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을 방문하는 관광객은 1년에 얼마나 될까. 태국 관광청에 따르면 2010년에만 약 1천5백만 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이라는 세계적인 여행 가이드북 출판사는 태국을 2010년 가장 방문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 2위로 꼽았다. 나의 첫 태국 방문은 2008년에 이루어졌다. 여름휴가를 앞두고 불현듯 동남아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그때까지 수도 없이 비행기를 탔지만 여행지는 주로 유럽 국가에 국한됐다. 당시 스웨덴 스톡홀름행 항공권을 예약해놓은 상태였지만 바로 취소하고 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태국 방콕의 첫인상은 실망스러웠다. 깔끔하면서도 역사와 전통이 잘 보존된 유럽 도시들이나 내가 줄곧 살아온 서울과 비교했을 때 너무 큰 차이가 느껴졌다.
그러나 이후 20여 차례 태국을 방문하면서 차츰 시각이 바뀌었다. 특히 지난해 캄보디아에서 근무할 기회가 있어 8개월 가까이 머무는 동안 동남아에서 태국이 차지하는 위상을 실감할 수 있었다. 특히 태국의 수도 방콕은 주변 국가들에게 일종의 로망이었다. 캄보디아인들은 방콕을 묘사할 때마다 부러움을 담아 “싸아-드(아름답다)”라고 말하곤 했다.
관광 천국이 된 다정한 ‘스와디카’의 나라
아무리 경치가 아름답고 물가가 싸도 고약하기 그지없는 인심을 접하면 그 여행은 즐거운 추억으로 남기 어렵다. 일단 태국이라면 이런 걱정이 필요 없다. 태국 사람들은 항상 ‘코픈카(감사합니다)’와 ‘스와디카(안녕하세요)’로 사람을 맞이한다. 잠깐 짜증을 내는가 싶다가도 금세 기도하듯 손을 모으며 ‘코픈카’라고 한다. 더운 날씨만큼 불쾌지수도 높을 것 같은데 이런 상황에 너무 익숙해서인지 이들의 표정에는 늘 여유가 있다. 이 친절함 덕분에 누구나 낯선 나라에 대한 경계심이 쉽게 풀린다. 여기에 매운 태국식 해물탕 ‘톰양쿵’을 맛보고 나면 태국이라는 나라에 홀딱 반하지 않을 수 없다.
친절이 몸에 밴 태국인들을 보면 어딘가 일본인 같다는 인상을 받는데, 도심의 현대적 건물들 사이사이로 사원들이 자리 잡고 있는 것도 비슷하다. 태국 사원에도 일본처럼 바라는 바를 적어 걸어놓는 나무로 된 판인 ‘에마’가 있다. 일본 에마가 아기자기하다면 태국 것은 크고 투박한 대신 개성이 넘친다.
한번은 태국 영화관에 갔다가 당황한 적이 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귀여운 아이 목소리로 노래가 흘러나오자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엉겁결에 따라 일어났는데 그때 스크린에 태국의 왕 푸미폰 아둔야뎃이 등장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영화관의 ‘애국가’ 연주가 사라진 지 오래여서 이런 절차가 낯설지만 태국인들에겐 자연스러운 일이다. 흔히 ‘부미볼’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태국 왕은 1946년 즉위하여 지금까지 왕좌를 지키고 있는 세계 최장기 집권 원수이자, 태국 역사상 최장기 재위 군주다. 우연치 않게 나는 부미볼 왕이 단순히 상징적 존재가 아니라 진정으로 태국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1 피피 섬 전경. 2 문화 테마파크 ‘푸껫 환타지(Phuket Fantasea)’. 3 피피 섬에서 스노클링을 즐기는 모습.
‘양배추와 콘돔’이 레스토랑 이름이 된 사연
‘양배추와 콘돔’ 레스토랑에 전시된 마네킹. 색색의 콘돔으로 장식돼 있다.
이번 방콕 방문의 주목적은 일반 관광이 아니라 사회적 기업이 운영하는 이색 명소를 찾아가는 것이다. 방콕의 스카이트레인(BTS)을 타고 아속 역에서 내리면 ‘타임스퀘어’라는 유명한 건물이 나온다. 방콕의 길에서 자주 ‘소이(Soi)’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는데 ‘소이’란 큰 도로에서 뻗어가는 간선도로, 일종의 골목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속 역에서 내려 이정표 ‘소이12’를 따라 걸으면 오른쪽에 ‘양배추와 콘돔(Cabbages · Condoms)’이라는 희한한 이름의 레스토랑이 나타난다. 이름부터 워낙 독특해서 레스토랑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나 잡고 물어봐도 금세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캄보디아에서 인신매매 피해자를 돕는 NGO에서 일할 때 이 레스토랑에 대해 처음 들었다. 이름만 들으면 무슨 ‘섹스숍’ 같지만 이 레스토랑은 PDA(Population and Community Development Association)라는 태국 비영리단체가 운영하는 곳이다. 이 단체는 6백여 명의 직원과 1만 2천 명가량의 자원봉사자가 활동하고 있으며, 50개국에서 온 2천9백여 명을 교육시킨 세계적인 시민단체다. 특히 각 지역의 특성에 맞는 개발 사업을 펼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PDA의 설립자 메차이 비라바이디야는 전직 정치인이자 기업인. 태국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메차이 회장은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늘 이런 말을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더 배우고 힘 있는 사람이 어려운 이들을 위해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1980년 그가 이 단체를 세운 지 얼마 안 돼 태국 전역에 에이즈가 무섭게 퍼져나갔다. 당시 태국에서는 성매매 여성들이나 손님들이 성관계 시 콘돔을 사용하지 않아 에이즈 감염으로부터 무방비 상태였다. 이는 단순히 성매매 당사자에게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 이들이 집으로 돌아가 부인 또는 남자친구와 성적 접촉을 하면 에이즈는 급속히 퍼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콘돔은 에이즈 방지 외에 산아제한에도 유용했다. 지금도 방콕 외곽에는 하루 1~2달러로 살아가는 이들이 많은데, 이들은 산아제한을 하지 않아서 벌이는 없는데 먹여야 할 입만 대책 없이 늘어나는 삶의 악순환에 빠져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메차이 회장은 성매매를 하는 직업 여성들뿐만 아니라 일반 여성들에게도 무료로 콘돔을 배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사업을 지속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외국의 NGO나 여러 단체들로부터 원조를 받기도 했지만 외부 원조를 받을 경우 관할기관의 감독을 받아야 하는 등 활동에 제약이 많자 가급적 자체적으로 자금을 조달하기로 했다. 이때 메차이 회장이 떠올린 것이 레스토랑 사업이었다.
양배추와 콘돔’ 레스토랑 내부.
메차이 회장은 평소 업무가 끝난 뒤 직원들과 음료를 마시던 공간을 개조해 레스토랑을 열었다. 이 레스토랑은 온통 콘돔으로 장식됐다. 마네킹들은 콘돔 옷을 입고 있고, 벽에 달린 조명에도 콘돔이 주렁주렁 장식처럼 걸려 있었다. 레스토랑 입구에 있는 기념품 판매대에서는 콘돔 열쇠고리, 콘돔 티셔츠, 콘돔 꽃장식, 콘돔 카펫 등을 판다. 기가 막힌 아이디어다. 그런데 왜 콘돔만 있고 양배추는 없는 걸까?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이 레스토랑의 이름에 ‘양배추’라는 단어가 들어가게 된 사연도 흥미롭다. 레스토랑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메차이 회장은 이곳에서 지방의 가난한 농부들이 가져온 양배추와 각종 채소들을 대신 판매해주고 수익금을 농부들에게 돌려주었다. 이를 계기로 레스토랑 이름에 ‘양배추’가 들어있는 것이다. 지금도 이 레스토랑에서는 각 지역 농부들로부터 직접 구입한 재료를 쓰고 있다.
사회적 기업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이라도 맛이 없으면 호기심에 한번 가보는 데 그친다. 그러나 이런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다. 콘돔이라는 독특한 이름 덕분에 차별화에 성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맛 또한 그 명성에 걸맞아, 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레스토랑이다. 태국의 대표 음식 가운데 하나인 톰양쿵부터 각종 해산물 요리와 서양식 요리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선택할 수 있으며 서비스도 수준급이다. 태국 전통음식은 맵고 강한 것이 많아서 한국인 입맛에 잘 맞는 편. 제대로 된 태국 음식을 맛보려면 이 레스토랑이 적격이다.
파타야의 낙원 ‘버즈 앤 비즈 리조트’
1 버즈 앤 비즈 리조트 내 수영장. 2 버즈 앤 비즈 리조트 비치사이드 스위트룸에서 바라본 풍경.
방콕에서 동남쪽으로 145km 정도 떨어진 관광도시 파타야에는 PDA가 운영하는 ‘버즈 앤 비즈 리조트’(www.cabbagesandcondoms.co.th)가 있다. 이 리조트는 아름다운 해변을 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무지갯빛 정원이 갖춰져 있어 마치 꿈속을 거니는 기분이 들 정도다. 해변의 새하얀 백사장과 어우러진 석양,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하늘을 보며, 만날 보는 하늘인데 이렇게 다르게 보일까 하는 의문이 생길지도 모른다. 리조트의 이름이 말해주듯 ‘꿀벌’과 ‘새’들의 공간에 몰래 숨어든 느낌이다. 그리고 여행 팁 하나. 이 리조트 안에도 ‘양배추와 콘돔’ 레스토랑이 있어 방콕에서와 같은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올 여름휴가 때 동남아 여행을 계획했다면 ‘양배추와 콘돔’ 레스토랑과 ‘버즈 앤 비즈 리조트’ 코스를 선택해보자. 메차이 회장이 자주 던지는 농담 “우리 레스토랑의 음식은 절대 임신을 유발하지 않는다(Our food is guaranteed not to cause pregnancy. 레스토랑의 이름과 결부된 농담)”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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