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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shion column

스티브 잡스의 패션 후예들

#E-BOY & E-GIRL

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엘 킴벡

입력 2021.05.18 10:30:02

지금은 고인이 된,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매년 9월에 열리는 신제품 발표회 무대에 오를 때마다 같은 룩을 고수했다. 목까지 올라오는 검은색 니트에 물이 적당히 빠진 청바지, 회색 운동화를 신은 모습 외에 다른 차림의 스티브 잡스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명색이 이 시대의 가장 성공한 사업가 중 한 사람인 그가, 세상의 모든 이목이 집중되는 순간에 항상 같은 룩으로 등장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컴퓨터와 IT 분야만 파고드느라 패션에 관심이 없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지극히 평범하다 못해 촌스러워 보이기까지 한 스티브 잡스의 룩은 알고 보면 상당히 클래식한 의상들로 구성돼 있다. 검정 터틀넥 톱은 일본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의 디자인이며, 청바지는 리바이스 501, 신발은 뉴발란스의 회색 992 모델이다. 특히 이세이 미야케의 터틀넥 톱은 오래전에 절판된 디자인을 스티브 잡스가 특별 주문해 만든 것이다. 월터 아이작슨이 집필한 스티브 잡스의 전기 ‘스티브 잡스’에 의하면, 그의 옷장 안에는 수십 벌의 똑같은 이세이 미야케 터틀넥 톱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잡스 사후 이 옷의 재판매를 요청하는 소비자들이 많았으나 이세이 미야케 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치 스포츠계에서 전설적인 선수의 등번호를 영구결번시키는 방식으로 그 선수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처럼, 이세이 미야케는 스티브 잡스에게 검정 터틀넥 톱을 헌정한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스티브 잡스의 룩처럼 평범하거나, 촌스럽거나 아니면 아예 패션에 대한 센스가 없어 보이는 콘셉트가 패션계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평범함이 최고로 스타일리시하다고 주장하는 ‘놈코어(Normcore)’와 촌스러움을 일부러 더 부각시키며 자유자재로 소화해내는 ‘너드 패션(Nerd Fashion)’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과 함께 등장한 E걸과 E보이들의 패션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다.

게임 생중계 사이트인 트위치(Twitch)에서 패션쇼를 공개한  버버리.

게임 생중계 사이트인 트위치(Twitch)에서 패션쇼를 공개한 버버리.

코로나19로 인해 집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애슬레저 트렌드를 기반으로 한 라운지 웨어나 스웨트 셔츠 같은 편한 옷들의 인기가 높아졌다. 소위 슬세권이라 불리는 집 근처까지만 입고 나갈 수 있는 편안한 옷들을 내세운 원 마일 웨어(One Mile Wear) 브랜드들의 약진도 눈에 띈다. 하지만 뼛속까지 패션을 사랑해 마지않던 사람들은 편하게 착용할 수 있는 옷만 입고 지내는 시간에 대해 점점 참을 수 없는 지루함을 느끼게 되었다. 집 안에 머물면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창구인 인터넷과 인스타그램, 유튜브 그리고 틱톡 같은 소셜 플랫폼들을 통해 패션을 탐닉하기 시작한 이들이 바로 E걸과 E보이들이다.

E걸과 E보이들은 먼저 인스타그램이나 틱톡 같은 SNS의 해시태그에서부터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E는 Electronic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인터넷 상에서 특히 마니아 층이 두꺼운 코스프레(Costume Play), 아니메(Animation), 고스(Goth), 메이드 카페(Maid Cafe), 이모지(Emoji), 스케이트보드(Skateboard), 하드 코어 메탈 밴드(Hardcore Heavy Metal Band), K팝 등 소위 ‘서브컬처’라 불리는 문화에 영향을 받은 스타일들을 모방하거나 즐긴다.

MZ세대가 즐기는 서브컬처, 새로운 패션 주류가 되다

헌터 샤퍼(좌).티모시 샬라메.(우)

헌터 샤퍼(좌).티모시 샬라메.(우)

보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E걸과 E보이들의 스타일은 패셔너블하다기보다는 괴기스럽거나 컬트적인 느낌이 강하다. 스케이트보드를 즐기는 아이들의 박시한 티셔츠에 체인이 길게 달린 벨크로 지갑, 일본 만화 속 캐릭터 같은 세일러복이나 메이드 복장, 소녀록 가수를 표방했던 에이브릴 라빈의 전성기 때를 연상하게 하는 초커에 스트라이프 티셔츠와 플랫폼 슈즈, 혹은 신인 K팝 아이돌의 소프트한 외모와 형광색 머리 그리고 메이크업이 E걸과 E보이들이 애정하는 스타일이다. 



이들은 젠더 뉴트럴 세대이기에 남녀에 상관없이 진한 메이크업과 헤비한 액세서리를 즐긴다. 또한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좀 괴팍하거나 기괴하다고 해도, 실생활이 아닌 집에서 즐기고 가상 공간 안에서 표현하는 방식이다 보니 코로나19가 만연한 2020년에 폭발적으로 확산되는 경향을 보였다. 2020년 한 해 동안 #Eboy 해시태그와 관련된 콘텐츠는 틱톡에서 1억 뷰를 돌파했고, 인스타그램에서도 1만 개 이상의 게시물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미국의 팝 가수 도자 캣은 보그닷컴(VOGUE.COM)에 E걸 스타일로 헤어와 메이크업하는 방법을 게시해 2천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으며, E걸의 메이크업 방식에 관한 노래까지 발표해 E걸의 아이콘으로 불리고 있다. 현재 미국의 MZ세대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HBO의 드라마 시리즈 ‘유포리아’에서도, 트랜스젠더 모델이자 배우인 줄스 역의 헌터 샤퍼를 비롯한 많은 캐릭터들이 E걸에게 영향을 받은 스타일과 메이크업을 선보이고 있다. E걸과 E보이들의 특징은 철저히 카메라를 응시하는 시선과, SNS에서 어떻게 노출될지 미리 계산된 이미지들을 생산해낸다는 것이다.

이런 E걸과 E보이들의 트렌드를 패션계가 간과할 리 없다. 셀린 옴므의 2021 S/S 컬렉션인 ‘더 댄싱 키즈(The Dancing Kids)’는 E보이의 스타일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게임 생중계 사이트인 트위치(Twitch)에서 패션쇼를 공개한 버버리 또한 E보이들이 진을 치고 있는 애플리케이션을 선점하려는 전략이 엿보인다. 매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개최되는 패션계의 빅 이벤트 멧 갈라(Met Gala)도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반영, E보이들을 대표하는 배우 티모시 샬라메와 E걸들이 즐겨 하는 비비드 컬러 헤어 염색 및 투박한 액세서리들로 무장한 가수 빌리 아일리시를 공동 호스트로 선정했다. 서브컬처로 간주됐던, 인터넷상에서 더욱 꽃을 피워왔던 문화가 패션과 만나 이제 메인스트림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빌리 아일리시.

빌리 아일리시.

평범이라는 이름의 심플함은 아직도 트렌드인 척하지만 살짝 지루한 면이 없지 않고, 시즌의 트렌드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섭렵한 스타일은 소화불량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반면 촌스러움은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새로울 수도 있다는 가능성의 문이 열리고, 마니아들끼리만 공유하던 하위문화가 트렌드로 등극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어느 시대나 그렇듯 패션은 자기만족이다. 하지만 패션 산업은 다르다. 트렌드를 만들고 그 트렌드라는 흐름에 맞춰 얼마나 많은 소비를 창출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따라서 개인의 해석이나 만족보다는 시장과 소비자가 중요하다. 너드와 긱 그리고 E걸과 E보이, 이들은 자신의 패션에 충분히 만족스러웠지만 대중은 촌스럽다거나 기괴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들의 스타일이 시대의 흐름과 맞물려 트렌드로 전환되자 대중의 눈에 패셔너블하다는 필터가 씌워지기 시작했다. 평범한 것이 패셔너블하다며 각광받기도 하고, 어글리한 것도 시선에 따라 스타일리시해 보일 수 있는 것이 트렌드의 묘미다. 그렇게 또 패션은 트렌드를 타고 끊임없이 돌고 돌게 될 것이다.

조엘 킴벡의 칼레이도스코프

뉴욕에서 활동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기네스 팰트로, 미란다 커 등 세기의 뮤즈들과 작업해왔다. 현재 브랜드 컨설팅 및 광고 에이전시 ‘STUDIO HANDSOME’을 이끌고 있다.




사진 게티이미지
사진제공 미우미우 발렌티노 샤넬 크리스찬 디올




여성동아 2021년 6월 6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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