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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사극 남신’에서 사랑을 갈구하는 성소수자로, 정일우의 변신

윤혜진 객원기자

2024. 02. 22

어떤 말을 하든 “노력하고 있다” 또는 “고민하고 있다”로 끝이 났다. 이게 바로 19년 차 배우 정일우가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 아닐까. 연극이 막을 내리는 3월 말까지, 정일우의 고민 여정은 계속될 듯하다. 

배우로서 누구나 단박에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인생 캐릭터를 갖는다는 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언젠가는 뛰어넘어야 할 담을 쌓는 것이기도 하다. 아늑한 담장 안에서만 머무르면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없다. 지난 2006년 MBC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데뷔한 정일우(37)는 첫 작품 이후 바로 주연급으로 뛰어올랐다. 50작품 넘게 섭외가 들어왔을 만큼 ‘거침없이 하이킥’의 시크한 꽃미남 고등학생 이윤호 역할은 큰 사랑을 받았다. 심지어 ‘거침없이 하이킥’은 유튜브에서 짤이 인기를 얻으며 점점 더 레전드 작품이 되고 있다.

물론 정일우도 ‘거침없이 하이킥’을 떼야 할 꼬리표로 생각하지 않는다. “밑거름이 되어준 작품이고, 데뷔작에서 인생 캐릭터를 만난다는 건 정말 행운”이라며 고마워한다. 다만 다양한 색을 보여주는 게 배우의 미덕이다. 도전을 거듭하며 팬들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튀는 정일우에게 팬들은 ‘청개구리’란 별명을 붙여줬다.

‘사극 남신’에서 사랑 갈구하는 성소수자로



청개구리는 또 한 번 멀리 뛰어올랐다. 이번엔 연극이다. 지난 1월 21일 막을 올린 ‘거미여인의 키스’는 ‘엘리펀트 송’ 이후 5년 만의 무대 복귀작이자 세 번째 연극 작품이다. 가뜩이나 오랜만에 서는 연극 무대라 부담감이 클 터. ‘거미여인의 키스’는 아르헨티나 출신 마누엘 푸익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세계적인 작품이다. 이념과 사상이 다른 두 남자, 발렌틴과 몰리나가 감옥에서 만나 서로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피어나는 인간애와 사랑을 다룬다. 국내에서도 2011년 초연 이후 2015년, 2017년까지 매 시즌 평단과 관객의 뜨거운 호평을 받아왔다. 심지어 이번 작품에서 정일우는 자신을 여자라고 믿고 있는 낭만적인 감성의 소유자 몰리나 역을 맡았다. 어느 것 하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이 연극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정일우는 오히려 “오랜만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어서 기회가 되면 꼭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다만 대본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발렌틴이 더 매력적이라고 느꼈어요(웃음). 하지만 오랜만에 연극에 복귀하는데 어떤 캐릭터를 선택하면 좋을까 생각해보니 몰리나가 더 욕심이 나더라고요. 도전이었죠. 캐릭터를 만들어감에 있어서 정말 쉽지 않은 여정이었고, 아직도 찾아가고 있어요. 다행히 형들이나 연출님께서 많이 도와주셨어요.”



여자로 사는 남자 역할이다 보니 아무래도 보이는 모습에 눈이 먼저 간다. 정일우는 몰리나 캐릭터를 위해 다리 왁싱을 하고 직접 주문 제작한 가발도 쓴다. 지난 2월 1일 열린 ‘거미여인의 키스’ 프레스콜에서 본 정일우는 선이 고운 외모 덕분에 화려한 로브가 잘 어울렸다. 평소보다 조금 높은 톤의 목소리도 그리 튀지 않았다. 특히 다리를 모으고 새초롬하게 앉아 있거나 난처할 때 손가락을 가만두지 못하는 등 섬세한 동작들이 인상적이었다.

원래도 한번 꽂히면 끝장을 보는 성격인 정일우는 작품을 준비하며 평소 생활할 때도 몰리나처럼 생각하고 말하려고 노력했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정일우는 그동안 ‘돌아온 일지매’ ‘해를 품은 달’ ‘해치’ ‘보쌈-운명을 훔치다’ 등 많은 사극에서 활약해온 ‘사극 남신’이다. 보는 관객 입장을 떠나 연기하는 입장에서도 저음이 아닌 목소리로 예쁘게 말하는 건 어색했을 만하다. 게다가 균형을 잡지 못하면 열심히 할수록 과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는 게 여장 남자, 남장 여자 연기다.

“제가 잡은 몰리나 캐릭터는 유리알처럼 건드리면 깨질 것 같고 약해 보이지만, 자기의 감정이나 마음에 대해서는 굉장히 솔직한 캐릭터예요. 그래서 유리알 같은 섬세함을 표현하기 위해 손동작이라든지 앉아 있을 때, 걸을 때 모든 행동을 여성스럽게 하면서도 목소리를 인위적으로 만들려고 하진 않았어요. 어떤 톤의 목소리가 몰리나와 가장 잘 어울릴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몰리나와 나의 싱크로율을 100%로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은 했지만 정일우는 이 작품에서 단순히 자신의 여장 연기가 화제에 오르는 것을 원하지 않는 듯 보였다. 정일우는 “‘거미여인의 키스’는 성소수자의 이야기만 다루는 게 아니라 사랑이란 그 자체의 어쩔 수 없는 쓸쓸함과 애절함을 담고 있다”며 “몰리나에게는 ‘사랑’이라는 주제가 굉장히 중요하다. 그래서 몰리나가 갖고 있는 이 사랑의 깊이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 부분을 많이 고민했다”고 말했다.

또 정일우를 깊은 고민에 빠지게 만든 부분은 2인극이란 점이었다.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극을 이끌다 보니 가뜩이나 외워야 할 대사량이 많은데, 내용 전개 방식도 좀 독특하다. 현실 도피적인 성향의 몰리나는 따분한 감옥 생활을 이겨내기 위해 반정부주의 정치범인 발렌틴에게 영화 이야기를 실감 나게 들려준다. 처음에는 시큰둥하던 발렌틴이 점점 이야기에 빠져드는 과정이 두 사람의 감정선 변화로 연결되기 때문에 제법 중요한 장면들이다. 정일우는 영화 이야기와 발렌틴과의 감정, 대화들을 분리해서 접근하려고 노력했다.

“감옥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두 인물이 각자의 감정들을 더 섬세하고 깊이 표현할 수 있는 게 큰 매력이긴 한데요. 몰리나가 두서없이 이야기하는 부분이 많아요. 영화 얘기했다가 발렌틴과 대화하다가 또 다른 말을 하고. 1막 1장부터 영화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이 얘기들이 어떻게 전달돼야 관객들이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정일우의 고민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은 박제영 연출가다. 박제영은 “새벽에도 통화를 많이 했다. 본인이 읽은 논문이나 자료들을 공유하면서 정말 학구적으로 열심히 했고, 연습실에도 일찍 나와서 준비하더라”며 그를 칭찬했다. 정일우의 연기에 대한 열정은 함께 일해본 사람들은 다 안다. ‘보쌈’과 ‘굿잡’ 두 작품에서 연이어 호흡을 맞춘 권유리는 첫 사극 도전 당시 “장면 하나하나를 만들어갈 때마다 이야기를 많이 했다. 캐릭터를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줬던 선배”라며 정일우를 칭찬한 적도 있다.

그런 성실함과 섬세함을 지닌 정일우가 30대에 들어서면서 캐릭터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졌다. 20대 때는 이전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색다른 캐릭터가 없을까 고민했다면, 30대에는 이미지를 깨려 하기보다 맡은 배역을 좀 더 발전된 캐릭터로 만들어나가는 데 관심이 많다. 그래서 하나의 캐릭터를 진득하게 파고들어 연기해볼 수 있는 연극 무대를 좋아한다.

“연극이라는 무대는 여느 장르와 정말 달라요. 긴장감도 크지만 관객들과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죠. 한 작품을 거의 30번 넘게 반복하면서 캐릭터의 깊이를 알아가고, 그러면서 배우로서의 배움도 하나씩 늘어가는 듯해요. 기회가 된다면 평생 연극 무대에 서고 싶어요.”

“평생 연극 무대에 서고 싶다”는 말을 하기엔 아직 30대, ‘평생’은 조금 이른 단어가 아닐까 싶었는데 정일우에 대한 자료를 찾다 보니 꽤 오래전부터 연극에 진심이었다. 3년 전 패션매거진 ‘바자’ 화보에서도 “‘엘리펀트 송’을 하면서 많은 걸 배웠다”며 연극을 향한 일편단심을 고백했었다. 당시 정일우는 연극의 장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무대에 올라가기 전 기본적으로 두 달 이상 연습을 하는데, 그러면 캐릭터에 대한 몰입감이 훨씬 더 깊어진다. 매일 같은 작품을 하지만 같은 연기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나 관객과 가까이서 소통할 수 있다는 것도 굉장히 매력적이다”라고. 그러면서 “내년에 시간만 맞는다면 꼭 다시 도전해볼 생각이다”라고 했는데 시간이 좀 더 흐르긴 했지만 결국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한결같고 집요하다.

슬플 때 울 수 있는 몰리나에게 부러움 느껴

1월 21일 시작해 프레스콜 당시 4회차 공연까지 마친 상태였던 정일우는 가장 와닿는 대사로 1막에 나오는 “나는 내가 슬프다고 느끼면 울 거야”를 꼽았다. 스무 살에 데뷔해 대중의 시선을 의식하는 ‘배우 정일우’로 어느덧 삶의 절반 가까이를 살아왔기에 울고 싶을 때 마음껏 울 수 있는 몰리나가 정일우는 부러웠던 모양이다.

“몰리나는 자기가 느끼는 감정이나 자신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솔직한 사람이에요. 그 점이 굉장히 부럽더라고요. 아무래도 저는 어떨 때는 가면을 쓰기도 하고, 또 원래 내성적인 부분이 있어서 제 감정을 몰리나처럼 막 드러내진 못해요. 그래서 몰리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솔직한 게 몰리나의 매력이니까 조금 더 자유로워졌으면 좋겠어’예요. 자신을 가두지 말고 더 당당하게 살아갔으면 해요.”

어쩌면 이 말은 몰리나를 연기하고 있는 정일우가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정일우에게는 우울한 감정도, 아픈 몸 상태도 드러낼 수 없는 시간들이 있었다. 2012년 ‘해를 품은 달’이 대박 난 후 성공 가도를 달리던 중 이듬해 2013년, 두통이 심해 병원을 찾았다가 뇌동맥류 진단을 받았다. 뇌동맥류란 뇌동맥 혈관 일부가 약해지고 결손이 생겨 해당 부분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질환이다. 뇌동맥류 파열로 인한 사망률은 25%에서 최대 50%에 이른다. 그러나 당시 겨우 스물일곱 살에 불과했던 정일우는 3년 동안 투병 사실을 밖으로 알리지 않았다. 만약 그의 군 입대 즈음에 한 언론매체에서 단독 보도로 기사화하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도 혼자만 감내하고 있을지 모른다. 뇌동맥류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아 군 면제 사유인데도 정일우가 재검 없이 대체복무를 이행하려다 소식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대체복무 판정은 앞서 2006년 있었던 대형 교통사고 후유증이 이유였다.

처음 뇌동맥류 진단을 받고 정일우는 우울증이 와서 한 달 넘게 집 밖으로 못 나갔다. 그러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하고 싶은 건 다 해보고 현재를 즐기자’는 마음으로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났다. “아무 생각 없이 걸었던 그 시간들이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때”라는 정일우는 그 이후로 많이 달라졌다. 조급했던 마음을 많이 내려놓았고 소소한 행복이 무엇인지도 알게 됐다. 덕분에 하루하루 감사함을 느끼며 지내는 요즘, 주변을 열심히 살피고 익히면서 언젠가 나타날 다음 인생 캐릭터를 향해 다가가고 있다. “배우의 상상력은 시선에서 나온다”는 정일우에게 자신 말고도 같은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가 둘이나 더 있는 연극은 형형색색 물감을 짜놓은 팔레트 같다. 이 색깔 저 색깔 비교하고 섞어도 보다가 오늘의 무대에서 정일우는 무슨 색을 고를까.

“몰리나를 맡은 배우마다 표현하는 방식이 굉장히 달라요. 저는 저만의 몰리나를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사실 아직도 저는 무대에 올라오기 전까지 계속 대본을 붙잡고 있어요. 아마 ‘막공’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할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두 달 이상을 연습하다 보니 연기가 매너리즘에 빠질 때도 있는데요. 처음 보는 분도 있을 테니 매번 최선을 다해서 표현하려 합니다.”


#정일우 #거미여인의키스 #여성동아

사진 이상윤
사진 제공 레드앤블루 
사진 출처 정일우 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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