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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도 친구 따라? 청소년 삼키는 ‘패션 정신병’

이경은 기자

2022. 09. 23

유튜브 알고리즘에 충격적인 영상이 떴다. “나는 실패작이래”라는 가사의 일본 노래, 장난감 칼을 들고 선 어린아이, 아래엔 “자살하여슴미다”라는 자막이 달려 있었다. 영상 속 아이는 노래에 맞춰 괴로워하다 장난감 칼로 자신의 가슴을 찌르고 쓰러진다. 유튜브 속 이와 유사한 영상은 수십 개. 우울, 자해, 자괴감은 어느새 아이들의 SNS 놀잇감이 됐다.

“XX, 자살하고 싶다.”

8월 22일 A(15) 양은 마음이 답답해지자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이런 문구를 올렸다. 그의 계정은 ‘우울계(우울한 마음을 털어놓는 계정)’와 ‘자해계(자해 사진을 올리는 계정)’. A 양은 기분이 안 좋을 때면 계정에 죽고 싶다는 내용의 글을 쓰거나 자해 사진을 게시한다. A 양이 글을 올리면 다른 계정들도 이에 공감하며 위로를 보낸다. A 양은 아버지의 폭력과 가족 불화로 답답한 마음을 털어내려 계정을 시작했다. 그의 우울계는 이달로 석 달째, 어느새 A 양의 일상이 됐다.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자신의 우울증이나 우울감을 털어놓는 행위는 이전에도 있었다. ‘우울블(우울 블로그)’ ‘우울스타그램(우울 인스타그램)’ 등이다. 스마트폰 사용 연령이 점차 낮아지면서 이런 문화는 감정 표현이 미숙한 청소년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일부 학생은 자신의 감정과 질병을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자살, 자해와 같은 심각한 문제를 유행으로 소비하는 것. 소아·청소년 전문가들은 “정신질환을 드러내 치료받는 문화는 긍정적이지만 우울이 이러한 방식으로 다뤄지면 감정이 성숙하지 않은 아이가 우울하거나 불안한 분위기에 지속 노출되기 쉽다”면서 “아이들에게 중장기적 부정 영향을 끼칠 수 있어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진짜 정신병? 가짜 정신병?

일본 노래 '실패작 소녀'에 맞춰 극단적 행동을 흉내내는 아이들

일본 노래 '실패작 소녀'에 맞춰 극단적 행동을 흉내내는 아이들

‘패션 정신병’은 우울증, 자살 충동, 자해 등 정신 문제를 유행으로 소비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인터넷 신조어로, 말 그대로 ‘패션처럼 정신병을 두른다’는 뜻이다. 이 용어는 웹상에서 우울계, 자해계, ‘멘헤라계(멘털 헬스(정신 건강)가 좋지 않은 사람의 계정)’ ‘정병계(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의 계정)’ 등 정신 문제를 전면에 드러내는 계정이 많아지자 서로를 가짜 정신질환과 진짜 정신질환으로 구분 짓기 위해 등장했다.

SNS상에서 비교적 덜 우울해 보이는 사람을 패션 정신병으로 칭하는 식이다. A 양도 “(자신이 볼 땐) 80%가 패션 정신병 계정”이라면서 “좋은 부모 밑에서 사랑받고 자라면서 정신병이 있는 척하는 사람들이 제일 싫다”고 말했다.



‘패션 정신병’이라는 명칭이 등장할 정도로 SNS에 “스스로 정신질환이 있다”고 말하는 청소년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강병훈 서울연마음클리닉 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은 “시작은 감정과 질병을 혼동하는 상태”라고 말했다. 슬픔을 우울증으로, 긴장이나 두려움을 불안증으로 치환하는 식이다. 강병훈 원장은 “감정 표현에 미숙한 청소년들이 자신의 문제를 절실하게 호소하기 위해 슬픔이나 고통을 질병의 진단 기준에 맞춰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자해 사진을 올리는 계정을 운영하는 김 모(15) 양은 “(자신이) 패션 정신병일 수도 있다”고 운을 뗐다. 김 양은 부쩍 우울하던 어느 날 외로움과 호기심에 SNS 계정을 만들었다. 현실 세계에선 늘 혼자였던 그는 SNS에 자해 사진을 올리자 처음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우울해하니 누군가가 날 좋아하는구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 뒤로 그는 실제 우울할 때는 물론 그렇지 않을 때도 자해 사진을 찍어 올렸다. 커뮤니티에서 인정받기 위해 일부러 자해를 한 것이다. 김 양은 “팔로가 많아질수록 이야기를 들어주고 걱정해주는 사람이 많이 생겨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 계정 운영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손석한 연세신경정신과 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은 “이런 모습이 일종의 집단치료인 자조 모임과 닮아 있어 더 위험하다”고 말한다. 자조 모임에 참가한 이들은 상담 공동체에서 서로 경험을 공유하고 공감하면서 자신이 느끼는 슬픔을 덜고 위안받는다. 하지만 SNS상엔 이 상담을 전문적으로 이끌어가거나 지도하는 사람이 없다. 손 원장은 “전문가 참여 없이 정신 문제를 겪는 이들끼리만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 대화가 점차 주목받기 위한 ‘우울 경쟁’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며 “우울을 덜어내는 이점이 있을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고, 서로 대화를 나눈 뒤에도 계속 우울함을 유지해야만 그 집단에 남을 수 있다는 위험한 생각을 하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스마트폰 타고 퍼지는 ‘패션 정신병’

영상에 달린 칭찬 댓글들.

영상에 달린 칭찬 댓글들.

인터넷 커뮤니티에 처음 노출되는 나이는 점점 낮아지는 추세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발표한 ‘2020 어린이 미디어 이용 실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초등학교 고학년 스마트폰 보유율은 87.7%, 6학년 보유율은 92.6%에 달했다. 유튜브 등 동영상 플랫폼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연령대가 점차 낮아지는 셈이다.
초등학생들도 많이 이용하는 유튜브 쇼츠나 틱톡 등에서는 정신병 자체를 일종의 놀이로 소비하는 것이 유행처럼 퍼지고 있다. 짧은 영상 플랫폼에 올라오는 자살·자해 모방 영상이 그 예다. 출연자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아이들이 대부분이다. 흑백 배경에 우두커니 서 있는 아이, 총을 맞는 흉내, 그리고 배신당했다는 자막에 아이가 쓰러지는 모습까지.

이 영상을 단순한 놀이로 볼 수도 있지만 전문가들은 유행이 가진 위험성을 경고한다. 강병훈 원장은 “감정이 성숙하지 않은 어린아이가 무분별하고 지속적으로 우울한 분위기와 불안한 분위기에 노출되는 경우, 본인의 감정과 외부 분위기를 혼동하면서 일시적 혹은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주변에서 이러한 영상에 반응해줄수록 아이는 관심에 중독될 수 있다”며 “이 경우 스스로 그만두기 어려울 뿐 아니라 더 자극적인 영상을 원하는 집단의 압력에 강하게 반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청소년기는 집단을 이루고자 하는 특성이 있어 ‘또래 압력(같은 연령대 친구들이 암묵적으로 정한 규범에 따라 생각하고 실행에 옮기도록 요구하는, 개인 간의 상호작용에 영향을 주는 힘)’ 현상이 잘 나타난다. 실제로 아이들이 올린 자살·자해 모방 영상의 댓글엔 잔혹 행위를 더 잘 따라 할수록 칭찬하는 댓글이 많이 달렸다.

치료보다는 관심과 교육

커뮤니티 내 다른 이용자에게 자해 여부를 묻고 있다.

커뮤니티 내 다른 이용자에게 자해 여부를 묻고 있다.

SNS에서 정신병 문화에 빠져드는 청소년들의 공통점은 마음속에 심각한 외로움이 똬리를 틀고 있다는 것. 그들은 ‘괴롭다’ ‘우울하다’ ‘죽고 싶다’는 말을 SNS상에서 반복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는다. 전문가들은 “이런 학생들에게는 정신과 치료보단 따뜻한 관심을 가지고 교육적인 면에서 다가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김 양도 “‘위(Wee)클래스’에서는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 외부에 유출될 걱정 없이 허심탄회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담 선생님이 있어서다. 위클래스는 학내 상담 교실로, 학생의 보호자가 상담내용을 알고 싶어도 자녀의 동의가 있어야 가능하다. 노혜련 숭실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가장 좋은 상담은 상담이 아닌듯한 상담이다. 위클래스나 학교사회복지실에서는 학생들이 학내 공간을 오가면서 자유롭게 상담교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특히 학교사회복지사는 개별 아동의 상황에 따라 부모와 상담을 하거나 지역사회에 지원을 요청하는 등 통합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학교사회복지실을 확대하고 상담 인력을 전문화해 위클래스 운영을 강화해야한다”고 덧붙였다. 2022년 4월 1일 기준 전국 초·중·고등학교 위클래스 구축률은 71.4%, 아직 4곳 중 1곳의 학교엔 위클래스가 없다.

자신의 계정을 다른 이용자에게 소개하는 양식.

자신의 계정을 다른 이용자에게 소개하는 양식.

전문가들은 부모의 역할도 강조했다. 노혜련 교수는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의 경우 부모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면 자연스럽게 이상 행동이 줄어들 것”이라며 “공부 등의 목적으로 아이를 방치하는 게 아니라, 함께하는 건강한 놀이 시간을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강병훈 원장은 “부모가 청소년 자녀의 우울계, 자해계 운영을 알게 되면 당황하거나 놀라기보다 여유 있는 대처가 필요하다”며 “충동적이고 순간적인 감정도 존중받아야 하지만, 자신의 지속적인 감정을 살필 수 있도록 교육을 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우울계 운영을 고백한 A 양의 말이다.

“멀쩡해 보여도 생각보다 비행 청소년인 경우가 많아요. 몇 달 전엔 저도 학교에서 사교성 좋고 성실한 아이였으니까요. 아직 성숙하지 못한 만큼 항상 부모님의 많은 관심이 필요해요. 그래야 저처럼 안 돼요.”

#패션정신병 #청소년정신병 #여성동아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사진출처 애플리케이션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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