는 할머니 보고 많이 울었다”는 글을 읽으며 “내가 연기를 잘못하지는 않았구나 생각했다”는 그는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집안의 큰 울타리 역할을 하는 할머니 역에 만족한다”며 웃었다.
그는 ‘황금사과’ 외에 KBS 아침드라마 ‘걱정하지마’에도 출연 중이다. 남자주인공 김주환의 어머니로 나오는 것. ‘황금사과’ 촬영 스케줄 때문에 합류를 할 수 없어 당분간은 전화 목소리만 나오지만 앞으로 김주환이 김성령과 결혼하면서 얼굴을 비칠 예정이라고 한다.

“영화 ‘야수’에서 죽는 암환자 연기했지만 전혀 언짢지 않았어요”
그가 완전히 연기에 복귀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대목은 영화다. 지난 해 개봉한 김정은 주연의 영화 ‘사랑니’에 이어 1월 개봉 예정인 권상우·유지태 주연의 영화 ‘야수’에도 출연한 것. 현재 한창 촬영 중인 영화 ‘울어도 좋습니까?’와 류승완 감독이 주인공을 맡은 영화 ‘짝꿍’에도 출연 중이다. 재미있는 것은 ‘울어도…’에서 맡은 교장선생님 역 빼고는 모두 주인공의 어머니 역할을 맡았다는 것.
“이러다 주인공 엄마 전문배우가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요(웃음). 류승완 감독이 그러더군요. 제가 하얀 도화지 같아서 감독이 자기가 원하는 색을 칠하기만 하면 되니까 편하다고요. 과분한 칭찬이죠.”
그는 영화 ‘야수’를 찍으면서 무척 즐거웠다고 한다. 쳐다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은 배우 권상우를 자주 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말기암 이기고 왕성한 연기활동 펼치는 중견배우 이주실

드라마 ‘황금사과’를 통해 13년 만에 연속극에 출연중인 이주실은 새해엔 연극무대에도 설 계획이라고 했다.


“권상우는 착하고 예쁜 짓을 많이 했어요. 먹을 게 있으면 꼭 저를 먼저 챙기고, 제가 피곤한 것 같으면 자기 의자를 가져다 앉으라고 하고요. 영화 촬영할 때 주연에게는 의자를 제공하지만 조연에게는 그런 게 없거든요. 그렇게 마음 씀씀이가 착해요. 집에서도 정말 효자라고 하더라고요. 그걸 느낀 게 하루는 감기에 걸려 촬영장에 왔더라고요. 엄마에게 감기를 옮았다고 하는데, 자기 건강보다 엄마 걱정을 계속하는 거예요.”
그런데 영화 ‘야수’에서 그는 암으로 죽는 역이다. 그로서는 마음이 언짢을 법도 한데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한다.
“감독이 절 캐스팅한 후에도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건 배역일 뿐이다. 난 건강하다. 더구나 내가 암 투병을 한 경험이 있어서 연기를 더 잘 할 수 있지 않겠냐’고 했어요.”
그는 암환자를 연기한다는 고통보다는 무더운 여름날 머리에 비닐 랩을 겹겹이 뒤집어쓰고 촬영을 하는 게 더 고생스러웠다고 한다. 암 환자라 머리가 다 빠져 있어야 하는데 다른 촬영 때문에 머리를 자를 수 없어 비닐 랩을 겹겹이 쓰고 대머리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 임종하는 모습을 촬영하는데 정작 힘들어 한 이는 자신보다 김성수 감독이었다고.
“감독이 많이 울었어요. 한 신 찍고 밖으로 뛰어나가 울고 들어오고, 또 한 신 찍고 뛰쳐나가고 그러더라고요. 감독의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셨거든요. 그래서 제가 김 감독을 위로하느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어요.”
그는 이제 암을 이겼고, 연기복귀를 선언했다. 올 하반기엔 연극무대에 오르는 등 연기활동에 더욱 매진할 것이란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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