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미감을 끌어올리는 공간을 찾아갑니다. 트렌드는 물론 고유성과 정체성을 갖춘 디자인부터 음식, 공간 속 숨은 이야기까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보고, 듣고, 먹는 특별함을 선사합니다.
지하철 을지로3가역 11번 출입구에 맞닿은 건물 3층으로 들어서면 몽환의 숲이 펼쳐진다. 새빨간 네온사인, 바람에 휘날리는 청록색 커튼, 침침한 조명 덕분에 한낮에도 고요함이 흐른다. 공간 곳곳에는 파란 날개가 달린 선풍기, 빈티지한 꽃무늬 테이블보, 레트로 시계 등 마치 1980년대 홍콩 영화 속에 나올 법한 소품들이 나열돼 있다. 일괄적인 분위기의 오브제들은 이 공간이 오로지 한 사람의 취향으로 완성됐다는 걸 짐작하게 한다.
고요한 분위기와 달리 직원들은 꽤 분주해 보인다. 한쪽에서는 필름을 인화하고, 데스크에서는 사진을 종이봉투에 넣어 줄을 선 손님들에게 차례로 전달한다. 어떤 손님은 일회용 카메라 매대 앞에 서서 고심하고, 또 다른 손님은 카메라 가방을 멘 채 직원에게 필름을 건네준다. 이곳은 바로 사진 현상소, 망우삼림(忘憂森林)이다.
망우삼림은 대만 난터우 산림시에 있는 원시 숲인 ‘망우삼림(忘憂森林)’을 의미한다. 늪지대에 솟은 삼나무가 숲의 안개와 어우러져 보고만 있어도 걱정이 사라진다고. 이곳을 본뜬 사진 현상소 망우삼림은 잊을 ‘망’에 근심 ‘우’, 수풀 ‘삼’, 수풀 ‘림’으로 ‘근심을 잊게 해 주는 숲’이라는 뜻이다.
망우삼림은 철저히 윤병주 대표의 감각으로 탄생했다. 사진을 전공한 윤 대표는 예술가 친구들의 그림과 어릴 적 추억을 상기시키는 물건을 켜켜이 쌓아 멋진 공간을 만들어냈다. 일본 빈티지 숍에서 발견한 담배 진열대를 필름 진열장으로 활용하고, 영화 ‘중경삼림’에 나온 시계를 운 좋게 4만 원에 구매해 걸어놓는 등 그의 감도 높은 안목이 빛을 발한다. 당시 경제적 여유가 없어 모든 걸 혼자 해냈다는 그는 “어설픔이 지금의 독특한 느낌을 만들어낸 것 같다”며 “만약 돈을 들였다면 진부한 공간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망우삼림에서 현상하고 스캔한 필름 결과물을 다양한 형태의 굿즈로 만들어주는 4층 20세기인쇄사무실은 또 다른 분위기다. ‘슬램덩크’ 포스터, 모니터, 각종 전자기기 등이 가득하다. 마치 만화책과 콘솔 게임기를 좋아하는 1990년대 남학생의 방 같다.
윤 대표는 선반 속에 넣어둔 애장품을 꺼내 자신의 세계관을 담은 공간들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각 층마다 분위기는 다르지만 결국엔 ‘윤병주’라는 한 사람으로 집결된다. 윤 대표는 “이 공간에 있으면 행복했던 옛 추억이 떠오른다”며 “그 감정이 망우삼림과 20세기인쇄사무실에 오는 손님들에게 전달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사진, 인쇄와 관련된 공간을 차리기 위해 을지로에 터를 잡았나요.
아니요. 어느 날 을지로를 지나다 우연히 이 건물을 봤는데 창문이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제가 영화 ‘쉘 위 댄스’를 정말 좋아하는데, 영화에 나오는 댄스 교습소 원장님이 밖을 내다보던 창문과 비슷하게 생겼거든요. 임대라고 붙어 있기에 바로 건물로 올라가 사장님을 만났어요. 가격이 생각보다 비쌌지만 ‘무엇을 하든 이곳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 ‘운명이다’라는 확신에 바로 계약했습니다.
사진과 관련된 여러 일 중에서 현상소를 차린 이유는 뭔가요.
대학교와 대학원을 다닐 때 사진관에서 일하며 필름 사진 수요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당시 사장님이 관련 기계를 늘릴 정도로 작업량도 많아졌었거든요. 현상소가 경제적인 측면에서 유리하고, 비전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처음엔 스튜디오도 겸했어요. 하지만 내가 찍고 싶은 것이 아닌, 남들이 원하는 사진만 찍는 게 생각보다 힘들더라고요. ‘언젠가는 스튜디오를 그만둬야지’ 생각하다가 필름 현상만으로 가게가 유지되면서 스튜디오를 닫았어요.
필름 사진을 인화하고, 인화한 사진을 굿즈로 만드는 건 기록을 위한 행위죠. 대표님의 성향이 반영된 건가요.
사진작가 생활을 오래 해서 어떻게 보면 삶 자체가 ‘기록’이나 마찬가지예요. 저는 어떤 사물을 이미지나 글로 남겨놓기보다 형태, 실물로 기록하는 편이에요. 사실 어릴 적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제 사진을 찍은 기억이 거의 없거든요. 이민을 많이 다녀서 졸업 사진도 분실됐고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의 이미지 기록이 없으니 물건을 보면서 당시를 기억하고 추억합니다. 만화책이나 비디오테이프를 보면 초등학교 때 혼자 과자와 콜라를 먹으며 낄낄댔던 제 모습이 떠오르는 것처럼요.
이곳을 찾는 손님도 기록에 큰 가치를 두고 있을까요.
필름 카메라를 사용한다는 그 자체가 기록을 중시하는 성향일 거라 생각해요. 필름 카메라가 핸드폰이나 디지털카메라보다 훨씬 번거롭잖아요. 필름을 갈아 끼우고, 현상소에 직접 찾아와 인화를 맡겨야 하니까요. 이런 귀찮음을 감수하면서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는 이유는 기억과 추억을 간직하고 싶어서 아닐까요? 한 장 한 장 모은 사진들은 결국 시간의 기록으로 남게 되고요.
망우삼림과 20세기인쇄사무실에는 시대를 불문한 다양한 오브제들로 가득해요.
병적으로 무언가 모으는 걸 좋아해요. 저는 어릴 적을 추억할 수 있는 요소가 거의 없어요. 심지어 2015년 이전의 사진은 전부 사라져버렸죠. 가끔 ‘유실된 사진들을 중고 시장에서 팔았으면 좋겠다’는 망상을 합니다. 그래서인지 성인이 되고 조금 광적으로 어렸을 때 갖고 싶었던 것, 좋아했던 것, 잃어버린 것, 고장 난 것들을 하나씩 사 모았어요. 이곳에 있는 오브제들은 제가 그동안 수집해온 물건들입니다. 집과 작업실에 있는 것들을 하나씩 가져다 놓았더니 어느새 작은 박물관처럼 돼버렸죠.
아끼는 물건은 주로 혼자만의 비밀스러운 공간에 두지 않나요.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어 이곳에 펼쳐놓았어요. 특히 손님들이 물건을 보고 “나도 이거 알아”라고 말하면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거든요. 몰랐던 정보도 얻을 수 있고요. 또 물건을 통해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고 덩달아 행복해집니다. 이곳에 있는 물건들은 제 자식과 같아요. 너무 소중해서 오랫동안 잘 관리하고 싶은 마음에 유리 장을 설치했죠. 사실 유리가 없어야 더 편하게 물건을 볼 수 있긴 하지만요. 오늘도 갑자기 햇빛이 많이 쏟아져서, 혹시 소품들의 색이 바랠까 노심초사하고 있어요.
물건은 어떤 당위성을 갖고 구매하나요.
주로 1980~90년대를 관통했던 물건들을 삽니다. 그 시대 물건은 앨범 속 사진과 같아요. 그저 예쁘다가 아닌, 어릴 적 추억을 회상할 수 있고 누군가를 기억할 수 있는 매개체니까요. 예를 들어 만약 제가 필름이 갖고 싶다면 1순위는 1980~90년대 제품이어야 해요. 그 후 브랜드, 기능, 컬러 등을 확인합니다. 만약 그 시대의 제품이지만 기능이 너무 떨어지거나 제가 찾는 스타일이 아니라면 차선책으로 다른 시대의 제품을 고려하죠.
오래된 소품들이지만 생동감이 느껴져요.
모두 작동하는 물건이거든요. 저는 작동하지 않으면 사지 않아요. 만약 너무 갖고 싶은 것인데 작동하지 않는다면 세운상가를 찾아가 어떻게든 고쳐냅니다. 저는 물건을 관람이 아닌 사용을 위해 구매해요. 또 가능하면 물건들의 전원을 모두 켜두기 때문에 공간 자체가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어렸을 때 가장 갖고 싶었던 건 뭐였나요.
유리 장 안에 진열돼 있는 램프요. 초등학교 때 아르헨티나로 이민 가서 10개월 정도 살았어요. 당시 해외를 자주 가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반에서 비행기를 타본 아이가 거의 없었어요. 저는 정말 특별한 경험을 했죠. 아르헨티나에서 초등학교도 다녔고 좋은 추억도 많이 쌓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부모님이 이혼하셨어요. 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일을 하셔서 학교에 다녀오면 집에 아무도 없었죠. 당시 어머니가 간식을 사 먹으라고 500원씩 주시면 저는 꼭 비디오를 빌려서 봤어요. 그러다 비디오 가게 사장님과 친해지면서 추천해주시는 해외의 다양한 영화를 접하게 됐죠. 어느 날 영화 ‘해피 투게더’를 보는데 배경이 아르헨티나더라고요. 가슴이 콩닥콩닥했어요. 거기에 제가 좋아하는 배우 장국영까지 나오니 미치겠더라고요. 모든 장면이 인상 깊었지만, 그중 제 눈길을 사로잡은 게 이구아수폭포가 그려진 램프였어요. 아르헨티나에 있을 때 이구아수폭포를 못 가봤거든요. 그러니 더 흥미로웠죠. 당시에는 돈이 없어서 구매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저 램프를 꼭 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후 ‘해피 투게더’ 개봉 10주년을 맞아 램프를 판매한다고 해서 당장 구매했어요. 당시 200만 원의 고가였지만 돈이 아깝지 않았어요. 아마 더 비싸도 샀을 거예요. 저 램프를 집에서 보관하다 망우삼림에 가져오게 됐고, 많은 분께 소개할 수 있다는 게 아직도 꿈만 같네요.
망우삼림은 필름 현상을 하지 않아도 소품을 맘껏 구경하고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네요.
맞아요. 처음 이곳을 찾는 손님 대부분이 필름이나 인화 과정에 대해 궁금해하시더라고요. 저희에게 다양한 걸 물어보고 싶은데 분위기상 그냥 나가는 분들도 있었죠. 그게 좀 아쉬웠어요. 이곳을 찾는 목적을 단지 ‘현상’으로 단정 짓고 싶지 않았거든요. 여러 가지 오브제를 구경하며 영감을 받고, 직원은 물론 손님들과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곳이길 바랐어요. 그래서 공간 한편에 테이블을 놓았어요. 누구나 편안히 앉아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 거죠. 이 공간을 통해 서로 친해진 손님도 많더라고요. 저 역시 많은 분과 대화를 나누고 있고요.
기억에 남는 손님이 있나요.
몇 년 전 네다섯 살 정도 돼 보이는 남매가 엄마와 함께 망우삼림에 왔어요. 어머니가 오빠에게 돈을 쥐여주며 직접 접수를 하라고 하더라고요. 필름 카메라 인화는 설명도 복잡하고 전문 용어도 많아요. 성인도 이해하기 어렵죠. 그런데 아이들이 이곳에 오기 전에 어머니와 필름 카메라에 관해 공부를 했나 봐요. 또 어머님은 무엇이든 아이들이 직접 경험하고 체험하는 교육을 지향하시는 것 같았어요. 오빠가 동생 손을 꼭 잡고 끝까지 꿋꿋이 해내는데 그 모습이 기특하면서 재미있었어요. 어쨌든 오빠가 선택한 방식대로 현상 스캔을 했는데 결과물이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아이들의 낮은 시선에서 본 사물과 풍경들이 너무 자유롭고 신선했죠. 그래서 어머님께 메시지를 보냈어요. “아이들이 찍은 사진이 귀감이 됐다. SNS에 올려서 많은 분과 스토리를 공유해도 되겠냐”고요. 대신 제가 일회용 카메라 한 대씩 선물하겠다고 했습니다. 어머님이 너무 기뻐하면서 허락해주셔서 SNS에 글과 사진을 업로드한 적이 있어요.
20세기인쇄사무실에서는 망우삼림에서 인화한 사진을 굿즈로 제작해줘요. 자신의 사진을 굿즈로 제작한다는 게 생소하게 느껴져요.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는 분 대부분이 아기자기한 걸 좋아하더라고요. 그래서 사진을 굿즈로 만드는 데 크게 거부감이 없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필름 현상을 하면 사진을 인화해서 앨범에 꽂아뒀지만 요즘은 주로 스캔을 받아서 인스타그램에 저장하는 분이 많아요. 이런 사람들에게 좀 더 재미있고 색다른 인화의 경험을 선물하고 싶었어요. 일회성은 아니면서도 트렌디한 방법에 대해 고민하다 종이가 아닌 옷, 모자 등에 사진을 인화하는 방법을 선택했죠. 하나의 콘텐츠를 만드는 것과 다름없는 이 과정들을 신선하게 느끼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망우삼림과 20세기인쇄사무실은 필름 카메라가 없으면 정상적인 운영이 불가능하겠네요.
우려했던 부분이에요. 몇 년 전부터 필름 카메라가 유행하면서 이곳이 더욱 유명해진 건 사실이거든요. 하지만 망우삼림을 연 지 6년 정도 되니 이곳만의 고유성과 브랜드 철학, 톤 앤드 매너가 어느 정도 갖춰졌어요. 망우삼림, 20세기인쇄사무실을 필름 카메라로 단정 짓는 분들도 있겠지만, 브랜드의 분위기와 희소성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고 생각해요. 극단적으로 업종을 바꾸게 되더라도 이곳만의 취향과 감성을 믿고 많은 분이 찾아주실 거라 감히 예상해봅니다.
대표님의 취향이 바뀌면 이곳도 변하지 않을까요.
제 나이 마흔에 취향이 바뀌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하하). 물론 새로운 무언가를 좋아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결국은 지금의 감성과 연결돼 있을 것 같아요. 만약 제 취향이 바뀌면 그 취향에 맞는 새로운 공간을 다시 만들겠죠. 망우삼림과 20세기인쇄사무실의 스타일이 바뀔 일은 절대 없습니다.
대표님 집도 이런 분위기인가요.
집은 완전히 달라요. 화이트 톤에 물건은 최대한 안 보이게 배치해놓았어요. 망우삼림과 비슷하게 집을 꾸민 적도 있는데 관리가 힘들더라고요. 집은 제가 오로지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어요. 워낙 움직이는 걸 싫어해서 모션 베드 등 자동화된 가구들로 갖춰져 있습니다(웃음).
현상소에서 굿즈 제작까지, 다음 스텝은 무엇인가요.
새로운 계획은 없어요. 일단 20세기인쇄사무실을 좀 더 열심히 홍보해야죠. 그리고 개인 촬영 작업의 비중을 높이려고요. 꾸준히 하고는 있지만 장사하면서 개인 사진을 찍기는 쉽지 않더라고요. 올해 남은 시간 동안 개인 작업 비중을 늘려 내년에는 꼭 전시회를 해보고 싶어요.
망우삼림에서 전시회를 해도 재미있겠네요.
절대 안 되죠. 이곳은 이미 전시회장이나 다름없잖아요. 전시회를 한다면 사진에 집중할 수 있는 지극히 전시장다운 공간에서 진행할 거예요.
#망우삼림 #20세기인쇄사무실 #필름카메라 #필름현상 #굿즈 #여성동아
사진 김도훈
사진출처 인스타그램
지하철 을지로3가역 11번 출입구에 맞닿은 건물 3층으로 들어서면 몽환의 숲이 펼쳐진다. 새빨간 네온사인, 바람에 휘날리는 청록색 커튼, 침침한 조명 덕분에 한낮에도 고요함이 흐른다. 공간 곳곳에는 파란 날개가 달린 선풍기, 빈티지한 꽃무늬 테이블보, 레트로 시계 등 마치 1980년대 홍콩 영화 속에 나올 법한 소품들이 나열돼 있다. 일괄적인 분위기의 오브제들은 이 공간이 오로지 한 사람의 취향으로 완성됐다는 걸 짐작하게 한다.
고요한 분위기와 달리 직원들은 꽤 분주해 보인다. 한쪽에서는 필름을 인화하고, 데스크에서는 사진을 종이봉투에 넣어 줄을 선 손님들에게 차례로 전달한다. 어떤 손님은 일회용 카메라 매대 앞에 서서 고심하고, 또 다른 손님은 카메라 가방을 멘 채 직원에게 필름을 건네준다. 이곳은 바로 사진 현상소, 망우삼림(忘憂森林)이다.
망우삼림은 대만 난터우 산림시에 있는 원시 숲인 ‘망우삼림(忘憂森林)’을 의미한다. 늪지대에 솟은 삼나무가 숲의 안개와 어우러져 보고만 있어도 걱정이 사라진다고. 이곳을 본뜬 사진 현상소 망우삼림은 잊을 ‘망’에 근심 ‘우’, 수풀 ‘삼’, 수풀 ‘림’으로 ‘근심을 잊게 해 주는 숲’이라는 뜻이다.
망우삼림은 철저히 윤병주 대표의 감각으로 탄생했다. 사진을 전공한 윤 대표는 예술가 친구들의 그림과 어릴 적 추억을 상기시키는 물건을 켜켜이 쌓아 멋진 공간을 만들어냈다. 일본 빈티지 숍에서 발견한 담배 진열대를 필름 진열장으로 활용하고, 영화 ‘중경삼림’에 나온 시계를 운 좋게 4만 원에 구매해 걸어놓는 등 그의 감도 높은 안목이 빛을 발한다. 당시 경제적 여유가 없어 모든 걸 혼자 해냈다는 그는 “어설픔이 지금의 독특한 느낌을 만들어낸 것 같다”며 “만약 돈을 들였다면 진부한 공간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망우삼림에서 현상하고 스캔한 필름 결과물을 다양한 형태의 굿즈로 만들어주는 4층 20세기인쇄사무실은 또 다른 분위기다. ‘슬램덩크’ 포스터, 모니터, 각종 전자기기 등이 가득하다. 마치 만화책과 콘솔 게임기를 좋아하는 1990년대 남학생의 방 같다.
윤 대표는 선반 속에 넣어둔 애장품을 꺼내 자신의 세계관을 담은 공간들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각 층마다 분위기는 다르지만 결국엔 ‘윤병주’라는 한 사람으로 집결된다. 윤 대표는 “이 공간에 있으면 행복했던 옛 추억이 떠오른다”며 “그 감정이 망우삼림과 20세기인쇄사무실에 오는 손님들에게 전달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사진, 인쇄와 관련된 공간을 차리기 위해 을지로에 터를 잡았나요.
아니요. 어느 날 을지로를 지나다 우연히 이 건물을 봤는데 창문이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제가 영화 ‘쉘 위 댄스’를 정말 좋아하는데, 영화에 나오는 댄스 교습소 원장님이 밖을 내다보던 창문과 비슷하게 생겼거든요. 임대라고 붙어 있기에 바로 건물로 올라가 사장님을 만났어요. 가격이 생각보다 비쌌지만 ‘무엇을 하든 이곳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 ‘운명이다’라는 확신에 바로 계약했습니다.
사진과 관련된 여러 일 중에서 현상소를 차린 이유는 뭔가요.
대학교와 대학원을 다닐 때 사진관에서 일하며 필름 사진 수요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당시 사장님이 관련 기계를 늘릴 정도로 작업량도 많아졌었거든요. 현상소가 경제적인 측면에서 유리하고, 비전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처음엔 스튜디오도 겸했어요. 하지만 내가 찍고 싶은 것이 아닌, 남들이 원하는 사진만 찍는 게 생각보다 힘들더라고요. ‘언젠가는 스튜디오를 그만둬야지’ 생각하다가 필름 현상만으로 가게가 유지되면서 스튜디오를 닫았어요.
필름 사진을 인화하고, 인화한 사진을 굿즈로 만드는 건 기록을 위한 행위죠. 대표님의 성향이 반영된 건가요.
사진작가 생활을 오래 해서 어떻게 보면 삶 자체가 ‘기록’이나 마찬가지예요. 저는 어떤 사물을 이미지나 글로 남겨놓기보다 형태, 실물로 기록하는 편이에요. 사실 어릴 적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제 사진을 찍은 기억이 거의 없거든요. 이민을 많이 다녀서 졸업 사진도 분실됐고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의 이미지 기록이 없으니 물건을 보면서 당시를 기억하고 추억합니다. 만화책이나 비디오테이프를 보면 초등학교 때 혼자 과자와 콜라를 먹으며 낄낄댔던 제 모습이 떠오르는 것처럼요.
사진작가이자 망우삼림과 20세기인쇄사무실을 운영하는 윤병주 대표.
필름 카메라를 사용한다는 그 자체가 기록을 중시하는 성향일 거라 생각해요. 필름 카메라가 핸드폰이나 디지털카메라보다 훨씬 번거롭잖아요. 필름을 갈아 끼우고, 현상소에 직접 찾아와 인화를 맡겨야 하니까요. 이런 귀찮음을 감수하면서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는 이유는 기억과 추억을 간직하고 싶어서 아닐까요? 한 장 한 장 모은 사진들은 결국 시간의 기록으로 남게 되고요.
망우삼림과 20세기인쇄사무실에는 시대를 불문한 다양한 오브제들로 가득해요.
병적으로 무언가 모으는 걸 좋아해요. 저는 어릴 적을 추억할 수 있는 요소가 거의 없어요. 심지어 2015년 이전의 사진은 전부 사라져버렸죠. 가끔 ‘유실된 사진들을 중고 시장에서 팔았으면 좋겠다’는 망상을 합니다. 그래서인지 성인이 되고 조금 광적으로 어렸을 때 갖고 싶었던 것, 좋아했던 것, 잃어버린 것, 고장 난 것들을 하나씩 사 모았어요. 이곳에 있는 오브제들은 제가 그동안 수집해온 물건들입니다. 집과 작업실에 있는 것들을 하나씩 가져다 놓았더니 어느새 작은 박물관처럼 돼버렸죠.
아끼는 물건은 주로 혼자만의 비밀스러운 공간에 두지 않나요.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어 이곳에 펼쳐놓았어요. 특히 손님들이 물건을 보고 “나도 이거 알아”라고 말하면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거든요. 몰랐던 정보도 얻을 수 있고요. 또 물건을 통해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고 덩달아 행복해집니다. 이곳에 있는 물건들은 제 자식과 같아요. 너무 소중해서 오랫동안 잘 관리하고 싶은 마음에 유리 장을 설치했죠. 사실 유리가 없어야 더 편하게 물건을 볼 수 있긴 하지만요. 오늘도 갑자기 햇빛이 많이 쏟아져서, 혹시 소품들의 색이 바랠까 노심초사하고 있어요.
유실된 기억을 상기시키는 물건들
3층 망우삼림에는 주로 8090년대 공산품을, 4층에는 필름 사진을 활용한 굿즈와 각종 전자 기기 등을 장식했다.
주로 1980~90년대를 관통했던 물건들을 삽니다. 그 시대 물건은 앨범 속 사진과 같아요. 그저 예쁘다가 아닌, 어릴 적 추억을 회상할 수 있고 누군가를 기억할 수 있는 매개체니까요. 예를 들어 만약 제가 필름이 갖고 싶다면 1순위는 1980~90년대 제품이어야 해요. 그 후 브랜드, 기능, 컬러 등을 확인합니다. 만약 그 시대의 제품이지만 기능이 너무 떨어지거나 제가 찾는 스타일이 아니라면 차선책으로 다른 시대의 제품을 고려하죠.
오래된 소품들이지만 생동감이 느껴져요.
모두 작동하는 물건이거든요. 저는 작동하지 않으면 사지 않아요. 만약 너무 갖고 싶은 것인데 작동하지 않는다면 세운상가를 찾아가 어떻게든 고쳐냅니다. 저는 물건을 관람이 아닌 사용을 위해 구매해요. 또 가능하면 물건들의 전원을 모두 켜두기 때문에 공간 자체가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윤병주 대표가 어릴 적 가장 갖고 싶었던 이구아수폭포 램프.
유리 장 안에 진열돼 있는 램프요. 초등학교 때 아르헨티나로 이민 가서 10개월 정도 살았어요. 당시 해외를 자주 가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반에서 비행기를 타본 아이가 거의 없었어요. 저는 정말 특별한 경험을 했죠. 아르헨티나에서 초등학교도 다녔고 좋은 추억도 많이 쌓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부모님이 이혼하셨어요. 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일을 하셔서 학교에 다녀오면 집에 아무도 없었죠. 당시 어머니가 간식을 사 먹으라고 500원씩 주시면 저는 꼭 비디오를 빌려서 봤어요. 그러다 비디오 가게 사장님과 친해지면서 추천해주시는 해외의 다양한 영화를 접하게 됐죠. 어느 날 영화 ‘해피 투게더’를 보는데 배경이 아르헨티나더라고요. 가슴이 콩닥콩닥했어요. 거기에 제가 좋아하는 배우 장국영까지 나오니 미치겠더라고요. 모든 장면이 인상 깊었지만, 그중 제 눈길을 사로잡은 게 이구아수폭포가 그려진 램프였어요. 아르헨티나에 있을 때 이구아수폭포를 못 가봤거든요. 그러니 더 흥미로웠죠. 당시에는 돈이 없어서 구매하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저 램프를 꼭 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후 ‘해피 투게더’ 개봉 10주년을 맞아 램프를 판매한다고 해서 당장 구매했어요. 당시 200만 원의 고가였지만 돈이 아깝지 않았어요. 아마 더 비싸도 샀을 거예요. 저 램프를 집에서 보관하다 망우삼림에 가져오게 됐고, 많은 분께 소개할 수 있다는 게 아직도 꿈만 같네요.
망우삼림은 필름 현상을 하지 않아도 소품을 맘껏 구경하고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네요.
맞아요. 처음 이곳을 찾는 손님 대부분이 필름이나 인화 과정에 대해 궁금해하시더라고요. 저희에게 다양한 걸 물어보고 싶은데 분위기상 그냥 나가는 분들도 있었죠. 그게 좀 아쉬웠어요. 이곳을 찾는 목적을 단지 ‘현상’으로 단정 짓고 싶지 않았거든요. 여러 가지 오브제를 구경하며 영감을 받고, 직원은 물론 손님들과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곳이길 바랐어요. 그래서 공간 한편에 테이블을 놓았어요. 누구나 편안히 앉아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 거죠. 이 공간을 통해 서로 친해진 손님도 많더라고요. 저 역시 많은 분과 대화를 나누고 있고요.
기억에 남는 손님이 있나요.
몇 년 전 네다섯 살 정도 돼 보이는 남매가 엄마와 함께 망우삼림에 왔어요. 어머니가 오빠에게 돈을 쥐여주며 직접 접수를 하라고 하더라고요. 필름 카메라 인화는 설명도 복잡하고 전문 용어도 많아요. 성인도 이해하기 어렵죠. 그런데 아이들이 이곳에 오기 전에 어머니와 필름 카메라에 관해 공부를 했나 봐요. 또 어머님은 무엇이든 아이들이 직접 경험하고 체험하는 교육을 지향하시는 것 같았어요. 오빠가 동생 손을 꼭 잡고 끝까지 꿋꿋이 해내는데 그 모습이 기특하면서 재미있었어요. 어쨌든 오빠가 선택한 방식대로 현상 스캔을 했는데 결과물이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아이들의 낮은 시선에서 본 사물과 풍경들이 너무 자유롭고 신선했죠. 그래서 어머님께 메시지를 보냈어요. “아이들이 찍은 사진이 귀감이 됐다. SNS에 올려서 많은 분과 스토리를 공유해도 되겠냐”고요. 대신 제가 일회용 카메라 한 대씩 선물하겠다고 했습니다. 어머님이 너무 기뻐하면서 허락해주셔서 SNS에 글과 사진을 업로드한 적이 있어요.
20세기인쇄사무실에서는 망우삼림에서 인화한 사진을 굿즈로 제작해줘요. 자신의 사진을 굿즈로 제작한다는 게 생소하게 느껴져요.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는 분 대부분이 아기자기한 걸 좋아하더라고요. 그래서 사진을 굿즈로 만드는 데 크게 거부감이 없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필름 현상을 하면 사진을 인화해서 앨범에 꽂아뒀지만 요즘은 주로 스캔을 받아서 인스타그램에 저장하는 분이 많아요. 이런 사람들에게 좀 더 재미있고 색다른 인화의 경험을 선물하고 싶었어요. 일회성은 아니면서도 트렌디한 방법에 대해 고민하다 종이가 아닌 옷, 모자 등에 사진을 인화하는 방법을 선택했죠. 하나의 콘텐츠를 만드는 것과 다름없는 이 과정들을 신선하게 느끼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망우삼림에는 필름을 인화하고 사진을 보관하는 작은 공간도 마련돼 있다.
우려했던 부분이에요. 몇 년 전부터 필름 카메라가 유행하면서 이곳이 더욱 유명해진 건 사실이거든요. 하지만 망우삼림을 연 지 6년 정도 되니 이곳만의 고유성과 브랜드 철학, 톤 앤드 매너가 어느 정도 갖춰졌어요. 망우삼림, 20세기인쇄사무실을 필름 카메라로 단정 짓는 분들도 있겠지만, 브랜드의 분위기와 희소성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고 생각해요. 극단적으로 업종을 바꾸게 되더라도 이곳만의 취향과 감성을 믿고 많은 분이 찾아주실 거라 감히 예상해봅니다.
대표님의 취향이 바뀌면 이곳도 변하지 않을까요.
제 나이 마흔에 취향이 바뀌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하하). 물론 새로운 무언가를 좋아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결국은 지금의 감성과 연결돼 있을 것 같아요. 만약 제 취향이 바뀌면 그 취향에 맞는 새로운 공간을 다시 만들겠죠. 망우삼림과 20세기인쇄사무실의 스타일이 바뀔 일은 절대 없습니다.
대표님 집도 이런 분위기인가요.
집은 완전히 달라요. 화이트 톤에 물건은 최대한 안 보이게 배치해놓았어요. 망우삼림과 비슷하게 집을 꾸민 적도 있는데 관리가 힘들더라고요. 집은 제가 오로지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어요. 워낙 움직이는 걸 싫어해서 모션 베드 등 자동화된 가구들로 갖춰져 있습니다(웃음).
현상소에서 굿즈 제작까지, 다음 스텝은 무엇인가요.
새로운 계획은 없어요. 일단 20세기인쇄사무실을 좀 더 열심히 홍보해야죠. 그리고 개인 촬영 작업의 비중을 높이려고요. 꾸준히 하고는 있지만 장사하면서 개인 사진을 찍기는 쉽지 않더라고요. 올해 남은 시간 동안 개인 작업 비중을 늘려 내년에는 꼭 전시회를 해보고 싶어요.
망우삼림에서 전시회를 해도 재미있겠네요.
절대 안 되죠. 이곳은 이미 전시회장이나 다름없잖아요. 전시회를 한다면 사진에 집중할 수 있는 지극히 전시장다운 공간에서 진행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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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도훈
사진출처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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