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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interview

살인 미소보다 멋진 진짜 배우 김재원

글 김지은

2020. 07. 09

2000년대 드라마를 휩쓸던 배우 김재원이 데뷔 20주년을 맞았다. 1인 기획사 설립과 해외 진출 계획 등을 내놓으며 이제는 사업가로, 만능 엔터테이너로 보다 폭넓은 활동을 준비하고 있는 그를 만났다.

2년 전 배우 김재원(39)이 OCN 드라마 ‘신의 퀴즈 : 리부트’에 살기와 광기로 가득한 현상필 역으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사람들은 몇 번이고 다시 크레디트에 새겨진 배우의 이름을 확인해보아야 했다. 데뷔 이후 20년 가까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뽀얀 피부에 애간장 녹이는 달콤한 ‘살인 미소’를 날리는 미소년으로 기억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연기는 사뭇 강렬했다. 우락부락한 근육에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화려한 문신, 옆머리를 시원하게 밀어붙인 헤어스타일은 그의 광기 어린 눈빛과 너무나도 살벌하게 잘 어울렸다. 복수심에 이글거리는 살인마 ‘현상필’은 그의 연기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2002년, 데뷔 1년 만에 MBC 연기대상 신인상을 비롯한 각종 상을 휩쓸며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그는 이후로도 출연하는 드라마마다 호평을 받으며 시상식 무대를 독식해왔다. 그런데도 예의 새하얀 피부와 선해 보이는 눈빛 때문이었는지 쉽사리 미소년의 이미지를 지우지는 못했다. 배우라고 꼭 작품마다 새로운 이미지를 선보여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카메라 앞에 서기가 힘들 정도의 공황장애를 앓고 있던 그에게 지난 몇 년간의 연기 생활은 감당하기 어려울 만치 엄청난 무게로 다가왔다. 그런 시기 ‘브레인 또라이’라는 별명을 가진 현상필이라는 인물은 배우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스스로의 심연을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또다시 1년여가 흘렀다.

스스로 빛나는 존재로, 선한 영향력 전하고파

“휴식과 성장의 시간이 필요했어요.” 

그는 그간 “그냥 쉬었다”고 했다. 최근 1인 기획사 ‘플라비존’을 설립한 김재원은 사실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대만과 홍콩, 중국 등지를 누비며 월드 투어에 나서고 있어야 했다. 홍콩과 대만에서는 영화 촬영이, 베트남에서는 예능 프로그램 출연이, 일본에서는 팬미팅이 기다리고 있었다. 태국에서는 친구의 앨범 작업을 도와주기로 약속했던 터다. 그런데 난데없는 코로나19가 발목을 잡았다. 1년쯤으로 계획했던 휴식의 시간이 예측하기 어려울 만치 길어졌고, 많은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 오히려 자신감에 넘쳤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에 대한 불안보다는 스스로를 보다 세심하게 정비하고 완성시켜나갈 긍정의 에너지가 더 많이 필요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국가’라는 것의 경계가 무의미해진 거 같아요. 개인의 정치적 성향이나 문화적 배경 같은 걸 떠나서 아티스트에겐 언어를 초월하는 부분들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한국을 떠나 세계 어디든 나를 필요로 하는, 나와 함께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고 싶은 사람들과 어떤 형태로든 만나고 싶어요.” 

사실 그가 기획사를 만든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데뷔 초기 소속사와 크고 작은 갈등을 겪은 그는 2년 만에 소속사와 결별하고 독립을 선언했었다. 이후 6년간 독립 엔터테인먼트를 운영하던 그는 그 뒤로도 또 한 번 소속사를 만들어 운영을 한 적이 있었다. 이 정도 연기 경력과 인지도, 경영자로서의 경험이 쌓였다면 큰 소속사를 설립해 스타 군단을 만들어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는 의외의 답변을 내놓았다.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훌륭한 재능을 가진 스타들을 육성하는 것도 좋은 일이겠죠. 저도 연기 교육 같은 건 누구보다 잘 시킬 자신이 있어요. 이미 경험해온 바가 있으니 삶의 철학이나 인성교육 같은 것들도 잘 가르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매니지먼트 회사는 그 뜻을 함께했을 때 빛이 나는 거더라고요. 그 안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오히려 더 큰 트러블을 낳게 되는 거죠. 아무래도 매니지먼트 회사에 소속되어 있다 보면 그 회사가 만든 틀 안에서만 움직여야 하니 이것저것 자유롭지 못한 부분도 있을 테고요. 그래서 이제는, 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팬들과 소통하고 싶어요.” 

그는 누구를 가르치는 것보다, 한 명 한 명이 깨달음을 얻어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더 크고 중요한 깨달음을 준다는 말도 덧붙였다. 

“음악 하는 후배 중에 버클리 음대를 졸업하고, 그 분야에서 재능을 인정받는 친구가 있어요. 그런데 이 친구의 음악이 다른 건 다 좋은데 대중들과의 공감대가 좀 부족한 거예요. 나름 열심히 노력하고 테크닉도 뛰어난데 대중성을 얻기가 힘드니, 이 친구가 어느 날 자기는 그냥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는 것이 낫겠다 그러더라고요. 얘기를 듣고 제가 그랬죠. ‘나는 너의 생각을 매우 존중한다. 너처럼 뛰어난 재능과 기술을 가진 스승을 만나는 것이 제자들에겐 얼마나 큰 기쁨이겠니.’ 그러고서는 그 친구를 LP 바에 데려가서 마이클 잭슨의 무대를 보여줬어요. ‘마이클 잭슨은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르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수백만이 저 무대를 보고 배웠다’고요. 어떤 것이 더 만족스러운 삶일지는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는 말도 해줬어요.” 

말은 때로 구차한 설명을 위해 붙이는 군더더기일 수도 있다. 진정한 가르침은 멋진 말 한마디, 근사한 표현이 아니라 보는 순간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람들은 스스로 빛을 내는 사람을 보면서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을 통해 스스로 빛을 내는 방법을 터득한다. 대형 기획사를 만들어 스타 지망생 한 사람 한 사람을 키워나가는 것보다 스스로 본받을 만한 선배, 닮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이 더 크고 원대한 꿈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라는 깨달음 뒤에는 더 묵직한 책임감과 사명이 기다리고 있다.

배우 김재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것

그가 드라마 ‘신의 퀴즈 : 리부트’에서 현상필을 연기했을 때 혹자는 드디어 살인 미소 이미지를 탈피할 기회를 얻었다고 했고, 연기 변신에 성공했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표현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어쩌면 그런 말들이 누군가가 가진 본연의 모습을 앗아가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좀 바뀔 때가 되지 않았니, 좀 바뀌어야 해. 그런 말들 참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호랑이 자식은 호랑이로 살아야 하고 뱀의 자식은 뱀으로 살아야지 호랑이가 뱀이 되고 뱀이 호랑이가 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빛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 빛과는 다른 모습을 강요당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본연의 빛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때로는 그 사람의 미소를 앗아가버릴 수도 있는 거고, 본연의 감정을 숨기고 억압된 삶을 살도록 만들어버릴 수도 있는 거죠.” 

그는 요즘 본연의 것, 자연 그대로의 순수를 탐미하는 것에 푹 빠져 있다. 수많은 경험과 지식을 통해 다듬어진 아름다움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그 어떤 것에서도 자유로운, 원석 그대로의 순수한 아름다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순수한 미소를 가진 인간 김재원이 그 원석의 빛을 가진 존재라면,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김재원은 수많은 경험과 지식을 통해 다듬어진 값진 보석일 것이다. 

그에게 배우란 각자가 잊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일깨우고 찾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누군가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아, 내게도 저런 모습이 있었지’ 깨달으면서 자신의 내면을 일깨울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온전히 배우로서의 소임을 다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배우는 뭐든 다 해보아야 한다고 믿는다. 자신의 요리가 어떤 맛을 내기 위해서는 어떤 재료와 양념이 필요한지, 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기술적인 연기를 보여준 측면이 많았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런 연기는 얼마든지 해보일 수 있고요. 하지만 이제는 좀 더 나다운 연기를 하고 싶어요. 작품에 대한 나만의 해석이 어우러져서 그 호흡을 통해 대중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습니다.” 

얼마 전 출연했던 TV조선 교양 프로그램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에서 “성숙하고 진정성 있는 배우로 거듭나고 싶다”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가 생각하는 진정성이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나를 버려라, 마음을 비워라, 그렇게 하면 무언가 보일 것이다 얘기를 합니다. 하지만 저는 반대입니다. 지금 내 앞에 닥친 현실 세계를 잘 살아가는 것이 제일 중요하거든요. 그것이 나라는 존재가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현실을 회피하거나 도망가는 건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결국엔 다시 해결되지 못한 문제 앞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으니까요. 오히려 내 앞에 닥친 문제를 스스로 잘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갖추는 쪽이 훨씬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인 거죠.” 

그는 스스로를 엄청난 ‘실용주의자’라 칭했다. 철학과 명상 등 영적인 것에 심취해 있긴 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져 이상만으로 가득한 철학과 명상은 인생을 낭비하게 만드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김재원의 ‘실용주의’적 실천은 매일 하는 명상으로 시작된다. ‘명상’이라고 무언가 엄청나게 거창한 의식 같은 것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의 일과를 파노라마처럼 훑어보면서 그날 잘 살았는지, 그 안에 존재하는 자신의 모습이 어땠는지 되짚어보는 식이다. 부족한 부분이나 보완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조금 더 깊은 명상을 통해 앞으로는 어떤 방식으로 개선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는 최근 해외 진출을 준비하면서 새로운 이름 하나를 얻었다. ‘헤로스(HEROS)’. 올림포스의 12신 중 하나인 헤르메스(Hermes)와 사랑의 신 에로스(Eros)를 합한 이름으로 생명과 사랑의 상징이다. 재원이란 이름이 외국인들이 기억하기엔 낯설고 어려운 느낌이라 고민 끝에 정한 것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이름에 책임을 지며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떠올린 것이다.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게 무얼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죠. 그랬더니 문득 생명, 그리고 사랑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더라고요. ‘사랑’은 세상의 모든 현자들이 궁극의 깨달음에 다다랐을 때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살릴 수 있는 힘을 지녔잖아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제우스의 아들 헤르메스를 좋아합니다. 헤르메스는 제우스가 아끼는 여행의 신으로 굉장히 정보에 능하고 지식이 풍부한, 상인들의 수호신이기도 하죠. 지옥과 천계를 오갈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싸움을 중재하거나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포털 사이트 네이버의 상징인 날개 달린 모자가 바로 헤르메스의 모자입니다. 모든 지식과 정보를 갖고 있는, 건장하고 미래지향적인 청년이죠.”

가족은 나와는 다른 타인

쉬는 동안 주로 무엇을 하며 지냈나 궁금했다. 여행을 다녀왔다거나 독서, 서예 같은 취미 활동에 열심인 것 외에 일반인으로 알려졌다가 나중에 유명한 CF 감독으로 밝혀진 아내에 관한 이야기도 듣고 싶었고, 기왕 사업을 시작한 김에 엔터테인먼트 일을 두 사람이 함께해보는 것도 생각해보았음직하다 싶었다. 하지만 그는 가족에 대해서만큼은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자신이 대중에게 노출된 연예인이라고 해서 가족들의 사생활까지 오픈하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라는 생각에서다. 

“가족이 서로에게 편안한 휴식처가 되려면 각자의 삶을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엮어서는 안 되는 거 아닐까요. 사람들은 꽃이 예쁘면 함부로 꺾어도 된다고 착각하죠. 내가 예쁘다고 생각하면 함부로 만져도 된다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관계에는 존중이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존중을 해줘야 상대도 나를 존중할 수 있는 거고요.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각자의 영역이 있는 것이고 서로 다른 이상향을 가질 수 있으니까요. 사랑을 핑계로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속박한다면, 혹은 ‘내가 너에게 무언가를 해주었으니 너도 나에게 뭔가를 해줘야 해’라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닌 착각에 불과할 겁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아이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사소한 무언가를 함께할 때조차 그는 늘 아들의 의사를 먼저 묻는다. 부모가 먼저 자식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으면 자식들도 부모를 존중하지 않게 된다는 생각에서다. 그리고, 그렇게 합의된 서로의 일상에 대해서는 또다시 철저하게 보호하고 지켜주어야 한다는 분명한 입장도 갖고 있다. 아들의 사생활을 보호하고픈 마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김재원 스스로도 가족과의 소소한 일상까지 타인들과 공유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크다. 

“요즘에는 많은 사람들이 SNS에 자신의 일상을 올리고 호응을 얻는 것으로 소통을 하더군요. 하지만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혼자만 간직하고 싶은 것들이 있지 않나요. 제 삶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때로는 오로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억지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정말 행복할까 싶더라고요.” 

그는 시종일관 진지하고, 또 유쾌했다.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들, 하지만 누구도 쉽게 ‘NO’를 말하기 어려웠던 부분에 대해서까지 이토록 진중한 답을 얻을 수 있었으니 그의 실용주의 철학은 꽤나 힘이 센 듯 느껴졌다. 생명과 사랑의 신 헤로스, 세계 무대로 향할 그의 미래를 기대해본다.

사진 김도균
의상협찬 마에스트로 닥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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