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 딛고 돌아온 ‘농구 전설’ 박찬숙
힘들다는 말과 달리 ‘한국 여자농구의 전설’ 박찬숙 감독은 예의 그 호탕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인터뷰 며칠 전 열린 6월 ‘2024 태백시장배 전국실업농구연맹전’에서 박찬숙 감독이 이끄는 서대문구청 여자농구팀은 3경기 전승을 거두며 우승을 차지했다. 지난해 3월 창단한 서대문구청 여자 실업농구단은 김천시청, 사천시청, 대구시체육회, 서울시농구협회에 이은 국내 5번째 여자농구 실업 팀이다. 올해만 벌써 전국대회 2연패를 달성했다. 2개월 전인 4월 경북 김천에서 열린 ‘2024 전국실업농구연맹전’에서 역사적인 창단 첫 우승을 기록했다.
돌풍의 핵심에는 박찬숙 감독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농구를 시작해 17세 나이에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 센터면서도 빠른 발과 정확한 슛으로 코트를 점령한 박찬숙 감독은 두말하면 입 아픈 한국 여자농구의 레전드다. 특히 대한민국 구기종목 사상 최초로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1984년 LA 올림픽에 대표 팀 주장으로 출전했다.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도 여자농구 국가대표 감독, 한국여자프로농구 경기운영본부장 등을 역임하며 수십 년간 농구인으로 살아온 박찬숙 감독이지만, 본격적으로 한 구단의 감독 자리를 맡은 건 처음이다. 서대문문화체육회관에서 만난 박 감독은 “내가 원래 목표가 정해지면 올인하는 스타일이다. 집중하기 위해 선수단 숙소 옆으로 이사까지 왔다”며 “지금 휴가 기간이지만 숙소에 남아 있는 선수들이 있길래 불러내 점심 사 먹이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간절한 선수, 스카우트 아닌 공모로 발탁
어떻게 창단하는 팀 감독을 맡게 된 건가요.제가 국가대표 감독과 대한체육회 부회장 등 여러 자리에 있어봤지만, 항상 마음속에는 멋진 팀을 맡아 이끌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이 나이에 도전이 쉽진 않죠. 그래도 기회가 오면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무엇보다 이성헌 서대문구청장님이 제가 감독을 맡아야 팀을 창단하겠다고 하셨어요. 얼마나 감사한 일이에요. 저도 저지만, 많은 선수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창단하면서 팀을 꾸릴 때 스카우트가 아닌 공모를 한 건가요.
지금 우리 선수들이 어떻게 보면 약간 상처가 있는 친구들이에요. 프로에서 조기 은퇴를 했거나 고등학교 졸업하고 프로 팀에 선발되지 못한 친구, 대학 졸업 후 취업하지 못한 이들 중 가능성이 있는 선수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준 거죠. 선수들이 열심히 해서 프로 팀에서 러브 콜이 오면 좋겠어요.
지금 선수는 모두 몇 명인가요.
지난해에는 예산 문제도 있고 선수 수급도 쉽지 않아서 9명으로 시작했어요. 그런데 9명에서 1∼2명이 다치거나 하면, 경기는 무조건 5명이 뛰어야 하니까 텅 빈 벤치가 늘 고민이었죠. 다행히 올해는 12명 엔트리를 다 채웠어요. 지금 주장인 윤나리 선수 같은 경우는 ‘저런 베테랑이 우리 팀에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만 했지, 잘하고 있는 친구를 데려올 순 없었거든요. 그런데 우리 팀에 오고 싶다고 해서 무조건 오케이했죠. 우리 선수들 정말 다 열심히 해요. 그만큼 우리도 선수들에게 잘해주려고 하고요. 저도, 선수들도 다 만족스러운 상태예요.
시작은 미약했지만 다른 팀에 서대문구청 팀이 좋기로 소문이 났나 봅니다.
하하. 저와 뛰어보고 싶다는 선수도 있지만, 우리 팀에 오고 싶어 할 만도 한 게 지난겨울에는 선수들을 대상으로 바리스타, 어르신 돌봄 등 직업 체험을 진행했어요. 사실 실업 팀은 여기서 은퇴하면 끝이에요. 그럼 평생 농구만 하던 친구들이 어디 들어갈 데가 없잖아요. 여태까지 은퇴 후를 생각해주는 전례가 없었는데, 특별한 기회를 준 구청장님께 감사해요. 그러니까 다들 더 열심히 하죠.
의욕 넘치는 선수들 지도하려면 체력 관리를 잘하셔야겠어요. 어떻게 관리하세요.
일단 많이 움직여요. 어깨와 무릎이 아파서 격한 운동은 못 하지만 선수들이 웨이트 트레이닝할 때 저도 옆에서 방해되지 않게 자전거를 30분씩 타고 그래요.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게 중요하기도 하고요. 제가 체육관에서는 웬만하면 웃질 않기 때문에 선수들이 저를 무서워하거든요. 지난해에는 숙소에서 같이 지내며 그날그날 선수들 컨디션 체크하고 그랬어요. 이젠 성격이나 특징을 다 파악해서 숙소를 나왔습니다(웃음). 감독이면서 큰엄마 같은 존재로 봐주면 좋을 것 같아요. 선수들이 마음 편히 잘 먹고 잘 자게끔 해주는 것도 제 일이에요.
후배들 길 열어준 최초의 주부 선수
1984년 LA 올림픽 당시 무릎 부상으로 은퇴를 고민하다 출전해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엄마의 새 출발을 축하해주러 온 서효명 · 수원 남매.
아, 올림픽 이야기하면 화가 납니다. 제가 따끔한 말만 해서 저를 안 좋아하는 후배들이 많을 텐데요. 국가에서 부른 선수들이 사명감을 갖고 해야죠. 이런 이야기를 하면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을 떠올릴 텐데, 뛰는 게 직업이면 열심히 뛰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건 대표 팀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에요. 요즘 젊은 선수들은 훈련 강도를 조금만 높이면 다음 날 바로 환자가 돼요. 좀 참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번에 일본은 강호 스페인과 캐나다를 꺾고 본선에 진출했는데요.
일본은 20~30년 전부터 한국의 유능한 지도자들을 데리고 가 한국식으로 지도하고 투자도 많이 했습니다. 게다가 선수들 정신력도 뒷받침이 되고요. 그 결과 지금 일본은 FIBA 세계랭킹 톱 10안에 들었잖아요. 이걸 보고 있으면 안타깝죠. 농구에도 김연경 같은 선수가 필요해요. 혼자 1인 다역을 하면서 팀의 중심을 잡아주는 그런 선수요. 그러면 그 힘이 다른 선수들한테도 전달이 되거든요. 지금 우리가 아무리 선수층이 얇다고 해도 뛰어난 선수는 분명 있어요.
여자축구의 경우 몇 해 전부터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데, 부럽진 않나요.
사실 농구는 매일 연습하기 쉽지 않아서 일반인들이 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라요. 특히 중년 여성에겐 어려운 종목이죠. 일단 점프가 쉽지 않아요. 공을 손으로 주고받아야 하는데 볼 컨트롤이 되지 않으면 공이 무거워 손가락이 부러질 수도 있어요. 발로 차는 것과 손으로 하는 건 아무래도 차이가 있죠. 매일 훈련하지 않으면 다쳐요.
감독님이 결혼과 출산 후, 최초의 주부 선수로 대만 리그에서 뛴 게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네요.
그때만 해도 결혼하면 선수로서는 끝인 시대였어요. 그런데 전 아이 낳고 난 다음에 몸 상태가 더 좋은 거예요. 더 잘 뛰고 싶단 욕심도 나고요. 평소 몸 관리에 신경을 많이 쓴 덕분이겠죠. 저는 죽을 때까지 관리를 잘하고 싶어요. 가는 세월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열심히 관리해서 젊은 친구들과 같이 뛰며 혈기 왕성하게 살고 싶어요.
1985년 당시 태평양화학(현 하나원큐)의 주전 선수였던 박찬숙 감독은 돌연 은퇴 후 결혼을 했다. 이듬해인 1986년 딸을 출산했으나 2년 만에 대만 리그로 옮겨 4년간 코트를 누볐다. 이후 1992년 플레잉코치로 국내 복귀해 1994년 은퇴하기까지 선수 생활 내내 ‘최초’ ‘최고’의 삶을 살았다.
지난해 5월 20일 서대문구청 여자농구단의 공식 데뷔전. 박찬숙 감독의 오랜 꿈을 이룬 날이었다.
“책임감 때문에 힘들었지만 그래서 잘할 수 있었어요”
효명 씨가 결혼해서, 곧 할머니 되는 날이 오겠어요.그렇겠죠? 저는 효명이가 결혼해서 신기해요. 늘 딸에게 “결혼은 꼭 해야 하는 게 아니다. 능력 있으면 그냥 네 인생 즐기며 살아라” 하고 얘기했거든요. 그런데 자기 짝을 만나 살림도 잘하고, 가족들한테도 곧잘 하는 모습을 보면 참 신기해요. 아들은 결혼을 나중에 하든가, 하지 않겠대요. 아직까지는 회사 일이 더 재미있다고요. 저랑 아들이랑 둘이 알콩달콩 지내고 있어요.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를 보니 효명 씨가 엄마를 엄청 좋아하던데요.
네. 무슨 일이든 시시콜콜 다 얘기해요. 매일 통화하다시피 해서 제가 효명이의 모든 상황을 다 알고 있어요. 효명이도 저에 대해 다 알고요. 집도 바로 옆 동네예요. 여행 간다고 강아지를 제게 맡겨놓고, 데려간다고 와서는 며칠 자고 가고요. 또 맛있는 거 있으면 저 준다고 오고 그래서 수시로 봐요. 아직까진 결혼해서 달라진 걸 잘 모르겠어요.
이런 살가운 딸한테 좀 의지하지, 왜 힘들다는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나요.
의지는 못 하죠. 의지한다고 해결될 상황도 아니었고요. 혼자 해결하고 혼자 아픈 게 저는 더 마음이 편했어요.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 처음에는 야속했어요. 이런 짐을 주고 먼저 가나 싶었죠. 그런데 떠나는 본인은 오죽했겠어요. 그때는 정말 힘들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면서 덤덤해졌어요. 솔직히 살기 바빠 죽겠는데 옛날 생각에 잠겨 있을 틈이 어디 있나요.
그래도 자녀들에게 아빠가 암이라고 처음부터 얘기해줬어야 한 건 아닐까요.
자식한테 아빠가 아파서 엄마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어떻게 얘기해요. 얘기하면 아이들이 힘들잖아요. 마음이 아파도 저 혼자 감당하는 게 낫죠.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게 엄마의 몫이라고 생각했어요. 또 1차 수술이 잘돼서 괜찮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전이가 돼 상황이 심각해졌고, 그때부터는 남편 몫까지 내가 더 바쁘게 살아야 한단 생각밖에 없었어요. 실제로도 남편이 부재한다는 생각이 거의 나지 않을 만큼 바쁘게 살았어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로는 제가 일절 말을 꺼내지 않으니까 아마 아이들도 저한테 아빠 얘기를 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럼 최고가 되기 위해 애써온 농구선수로서의 삶, 혼자 버텨온 엄마로서의 삶 중에서 어느 쪽이 더 힘들었나요.
저는 농구도 내가 좋아서 선택했고, 가정을 이뤄 아이들을 낳고 산 것도 좋았어요. 단지 제가 예상하지 못한 일들로 인해 마음의 상처가 좀 있었을 뿐이에요. 하지만 사기를 당해 어려워졌을 때 자식들이 있어서 일어설 수 있었고, 너무나 힘들어도 농구라는 희망이 있어 다 잊어버릴 수 있었어요. 결국 이것도 힘들고, 저것도 힘든 게 아니라 둘 다 있어 버틴 거죠. 농구를 손 놓지 않은 건 정말 잘한 것 같아요.
사업은 어떻게 하게 됐나요.
당시 제가 농구 코치를 하고 있었는데, 친척이 소개해준 그 친구가 “농구 코치를 해서 언제 돈을 버느냐. 사업이 잘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 믿고 같이 해보자”고 했어요. 잘될 줄 알았죠. 이제 좀 편히 살아볼까, 순진하게 생각했던 거죠. 결국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몇 년 동안 끌려다니며 어려움을 겪었어요. 아마 저한테 자식도, 농구도 없었다면 ‘나는 여기서 끝이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해 포기했을 거예요.
이런 긍정적인 성격이 한 분야의 레전드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할까요.
긍정적인 성격 덕분이라기보단 무거운 책임감이 항상 있었어요. 최고의 자리를 지키려면 잘해야 하잖아요. 책임감과 부담감이 어깨를 짓눌렀어요. 어렸을 때는 ‘한국 여자농구의 대들보’ 이런 타이틀이 부담스럽다 못해 무섭기도 했거든요. 하지만 그런 부담감이 제게 ‘내가 잘하지 못하면 안 되겠구나. 열심히 해야겠다’는 식으로 작용해 잘 헤쳐나갈 수 있었어요.
책임감이 박찬숙을 힘들게도 했지만 움직이게도 했군요.
맞아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무서운 게 없어요. 저한테는 우리 팀 선수들이 있잖아요. 농구가 있는데 두려울 게 없죠. 곧 대한민국농구협회에서 주관하는 큰 대회가 있어요. 우리 팀 목표는 전승입니다. 올 2월에 훈련 겸 단합 대회를 제주도에서 가졌는데 그때 선수들이 먼저 전승하겠다, 우승하겠다, 하면서 올해 목표를 얘기했어요. 선수들의 각오를 듣고 속으로 좋으면서도 또 부담이 됐어요(웃음). 그런데 자신감이 없으면 그런 이야기를 못 하잖아요. 그런 자신감이 좋아요.
더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나요.
전 지금 굉장히 만족스러워요. 제가 감독으로 오기 전 잠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 적이 있어요. 그때도 시니어 모델에 도전해 무대에 서며 완전히 쉬진 않았어요. 저는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고 도전해요. (네일아트를 보여주며) 예쁘죠? 나이 60 넘어서 처음으로 네일아트를 시작했어요. 이게 힐링이 되더라고요. 4월 전국실업농구연맹전을 앞두곤 우승을 생각하며 골드 컬러로 골랐어요. 6월에는 태백에서 전국실업농구연맹전이 열렸잖아요. 태백 하면 산이니까 이 때는 푸른색을 골랐어요. 7월 대회는 영광에서 열리는데, 굴비라도 하나 달고 갈까 봐요. 하하. 웃으며 즐겁게 살고 싶어요. 그러다 또 좋은 기회가 오면 도전하는 거죠.
인터뷰를 마치고 코트에 서서 포즈를 취하는 박찬숙 감독에게 “요즘도 슛을 던지냐”고 물었다.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 감독의 손에 있던 농구공이 링을 향해 떠났다. 완벽한 2점짜리 클린슛이었다. “아무렴 해온 시간이 있는데, 공만 잡아도 느낌이 온다”며 “가끔 코트에 들어가 공을 넣고 싶단 생각도 했는데, 이런 얘기하면 큰일나겠죠?” 하고는 씩 웃는다. 괜히 전설이 아니었다.
#박찬숙 #농구 #올림픽 #여성동아
사진 김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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