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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미팅 중 아이 픽업 나가는 회사, 레고 코리아 정희영 대표

문영훈 기자

2023. 03. 07

아이들은 물론 성인까지 사로잡는 91년 역사의 장난감 레고. 1984년 레고코리아 법인 설립 이후 최초의 한국인이자 첫 여성 리더인 정희영 대표를 만났다.

“레고는 장난감을 넘어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라고 생각해요.”

정희영(49) 레고코리아 대표의 말이다. 그의 손에는 레고로 만들어진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형형색색 꽃을 자세히 보지 않으면 레고 브릭(brick·조각)인 줄 알 수 없을 만큼 디테일했다. 아이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레고는 키덜트 문화의 확산과 함께 최근 성인 구매자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그림 액자, 팔찌, 꽃다발 등 레고의 확장성이 무한해진 덕분이다. 현재 전 세계에서 판매되는 레고의 20%는 성인이 구입한다.

전 세계 피터 팬의 마음을 사로잡는 레고그룹은 1월, 한국 지사의 새로운 수장으로 정 대표를 선택했다. 1984년 레고코리아 법인 설립 이후 최초의 한국인이자 첫 여성 리더다. 2018년 마케팅 디렉터로 레고코리아에 입사한 정 대표는 공예 완구 시리즈인 ‘레고 도트’, 홈 데코 영역으로의 확장성을 보여준 ‘레고 아트’ 등을 성공적으로 론칭하며 성인뿐 아니라 여아 신규 고객을 모아 성장세에 기여했다.

2월 7일 정 대표를 만나기 위해 서울 강남구 레고코리아 사무실을 찾았다. 업무 공간 이곳저곳에는 레고로 만들어진 장식과 브릭이 놓여 있었다. 노랑과 파랑 등 사무실에서 보기 쉽지 않은 인테리어 색감도 눈을 즐겁게 했다. ‘대표님’이라는 호칭보다 ‘희영 님’이라는 호칭이 편하다는 그는 종이 명함과 함께 자신의 모습을 본떠 만든 ‘레고 명함’을 건넸다.

“한 달간 60명과 면담”

서울 강남구에 있는 레고코리아 사무실. 직원들이 자유롭게 레고를 조립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서울 강남구에 있는 레고코리아 사무실. 직원들이 자유롭게 레고를 조립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희영 님’이 한국인, 여성 최초로 레고코리아를 이끌게 됐습니다.

기쁘지만 그만큼 무게감이 느껴집니다. 좋은 선례를 남겨야 앞으로 많은 분에게 기회가 돌아갈 것 같아서요.



대표로서의 첫 달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레고는 직원 간의 관계와 상호 존중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회사예요. 60명 정도 되는 직원 개개인이 회사에서 무엇을 얻고 싶어 하는지, 가족관계는 어떤지, 평소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등을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고 면담하다 보니 한 달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회사에서 모든 직원과 유대를 형성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대부분의 회사에서는 업무적인 관계가 우선합니다. 하지만 업무를 하면서 부딪히는 일이 생기기 마련인데, 인간적인 유대가 있다면 서로 이해하고 갈등을 극복하기 쉬워집니다. 이 점을 전체 레고그룹 차원에서 많이 강조합니다. 저도 4년 반 동안 여기에 익숙해지다 보니 팀빌딩(team building)의 중요성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됐습니다.

정 대표는 처음에는 “사적인 이야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내 문화에 당황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처음 회사에 들어왔을 때 저를 팀원에게 소개하는 메일에 남편과 자녀의 유무, 취미와 같은 개인적인 이야기가 포함돼 있었어요. 예전 레고에 다녔던 분에게 물어봤는데 우리 회사는 개인적인 이야기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해주더라고요. 이제는 구성원 간의 신뢰가 개인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됐어요.”

또 다른 레고만의 조직문화가 있나요.

출퇴근 시간을 딱히 정해두지 않습니다. 본인 스케줄에 맞춰서 자유롭게 출근하고 퇴근하죠. 가령 아이를 픽업해야 하는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온라인 미팅을 하다가도 녹화를 부탁하고 나갈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입니다. 기존에도 재택근무가 활성화된 편이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를 거치면서 일주일에 이틀은 재택근무가 정례화됐습니다. 업무만 잘 챙긴다면 본인이 유동적으로 시간을 조절해가며 일할 수 있는 문화가 잘 정착돼 있다는 것이 강점입니다.

그래서인지 오전 10시에 찾은 레고코리아 사무실은 채 절반도 차 있지 않았다. 구성원에 대한 신뢰 덕분일까. 자유로운 조직문화 기반 위에서도 최근 레고그룹은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 레고그룹의 2021년 기준 전년 대비 글로벌 매출은 27% 증가했고, 영업이익 역시 32% 올랐다. 양적 성장뿐 아니라 기업 평판도 좋은 편이다. 미국 소재 기업평가 전문 컨설팅 업체 ‘렙트랙(RepTrak)’이 발표한 글로벌 평판 종합 순위에서 레고는 2020년과 2021년 2년 연속 1위 자리에 올랐다. 특히 레고는 ESG 분야에서 높은 점수를 획득했다. 정 대표는 “레고는 ESG 경영에 진심인 회사”라고 말했다.

“놀이를 통해서 배운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요.

많은 기업이 사회적책임(CSR)이나 ESG 경영에 대해 말하지만 단기 이익에 치중해 이를 제대로 신경 쓰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레고는 다양성·포용성 증진이라는 가치를 제품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어요. 최근에 출시한 ‘레고 프렌즈’ 주인공 캐릭터 중 하나인 오텀은 팔 하나가 없습니다. 비가시적인 장애를 앓고 있는 캐릭터도 있고요. 비즈니스와 직결되는 영역이 아니지만 CSR 차원에서 계속 투자하고 제품을 개발한다는 점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입사해 진행한 프로젝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요.

지난해 레고그룹이 창립 90주년을 맞았습니다. 한 기업이 90년을 유지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이를 기념해 강남역 인근에 레고 팝업 전시관을 운영했습니다. 평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첫날에만 3000명이 넘는 분이 방문해주셨어요. 본사가 있는 덴마크 빌룬에서 희귀 소장품을 가지고 오기도 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는데 반응이 좋아서 뿌듯했습니다.

평소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레고의 경쟁 상대는 유튜브인가요.

어떤 면에서는 그렇죠. 하지만 유튜브 콘텐츠는 일방향적이잖아요. 레고는 아이들이 조립하는 과정에서 실패의 과정을 거쳐요. 그러면서 회복 탄력성도 기를 수 있고, 친구·가족과 함께하며 유대감을 키울 수도 있고요. 레고의 기업가치가 ‘놀이를 통해서 배운다(learning through play)’거든요. 그런 점에서 또 다른 매력과 장점을 갖고 있는 장난감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비해 완성에 초점을 둔 제품이 많아 창의성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레고 라인업이 늘어서 그렇게 느끼실 수 있어요. 하지만 크리에이터 라인이나 클래식 라인 등 자율성이 높은 레고 역시 계속 판매되고 있습니다. 또 레고 팬들이 출품한 작품에 기반해 실제 제품을 개발하는 ‘레고 아이디어’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어서, 레고 소속 디자이너가 아니더라도 만 13세 이상이면 누구나 레고 창작물을 출품할 수 있어요.

아이뿐 아니라 성인 고객도 많습니다. 특히 3040 ‘키덜트(kidult)’ 시장에서 레고가 차지하는 비중이 큽니다.

3040은 인생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아요. 직장에서 느끼는 스트레스도 많고요. 그래서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려고 하는 것 같아요. 레고는 그런 향수를 자극하죠. 성취감도 한몫한다고 생각합니다. 20대 초반 사회 초년생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요. 직장 생활을 처음 하면서 상사로부터 많이 깨지고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대요. 그런데 집에서 레고를 조립하면서 성취감과 자신감이 생긴다는 거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레고 제품이 궁금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재해석한 ‘별이 빛나는 밤’을 좋아해요. 조립하기 전 브릭을 늘어놓았을 때는 남편이 이게 뭐냐고 핀잔을 줬어요. 하지만 완성해서 집에 걸어뒀더니 멋있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지금은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목판화를 재현한 ‘거대한 파도’를 눈여겨보고 있어요.

“낙담하는 상황에도 스스로를 믿어라”

정희영 레고코리아 대표의 ‘최애’ 레고 ‘별이 빛나는 밤’(위). 레고 프렌즈 캐릭터 ‘오텀’.

정희영 레고코리아 대표의 ‘최애’ 레고 ‘별이 빛나는 밤’(위). 레고 프렌즈 캐릭터 ‘오텀’.

정 대표는 레고코리아에 입사하기 전 쿠팡, 필립스코리아, GS칼텍스 등 다양한 회사에서 마케팅 경력을 쌓았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마케터로서 꽃길만 걸은 것은 아니다. 대학 시절 그의 꿈은 막연하게 ‘멋있는 비즈니스 우먼’이 되는 것이었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정 대표는 무역상사에 첫 대졸 여성 사원으로 입사한다.

“당시에는 남자들은 정장을 입고, 여성 직원은 유니폼을 입어야 했어요(웃음). 무역상사 일은 다이내믹해서 재밌었지만 장기적으로 오래갈 수 있는 직업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마케터가 된 친구들을 보며 다시 구체적인 꿈을 가지게 됐죠.”

마케팅의 어떤 점에 끌렸나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좋았어요. 친구들이 다양한 광고나 프로모션 행사를 기획해 제품이 잘 팔리면 굉장히 뿌듯하다고 하더라고요. 무역회사에 다니면서 이력서도 많이 내봤는데 나이와 경력 면에서 쉽지 않았어요. 다만 저는 계속 ‘나는 언젠가 마케팅을 할 거야. 나는 할 수 있어’라는 생각을 품고 살았어요. 혼자 공부하면서 잘 모르는 내용은 업계에 있는 친구들에게 묻고 관련 세미나가 열리면 참석했죠. 미시간대학교 경영대학원(MBA) 과정도 그래서 선택했고요.

대학원을 졸업한 뒤로는 탄탄대로였나요.

아닙니다(웃음). 저도 미국 유학을 마쳤을 때 고민이 많았어요. 공부에 큰돈을 투자했는데 나이가 많다고 거절당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제가 원했던 컨슈머 마케팅 분야에 바로 진입할 수는 없었지만 이직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쌓으려고 했어요. 영업, 광고 집행, CRM(관계마케팅), 제품 판매 등 새로운 걸 배울 기회가 있다면 회사를 옮겼죠. 2007년 필립스코리아에 자리 잡으면서 비로소 제가 꿈꿔왔던 마케팅 디렉터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다음엔 글로벌 회사의 GM(General Manager·대표)이 되는 걸 목표로 삼고 해외 근무 경험을 쌓았고요.

야망을 잃지 않으셨네요.

맞아요, 야망(웃음).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때는 제가 엄청난 ‘야망가’였다고 이야기하시는 분도 계시더라고요. 단지 저는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려면 어떤 경력들이 필요한지를 많이 생각했었던 것 같아요.

성공한 ‘비지니스 우먼’으로서 사회 초년생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본인이 원하는 일을 빨리 찾는 게 중요해요. 저는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야 구체적인 꿈이 생겼으니 남들보다 출발이 늦은 셈이죠. 요즘 친구들은 어릴 때부터 본인이 원하는 바를 분명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본인에게 당장 낙담하는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스스로를 믿고 계속 노력하면 기회는 틀림없이 오게 돼 있어요. 그때를 잘 활용해서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과 경험을 활용하면 되는 거죠.

다음 꿈이 있나요.

원하는 바대로 GM이 됐으니까(웃음) 레고그룹이 강조하는 직원들의 행복도 많이 챙겨가면서 레고코리아가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어요.

어떤 의미인가요.

레고그룹이 전 세계 성인과 어린이를 대상으로 글로벌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놀이가 휴식에 도움이 되지만 절반가량은 부정적인 시선으로 인해 노는 것에 제약을 받는다고 답했어요. 특히 한국에서는 휴식이나 놀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많은 것 같습니다. 레고코리아가 새로운 놀이 문화의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싶어요.

#정희영 #레고코리아 #레고 #놀이 #여성동아

사진 박해윤 기자 
사진제공 레고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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