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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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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다 같은 복수와 시크한 위로 사이 이제훈의 지점

글 윤혜진

2021. 06. 07

한 배우가 동시에 선보인 두 작품이 모두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 묵묵히 자기만의 길을 걸어오며 ‘모범택시’와 ‘무브 투 헤븐 : 나는 유품정리사입니다’로 이름값을 증명해낸 이제훈과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작품을 선택하고 연기를 보여주는 지점에 있어서 계속 저를 갈고닦고 탐구해 시청자들께 식상하지 않은 사람이고 싶어요. 제 연기에 대해 언제나 궁금해 했으면 좋겠어요.”

지난 5월 24일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무브 투 헤븐 : 나는 유품정리사입니다(이하 무브 투 헤븐)’ 홍보 차 화상으로 만난 이제훈(37)은 ‘지점’이란 단어를 꽤 여러 번 사용했다. 지점은 어떤 부분이자 순간이다. 그 작은 조각에 꽂힌 이제훈은 실제로도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진지한 성격으로 유명하다. 지난해 개봉작 ‘도굴’의 박정배 감독은 이제훈을 두고 “영화밖에 모른다. 만나면 영화 얘기만 한다”고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필모그래피만 봐도 알 수 있다. 이제훈은 2011년 영화 ‘파수꾼’과 ‘고지전’으로 그해 대종상영화제 포함 총 신인상 4관왕을 달성하며 긴 무명 시절 설움을 씻었다. 이듬해에는 영화 ‘건축학개론’ 속 순수 청년 승민 역할을 맡아 말간 얼굴과 섬세한 연기로 여성 팬을 끌어모았다.

이후 탄탄대로로 편하게 걸어갈 법도 한데 이제훈은 어려운 길로 돌아갔다. 일단 ‘건축학개론’과 드라마 ‘내일 그대와’ 외엔 달콤한 멜로물이라곤 없다. 이제훈의 인생 드라마 ‘시그널(2016)’도 김혜수와 얽히긴 하지만 장르물이다. 톱스타들이 부담을 나눠진 멀티 캐스팅 영화도, 한동안 충무로를 달군 느와르 열풍도 피해갔다. 대신 역사 속 인물을 조명한 영화 ‘박열(2017)’,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야기를 그린 ‘아이 캔 스피크(2017)’ 등 깊이 있는 메시지가 담긴 작품을 택했다.

흥행 성적만 본다면 영리하지 못한 행보다. 그렇게 묵묵히 ‘마이 웨이’를 걸어온 지 어느덧 14년, 이제훈의 진심이 통했다. 지난 5월 14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무브 투 헤븐’과 5월 29일 종영하는 SBS ‘모범택시’까지 이제훈은 투런홈런을 쏘아 올렸다. 특히 유품정리사라는 독특한 소재를 10부작으로 녹인 ‘무브 투 헤븐’은 국내외 시청순위 1위에 오르는 등 작품성과 대중성에서 두루 호평이 쏟아지고 있다. 영국의 권위 있는 대중문화 전문 매체 NME는 ‘무브 투 헤븐’을 ‘올해 최고의 작품’으로 꼽기도 했다.



‘무브 투 헤븐’은 아스퍼거 증후군이 있는 유품정리사 한그루(탕준상)와 그의 후견인 조상구(이제훈)가 세상을 떠난 이들의 마지막 이사를 도우며 그들이 미처 전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대신 전달하는 과정을 담은 드라마다. 국내 1세대 유품정리사 김새별 대표의 논픽션 에세이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에서 영감을 받은 윤지련 작가가 시나리오를 쓰고, 김성호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산업재해, 데이트 폭력, 치매 노인의 고독사, 입양아 문제 등 눈물샘을 자극하는 에피소드가 줄줄이 이어진다.

‘있을 때 잘하자’ 반성하게 만든 작품

‘무브 투 헤븐’을 이루는 또 다른 이야기 축은 교도소에서 막 출소한 양아치 조상구의 갱생 과정이다. 2019년 여름 즈음 출연 제의를 받은 이제훈은 시나리오에 반해 이틀 만에 출연을 결정했다. 촬영은 지난해 3월부터 6월까지. 공백기 동안 착실하게 몸을 만들고 액션을 연마해 불법 스포츠 도박 이종격투기 선수로 완벽하게 변신했다.

갈고 닦은 액션은 ‘모범택시’에서도 알차게 활용했다. ‘모범택시’에서 이제훈은 전 육사·특수부대 출신으로 억울한 일을 당한 피해자들을 대신해 복수해주는 김도기 역을 연기했다. 초반 연출 미스로 인한 액션 대역 논란도 있었으나 회가 거듭될수록 화끈하고 거친 매력으로 ‘다크 히어로’, ‘19금 인간’이란 별명도 얻었다.

‘모범택시’와 ‘무브 투 헤븐’ 두 작품 모두 반응이 좋아요.
공교롭게도 두 작품이 비슷한 시기에 나와 걱정이 많았는데 많은 분들이 관심 가져주시고 좋은 이야기를 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모범택시’ 촬영이 엊그제 끝나서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쳐있는 상황인데요. 이런 응원들이 저를 다시 불타오르게 만드는 것 같아요.

이제훈 씨가 시청자 입장에서 본다면 두 캐릭터 중 누구에게 더 호감이 가나요.
고르기 쉽지 않네요. ‘무브 투 헤븐’의 조상구는 처음에는 비호감이지만 여러 사연들을 접하고 남겨진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과정을 통해 긍정적인 사람으로 바뀌어요. 그런 지점에서 특별하지 않나 싶고요. ‘모범택시’의 김도기는 대리만족을 시켜주는 사이다 같은 역할이죠. 이런 사람이 실제로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요. 둘 다 너무나 특별한 인물이에요.

두 캐릭터가 누군가에게 위로를 해준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위로의 방식은 다르잖아요. 연기하면서 혼란스럽진 않았나요.
혼란스러운 건 없었어요. 저는 연기할 때 전작을 답습하지 않으려 경계하고 예전의 인물을 지우려는 노력을 많이 해요. 나중에 이제훈이란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봤을 때 분명히 비슷한 지점이나 표현방식이야 있겠지만, 그래도 외적인 모습과 캐릭터에 대한 마음가짐을 매번 다르게 가져가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위로 방식을 좋아하나요.
저는 이야기를 통해 위로를 받아요. 이야기란 게 드라마가 될 수 있고 영화, 연극, 뮤지컬이 될 수도 있어요. 제가 배우가 된 것도 어려서부터 영화를 많이 보고 심취했기 때문이에요. 저는 영화를 통해 성장했고 인생을 배웠고 위로를 받아 왔어요. 힘든 시간이 계속 찾아오더라도 좋은 작품, 좋은 이야기를 접하면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나도 저런 작품을 만들고 싶고 출연하고 싶다는 감정이 샘솟아요. 신기한 건 이런 경험이 한두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런 인생을 계속 살고 있다는 거예요. ‘무브 투 헤븐’이 여러분에게도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무브 투 헤븐’은 어떤 위로를 주는 작품인가요.
저는 이 작품을 읽고 소통과 관심이 중요하다고 느꼈어요. 당장 내가 가까운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제대로 전해준 적이 있었나, 표현이 좀 미숙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게다가 요즘은 직접 만나는 것에 있어 조심스럽고 힘든 시기잖아요. 이럴 때일수록 가까운 사람이나 잊고 지냈던 사람이 있다면 ‘잘 지내냐. 건강하냐. 나는 이렇게 지낸다’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면 이 시기가 좀 더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요.

특히 추천해주고 싶은 에피소드가 있나요.
2부에 외롭게 돌아가신 할머니와 그 유품을 아들이 받게 되는 에피소드가 펼쳐지는데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눈물이 철철 났어요. 누구나 편지를 써본 경험이 있을 거예요. 저도 부모님께 편지를 썼던 기억이 나면서 과거의 순수하고 혹은 철이 없었던, 지금과는 다른 내 모습이 떠올랐어요. 에피소드가 하나하나 다 소중해서 이렇게 마무리되는 게 아쉬워요.

시즌2가 나왔으면 하는 건가요.
‘무브 투 헤븐’은 사람들에게 보여줬을 때 제가 부끄럽지 않고, 많은 것들을 느끼면서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이에요. 개인적으로는 좀 더 많은 사연이 담겼으면 하는 바람이 큽니다. 조상구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저도 궁금하고요.

그럼 계속 몸을 만들어놔야 할 텐데요. 감독님이 굉장히 열심히 준비했다고 하더군요.
촬영 시작하기 4개월 전부터 끝날 때까지 일주일에 거의 6일, 하루 2시간씩 운동을 했어요. 상구가 과거에 복싱을 했다는 설정은 제가 제안한 거예요. 사각의 링에서 두 주먹으로 주고 받는 피땀이 무척 강렬하면서 동시에 정직한 스포츠라고 생각했거든요. 다행히 제작진이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했어요. 그러다 보니 제가 가진 역량보다 더 해내려다가 부상이 좀 있었어요. 샌드백 치는 장면도 적당히 하면 되는데 더 강렬하게 보여주고 싶어서 오버하고. 재활의학과도 다니고 급하면 진통제도 맞아가며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만족합니다.

‘故 이제훈 작품 리스트 구독권’ 생겼으면

이제훈은 2007년 단평영화 ‘밤은 그들만의 시간’을 통해 데뷔했다. “선배들 보호아래 열심히 연기하기만 하면 됐다”던 신인 시절을 거쳐 이제는 현장을 노련하게 이끄는 중고참이 됐다. 그런 이제훈에게 ‘무브 투 헤븐’의 윤지련 작가는 “200%, 300% 이상의 몫을 해줬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조카로 나오는 탕준상 배우와의 호흡은 어땠나요.
탕준상 배우와는 열아홉 살 차이가 나요. 내가 준상 배우에게 아저씨, 나이든 선배 모습으로 어렵게 다가가지 않을까 고민했는데 오히려 준상이가 날 편하게 대해줬어요. 연기 잘하고 좋은 후배를 얻음과 동시에 인생의 동반자가 된 것 같아요. 예전엔 연기만 잘하자는 생각이 강했다면, 지금은 작품을 같이 만드는 사람들을 생각해요. 제가 작품에 참여하면서 같이 하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생각하고, 더 으쌰으쌰 하는 분위기를 만들려고 하죠.

작품에 대한 마음가짐이 좀 달라진 거네요. ‘무브 투 헤븐’의 모티브가 된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을 쓴 김새별 대표도 만났다면서요.
대화를 나누며 김새별 대표님이 하는 일도, 그 분 자체도 고귀하단 느낌을 받았어요. 유품정리사란 직업은 떠나보낸 사람과 남겨진 사람 그 중간자 역할을 하면서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 굉장히 커요. 진실한 마음이 없다면 정말 하기 힘든 일이구나 생각했어요.

연기 생활을 하며 작품 속에서 죽음을 많이 경험해보았을 텐데 이전 작품 속 죽음과 이번 작품의 죽음이 좀 다르던가요.
보통 태어날 때는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을 받잖아요. 만약 내가 세상을 마감하게 된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찾아와줄까, 떠난 사람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해줄까 생각해보게 됐어요. 결국은 내가 어떻게 살아왔고 사람들에게 어떻게 표현해왔는지에 따라 달라지겠죠. 그런 지점에서 ‘나 잘한 거 같은데?’란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는 ‘내가 좀 인색했나’ 싶기도 하고. 이 작품을 하면서 있을 때 잘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하게 느꼈어요. 그래서 조금 더 내 주변 사람들의 눈을 바라보려고요. 오글거릴 수도 있겠지만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누가 알아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무브 투 헤븐’ 팀이 이제훈 배우의 유품을 정리하게 된다면 그 상자엔 무엇이 있을까요.
안그래도 촬영하면서 생각해봤어요. 저라는 사람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내포되어 있어야 할 유품이어야 하잖아요. 그게 저는 제가 출연한 작품 DVD들 같아요. 배우로서의 인생을 살면서 작품마다 열과 성의를 쏟아 붓고 있거든요. 만약 넷플릭스로 치자면 ‘故 이제훈 작품 리스트 구독권’ 이런 게 생기는 거예요. 고인을 기리는 작품 라이브러리에서 ‘이 배우가 저런 작품도 했었구나’ 하면서 틀어본 후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정말 좋았다’라고 말해준다면 참 좋겠어요. 더 열심히 하고 싶어요.

원톱 배우로 완전하게 자리매김 한 듯 합니다. 앞으로 어떤 역할을 더 해보고 싶나요.
과찬이에요. 아직 부끄럽고 부족하죠. 저는 ‘어떤 캐릭터를 해보고 싶냐, 어떤 위치의 배우가 되고 싶냐’는 질문을 받으면 명확하게 대답하기 어려워요. 좋은 이야기가 있다면 어떤 롤이든 상관없어요. 이따금 좀 쉬어야 할 타이밍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다시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힘은 역시나 이야기거든요. 좋은 작품에 참여한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워요. 그렇다고 의미있는 작품만 해야 된다는 사명이 있는 건 아니에요. 브로맨스 작품은 종종 했던 것 같은데 로맨스는 많이 안 한 거 같아서 조만간 그런 작품도 만나고 싶어요.

요즘은 정말 웰메이드 작품이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모범택시’나 ‘무브 투 헤븐’처럼 에피소드 형식으로 끌어가는 타입도 많고요. 데뷔 15년차인데 이런 콘텐츠의 변화를 체감하나요.
네. 앞으로 드라마 같이 호흡이 긴 작품에서는 에피소드 형식이 더 많이 나올 것 같아요. 저는 우리가 살면서 접하는 뉴스나 사연들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많이 준다고 생각해요. 저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들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목소리를 내서 좀 더 긍정적으로 변화할 수 있을지 고민을 하죠. 이런 사회 현상이나 사연들이 맞물려서 또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킬지 개인적으로 기대 됩니다.

세상에 관심이 많네요. 최근 가장 인상적이었던 뉴스나 관심 있는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의도했다기보단 제작·기획만 하려다가 시나리오 작업부터 연출까지 하게 된 단편영화 프로젝트가 있어요. 요즘을 사는 20·30세대들이 어떤 생각으로 경제를 바라보고 소비하려 하는지, 무엇을 얻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썼고 곧 보여드리게 될 것 같아요.

인터뷰는 이야기로 시작해 이야기로 끝이 났다. 이야기가 좋아 영화배우가 됐고 이야기에 위로받고 에너지를 얻다 못해 이젠 이야기를 직접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이제훈은 단편영화로 연을 맺은 양경모 감독, 김유경 대표와 함께 2019년 제작사 하드컷을 차렸다. 현재 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왓챠와 함께 ‘언프레임드(Unframed)’ 프로젝트를 공동 기획해 진행 중이다. 제작은 하드컷이 맡고, 이제훈을 비롯해 박정민·손석구·최희서 네 명의 배우가 각자 집필한 시나리오를 직접 연출한다. 연내 촬영을 마무리하고 왓챠에서 오는 12월 중 독점 공개할 예정. 쉴 때도 영화 보러 간다는 충무로 소문난 영화광이 만든 이야기가 궁금했지만 이날의 이야기보따리는 여기까지였다. 인터뷰 내내 ‘그런 지점에서 그렇게 생각한다’, ‘그 지점이 그렇다’고 곱씹고 분석하더니 이야기를 끊는 ‘지점’마저 완벽했다.

사진제공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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