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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국내 첫 출산한 레즈비언 부부 김규진・김세연

특집 [우리는 그렇게 가족이 됐다] ⓸

문영훈 기자

2024. 05. 08

“하지만 아빠였어. 제대로 해주진 못했어도 그래도 6년 동안 아빠였어.”

료타는 6년간 키운 아들 케이타가 친아들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은 다음에야 자신이 돼먹지 못한 아버지였음을 고백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통해 묻는다. 과연 가족은 주어지는 것인가.

가정의 달을 맞아 ‘여성동아’가 만난 여섯 모양의 가족은 “우리는 이렇게 가족이 됐다”고 말한다. 한일 커플은 국경을 뛰어넘어 결혼하기 위해, 입양 가족은 내가 낳지 않은 아이와 가족이 되기 위해 수십 장의 서류를 정부에 제출했다. 네 자매는 “언젠가 같이 살자”는 어릴 적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각자의 남편을 비롯해 15명의 동의를 구했다. 수많은 난관을 뚫었지만 아직 법적으로는 가족이 되지 못한 레즈비언 커플과 그 딸도 있다.

‘나를 지켜주는 울타리’(사돈지간이 함께 사는 가족), ‘일상과 마음을 나눌 존재’(네 자매 가족), ‘함께하지 않는 삶을 상상하기 어려운 존재’(이민 가족), ‘서로를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가족’(레즈비언 커플) 등 각각 정의하는 가족은 다르지만 마음은 어딘가 닮아 있다. 

우리는 그렇게 가족이 된다.




“으아아앙.” 현생 8개월 차 ‘라니’의 울음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그리고 13분 후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겨우 진압했습니다. 와이프가 아기를 달래야 해서 인터뷰는 혼자 진행해도 될까요?” 김규진(33) 씨의 목소리는 조금 지쳐 있었다. 2019년 결혼식을 올린 김규진·김세연(36) 부부는 평화로운 레즈비언 커플 라이프를 유지하다 프랑스에서 만난 직장 상사의 추천으로 아기를 갖기로 했다. 둘만의 신혼 생활을 즐길 만큼 즐겼다는 생각도 한몫했다. 벨기에에서 정자 기증을 통해 임신한 규진 씨는 지난해 8월 마지막 날, 라니를 건강하게 출산했다.“주변에서 라니가 제 성깔을 닮았다고 하더라고요. 생김새는 저보다 저희 엄마나 와이프를 더 닮은 것 같아요. 와이프가 라니를 안고 카페에 앉아 있을 때 한 할머니가 ‘어머, 아기가 엄마랑 너무 닮았다’고 말한 걸 저한테 자랑하더라고요.”

엄마가 둘인 ‘모모(母母)’ 가정에서도 육아와 커리어 사이의 고민은 계속된다. 일을 좋아하는 규진 씨는 아이를 낳고 4개월 만에 업무에 복귀했다. 평일에는 베이비시터의 도움을 받지만 저녁엔 두 엄마 중 한 사람이 라니를 맡아야 한다. 주말엔 더 바쁘다. 두 엄마가 함께 라니를 씻기고, 먹이고, 재우면 곧바로 월요일이 시작된다. ‘한국 국적 유부녀 레즈비언’이라는 특별한 자체 수식어보다 만국 공통 ‘엄마’라는 단어에 더 방점이 찍히는 삶의 모습이다.

2019년 결혼한 김규진·김세연 커플에겐 지난해 6월 딸 ‘라니’가 생겼다.

2019년 결혼한 김규진·김세연 커플에겐 지난해 6월 딸 ‘라니’가 생겼다.

라니 탄생에 주변 반응은 어땠나요.
정말 많은 축하를 받았어요. 와이프 상사분들이 “여자 둘이서 아기 키우기 힘들 텐데”라고 걱정하셨다고 들었는데, 애정에 기반한 염려라고 생각합니다.

손녀가 생긴 부모님이 좋아하셨겠네요.
엄마가 무척 좋아하세요. 딸보다 더 자신과 닮은 손녀에게 감정 이입하시는 것 같아요. 아기도 힘들 때가 많으니 잘 맞춰줘야 한다고요. 저희 고생은 전혀 생각하지 않으시고 항상 손녀 입장에서 조언해줍니다. 라니 백일 땐 부모님이 제 와이프를 “규진이 파트너”라고 친척들에게 소개했어요. 부모님은 제가 와이프를 와이프라고 부르는 것만 봐도 기겁하시던 분들이었는데 이제 아이까지 낳았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아이가 생기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고 하던데, 진짜 그런가요.
정말 다르죠. 우선 환경문제를 조금 더 심각하게 바라보게 됐어요. 저랑 와이프는 앞으로 60년만 살면 되지만 라니는 그보다 더 오래 살게 될 테니까요. 최근에는 교통 약자가 느낄 불편함을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라니를 유모차에 태우고 집 밖으로 나가면 버스 타는 일부터 쉽지 않거든요. 그전에는 거동이 어려운 분들이 평소 겪는 제약이 얼마나 클지 와닿지 않았던 거죠. 돈도 더 많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아기가 생기기 전에는 이 정도면 둘이 살기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일을 더 열심히 할 원동력이 생겼달까요.

언제 가장 행복하세요.
저는 평소 아기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어서 아이가 생겨도 귀여움보다 책임감의 무게가 더 클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라니가 제 얼굴을 보고 웃으면 마음이 살살 녹습니다.

양육 분담은 적절하게 이뤄지고 있나요.
따로 룰이 있는 건 아니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돌보고 있어요. 새벽 첫 수유는 눈치 게임을 하다가 덜 피곤한 사람이 하는데 그다음 라니 끼니는 상대방이 챙긴다든지요.

육아는 함께지만 법적으로 규진 씨만 라니의 엄마인 거죠.
의사가 작성하는 출생증명서엔 저와 아내 이름이 다 들어가 있었어요. 주민센터에서 출생신고서로 이를 옮기면서 ‘부(父)’ 자리에 와이프 이름을 적어서 냈어요. 결국 여성이 그 자리에 올 수 없다는 이유로 불수리됐지만 기록으로 남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행정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 체감하는 반응은 다르다고 느낍니다.

어떻게요.
시터님도 왜 엄마가 2명인지에 대해 따로 물어보지 않고 ‘이런 가족도 있구나’ 하고 대해주세요. 라니 어린이집에서 가족 관계를 쓰라는 서류가 와서 기타에 ‘모(母)2’라고 표시하고 와이프 이름을 넣었는데 한마디도 묻지 않아서 오히려 당황했고요.

법보다 현실이 앞서가네요.
설문조사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을 물어보면,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사람이 많잖아요. 하지만 실제로 성소수자가 주변에 있을 때 혐오를 대놓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적다고 생각해요. 물론 가끔 아이가 예쁘다며 남편이 외국인이냐고 물으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당황하긴 합니다. “저 레즈비언인데요…”라고 말을 할까 싶다가도 그분은 스몰 토크 차원에서 말을 걸었을 테니까요. 지금은 저만 복잡한 심경이 들면 되지만 라니가 말을 알아듣는 순간이 오면 그런 질문에 솔직하고 일관된 답변을 하려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가족에 대한 정의를 묻자, “서로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을 갖고 있고 삶을 함께 이어나가는 존재”라고 답했다. 핏줄로 이어진 모녀와 그 모녀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또 다른 엄마, ‘시터님’으로 불리는 육아 파트너, 새 구성원 라니를 아직 무서워하는 반려묘 페퍼와 퓨리까지. 서울 모처에서 한 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가족이라는 이름 외에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직 정치권이 갈 길은 멀다. 3월 임태훈 전 군인권센터 소장은 더불어민주연합 국민후보 추천 오디션에서 1위에 올랐지만 지도부에 의해 컷오프당했다. 표면적인 사유는 ‘병역기피’였지만 실제로는 그가 커밍아웃한 성소수자였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성소수자는 (정치) 링 위에도 올라가지 못하는 걸 보며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3월 태국 동성결혼 합법화 법안이 하원을 통과했고, 일본 고등법원에선 동성결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왔어요. 아시아 정세에 한국도 발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요?”

#레즈비언 #동성결혼 #여성동아

사진제공 김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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