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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interview

마침내, ‘헤어질 결심’으로 돌아온 박찬욱

문영훈 기자

2022. 07. 21

박찬욱의 작품 중 이토록 피비린내로부터 멀어진 이야기가 있었나. 폭력의 빈자리는 박해일과 탕웨이의 눈빛이 채운다. 고전적이면서 현대적이고, 미스터리이자 멜로드라마인 ‘헤어질 결심’에 대해 박찬욱이 말했다.

‘모호필름’.

박찬욱(59) 감독이 만든 영화 제작사다. 그는 이동진 영화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 “(모호함이) 좋은 예술의 조건이라 회사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말했다. 그의 새 영화 ‘헤어질 결심’은 제작사 이름과 꼭 맞는 작품이다. 영화의 시작은 수사물에 가깝다. 변사 사건을 맡은 형사 ‘해준(박해일)’은 사망자의 아내 ‘서래(탕웨이)’를 의심한다. 의심은 관심으로 바뀌며 멜로드라마의 밀물이 서서히 스민다.

영화 곳곳에 놓인 소품도 애매한 것투성이다. 파도 같다가도 산봉우리를 연상시키는 벽지, 초록색 또는 파란색으로 보이는 드레스는 극 중 가상의 도시 이포에 가득 찬 안개처럼 모호함을 더한다. 한국에서 첫 시사가 끝난 뒤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박찬욱은 “인생을 살아본 사람이어야 이해할 수 있는 사랑 이야기를 만들고자 했다”며 “휘몰아치는 감정보다는 은근하고 숨겨진 감정에 집중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영화에 대한 부연 설명을 6월 24일 박 감독에게 화상으로 들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필름 누아르와 멜로드라마

영화 ‘헤어질 결심’ 포스터.

영화 ‘헤어질 결심’ 포스터.

은근한 사랑 이야기는 어떤 건가요.

과묵한 영화를 만들고자 했어요. 대사가 적은 영화라는 뜻은 아니고, 사랑한다고 서로 말하지 않는 사랑 이야기요. 요즘은 사람들이 자기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는 걸 주저하지 않는 시대잖아요. 저 같은 사람, 그러니까 나이 많은 동양 사람들의 정서가 구닥다리처럼 보이기도 하겠죠. 하지만 시대가 변해도 사라지지 않는 게 있어요. 젊은 사람에게도 통하는 지점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참고했던 영화가 있나요.

시나리오를 함께 쓴 정서경 작가에게 데이비드 린 감독의 영화 ‘밀회’를 참고하라고 권했어요. 성숙한 남녀 사이에 인내하는 사랑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죠.



‘헤어질 결심’에서는 멜로드라마 위에 형사물이 포개집니다.

폭넓게 말하면 ‘헤어질 결심’은 필름 누아르(범죄와 폭력을 다루며 도덕적 모호함과 성적 동기에 초점을 맞추는 영화 장르)에 속하겠죠. 남자 형사와 아름다운 여성인 용의자와의 두뇌 게임을 볼 때 관객이 기대하는 바가 있을 거예요. 중반까지는 그런 의도로 영화를 보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영화는 관객을 오도하기도 하며 선입견과 다르게 흘러가죠. 그때 관객이 즐거움을 느낄 거라고 생각했어요.

멜로드라마를 쓰게 된 이유가 있나요.

정서경 작가가 제게 사랑 영화는 못 만들 거라고 하더라고요. 우리는 멜로를 못 만드는 종족이라고. 보란 듯이 보여주고 싶었어요. 정 작가를 어르고 달래가면서 함께 각본을 썼죠. (정 작가가) 완성된 영화를 보고 정말 놀라더군요. 배우의 힘이 정말 컸어요. 탕웨이와 박해일, 두 사람이 사랑의 낭만적인 감정을 감추면서도 관객에게 전달되도록 묘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습니다.

해준과 서래

박해일과 탕웨이는 ‘박찬욱 월드’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박해일은 언제나 타인에게 예의를 다하는 청결한 형사 해준을, 탕웨이는 자신을 둘러싼 힘든 상황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서래 역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박찬욱 감독은 두 배우를 먼저 캐스팅해놓고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정교하게 세공된 두 캐릭터는 각각의 배우가 가진 이미지와 무관하지 않다.

탕웨이에게 먼저 캐스팅을 제안하고 각본을 쓰셨는데….

‘색, 계’(2007) 이후 출연한 작품을 보며 탕웨이와 함께 일하고 싶었어요. 정서경 작가와 각본을 쓰면서 다짐했어요. 비록 탕웨이를 캐스팅하려고 캐릭터를 중국인으로 설정했지만 중국인이라는 점이 중요해서 각본을 그렇게 썼어요. 그 배역에 맞는 배우를 캐스팅한 것처럼 관객이 받아들이도록 하겠다고요.

같이 일하고 싶은 배우, 탕웨이의 매력은 뭔가요.

몸이 꼿꼿하다고 해야 하나(웃음). 극 중 해준이 말하는 대사는 제가 느낀 바이기도 해요. 그만이 가진 자부심이 있어요. 과시적인 형태는 아니고 어딜 가서도 부끄러운 점이 없는 태도, ‘나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그런 데서 우러나오는 기품과 위엄이죠. 그게 실제 캐릭터가 됐어요. 서래는 남들이 선망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지만 소신이 있는 사람이죠.

품위 있는 형사 캐릭터 ‘해준’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고등학교 때 읽은 추리 소설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좋아했어요. 베크를 포함해 책에 등장하는 형사 캐릭터는 한결같이 점잖은 사람들이죠. 수사할 때도 절차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신은 시민에게 봉사하는 공무원이라는 인식을 가진 직업인이에요. 해준은 옷차림도 신경 쓰죠. 스스로 슈트와 넥타이 차림이 예의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범인을 잡아야 하기 때문에 구두 대신 검정색 운동화를 신어요. 청결함도 품위 유지의 일부로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여기저기를 다녀야 하는 형사니까 이것저것 가지고 다녀야 할 것도 많은데 그러려면 옷에 주머니가 많아야 하죠. 그럼 기성복으로 안 되는데 봉급이 적은 형사가 어떻게 맞춤 정장을 입을 수 있을까. 과거 맞춤 정장 집 사장이 연관된 사건을 해결해준 적이 있어 비교적 적은 돈으로도 상의에만 주머니가 12개 달린 옷을 입을 수 있다고 설정했어요. 그렇게 (캐릭터에 대한) 사고가 발전하는 거죠.

해준의 동료 형사 역을 맡은 김신영 배우의 캐스팅도 흥미로웠습니다.

김신영 씨는 예능 프로그램 ‘웃음을 찾는 사람들’의 ‘행님아’ 코너에 나올 때부터 팬이었어요. 코미디를 잘하는 사람들은 다른 연기도 잘할 거라는 확신이 있어 캐스팅했어요. 그 이상으로 잘해줬고요.

산과 바다

“지자요수 인자요산(知者樂水 仁者樂山·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극 중 서래의 대사다. 영화 내내 산과 바다의 이미지는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처럼 박찬욱은 배우들의 호연 사이사이 해석의 여지를 갖고 있는 기호와 이미지를 곳곳에 배치했다. 영화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안개’와 ‘파도’도 중요한 소재다. 가상의 도시 이포를 감싸는 안개는 영화 말미, 파도가 돼 해준을 덮치는 것 같다.

영화에 ‘파도’가 자주 등장합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서래 집 벽지를 언뜻 보면 파도 혹은 산처럼 느껴지도록 디자인했어요. 파랑으로도, 초록으로도 보이는 원피스도 마찬가지죠.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의 감정조차도 이렇게 보면 이렇고, 저렇게 보면 저래요. 불쌍한 피해자이기도, 나쁜 여자처럼 보이기도 하는 서래도 그렇고요. 파도는 이 영화의 중요한 모티프가 됐어요. 잔잔하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거칠게 일어나 자연의 거대한 힘을 느끼게 하죠.

감독님의 영화는 다시 보고 싶다는 평이 많이 나옵니다. 곱씹고 싶은 부분이 많다는 의미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 어려운 영화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한 번 보고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게 가장 좋죠. 보고도 못 알아듣는 영화를 만들고 싶진 않아요. 동시에 두세 번 봐도 곱씹을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영화 속에 여러 레이어가 있다면 다시 보면서 새로운 게 발견되는 재미가 있겠죠.

박찬욱의 시그니처로 불리는 잔혹성이 줄어들었습니다.

만들어놓은 각본 중에 아주 폭력적인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어요. 이 길로 진로를 바꿔 탔다는 건 아닙니다. 그때그때 스토리가 요구하는 표현 수위를 맞출 뿐이죠.

이번 영화에 대한 만족도를 묻자 박 감독은 긴 침묵 끝에 “비교적 높은 편”이라며 “거슬리거나 후회되는 장면이 적다”고 말했다. ‘헤어질 결심’에는 최고의 제작진이 함께했다. 아름답게 조탁된 대사를 쓴 정서경 작가, 영화 ‘아가씨’로 칸영화제에서 발칸상을 수상한 류성희 미술감독, 조영욱 음악감독 등 박찬욱과 오랜 시간 작업을 함께 해온 드림 팀이다. 엔딩 크레디트에는 새로운 이름도 보인다.

김지용 촬영감독과의 첫 작업은 어땠나요.

이제 정정훈 감독(‘올드보이’ ‘아가씨’ 등의 촬영감독)은 제 스케줄대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에요. ‘스타워즈’ 시리즈 촬영 의뢰가 들어왔다는데 어쩌겠어요(웃음). ‘리틀 드러머 걸’을 촬영한 김우형 감독도 시간이 안 된다고 했어요. 김지용 감독은 제가 함께 작업한 촬영감독 중에 가장 나이가 어려요. 독특한 시점 샷, 별난 앵글을 제안한다든가 신선한 아이디어가 많았어요. 단순히 ‘재밌잖아요’가 아니라 영화의 내용과 결합해 이유가 있는 제안이었어요.

스마트 기기를 이용한 연출은 전작에서 보지 못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정서경 작가와 시나리오를 쓰면서 왜 이렇게 스마트 기기가 많이 나오지, 이건 문제가 있는데 하며 걱정을 했어요. 어느 순간 현대인의 생활을 이런 것 없이 표현한다는 게 억지 아닌가 생각하게 됐어요. 간단하게 의사소통할 수 있는데 스마트 기기를 통하지 않으면 우회하는 수단을 강구해야 하잖아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영화의 주제인 것처럼 사용하자, 결정했습니다. 탕웨이를 위해 중국인 설정을 한 것처럼요.


박찬욱과 대가

감독 데뷔 30주년을 맞은 박찬욱의 이름은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브랜드가 됐다. ‘올드 보이’(2003), ‘박쥐’(2009), ‘아가씨’(2016) 등 대표작이 수두룩하다. 신작을 만들 때마다 칸영화제 초청을 받고 평론가들의 별점이 쏟아진다. 화려한 이력만큼이나 부담도 클 터다.

매번 작품을 만들 때 부담감을 느끼시나요.

늘 흥행을 생각해요. 다음 작품을 투자받을 수 있을 정도로, 투자한 사람이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영화가 흥행해야 한다. 혹자는 그렇게 흥행을 생각하는 사람이 이런 영화를 만드느냐고 하던데, 할 수 있는 능력이 닿는 만큼 하는 거죠. 최동훈이나 류승완 감독을 흉내 낸다고 되는 건 아니에요. 제가 즐겁고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걸 하는 거죠.

듣기 좋아하는 칭찬이 있나요.

여태까지의 영화와 많이 다르다는 말, 발전하고 있다는 말이죠. 30년이나 감독 노릇을 하면서 발전하고 있다는 게 사실이라면 즐거운 일이죠. 저는 지루한 걸 못 참아요. 좋은 결과가 있을 때 안주한다거나 했던 거 또 하는 걸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는 즐겁게 일할 수가 없어요. 영화감독 일은 시간이 많이 필요하기도 하고 모든 걸 갖다 바쳐야 하는데 즐겁지 않으면 할 수 없어요.

박찬욱을 움직이게 만드는 자극은 무엇인가요.

이전에 만든 영화들보다 더 나아질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르면서도 흥미로운 작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과거의 대가(大家)와 비교를 하곤 합니다. 영화뿐 아니라 다른 예술 영역의 대가도 그 대상이죠. 가령 (‘헤어질 결심’에 등장하는 노래 ‘안개’를 만든) 이봉조 작곡가가 도달했던 수준을 생각해봐요. 훌륭한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위해 들인 노력, 그 성취와 비교하며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박찬욱 #헤어질결심 #여성동아

사진제공 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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