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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위작 논란’으로 가려진 천경자를 닮은 여인들

안현배 예술사학자

2023. 07. 06

1933년 ‘신가정’으로 창간한 ‘여성동아’는 올해 90주년을 맞았다. 창간호부터 1981년 3월까지 표지를 장식했던 수많은 그림의 역사를 되짚어본다.

1969년 1월호.

1969년 1월호.

1874년 4월 15일 프랑스 파리의 카푸신 대로. 사진작가 나다르의 스튜디오에서는 30여 명의 화가가 참석한 가운데 ‘이름 없는 작가들의 전시회’가 열렸다. 훗날 ‘인상파의 첫 번째 전시회’라고 고쳐 불린 이 행사장에는 유일한 여성 작가가 있었다. 바로 베르트 모리조다. 그는 이 전시회 첫 회에 참석한 이후 해마다 꾸준히 전시에 개근하면서 많은 작품을 발표했으나 동료 화가 드가, 모네, 르누아르에 비하면 명성은 덜 알려졌다.

베르트 모리조가 존재감이 적었던 건 비교적 덜 과감한 주제 선정과 부드러운 기법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언론 기자들이 그가 여성 화가라는 이유로 ‘배려’를 했던 게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모네와 르누아르는 언론의 집중 공격을 받으면서도 자신들의 새로운 예술을 방어하며 무대 전면에 나섰다. 반면 모리조는 당시 독자적인 판단 없이 남자 화가들에게 속아 전시에 참여했을 것이라는 추측 정도에 머물렀다.

예술 인프라가 갖춰져 있는 당대 유럽에서조차 여성 화가는 제한적으로 다뤄졌다. 이러한 환경에서 극소수의 작가만 간택받듯 협소한 자리에 존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20세기 초 전 세계를 뒤흔든 두 번의 전쟁이 끝난 뒤 여성의 사회 참여가 자연스러워진 새로운 시대가 오기 전까지 말이다.

일제강점기, 6·25전쟁, 전후 복구까지 난관의 연속이었던 한국 현대사에서 예술 분야의 정상적인 발전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서양화 분야는 일본 등에 유학을 갔던 소수의 천재적인 화가들이 서둘러 소화해내는, 다소 성급한 성과에 만족해야 했던 때도 있었다. 오랜 시간 체계적인 교육과 지원이 필요한 예술 분야로서는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그런데 한국 근현대 예술의 역사에서 천경자는 특별한 존재감을 빛내고 있다. 그의 예술 세계를 설명하는 데 ‘여성 화가인데도 불구하고’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천경자의 예술을 대할 때 ‘한국 역사의 어두운 부분’이라는 가산점 역시 전혀 필요하지 않다. 천경자는 천경자로서 한국미술의 역사에 단단하게 서 있는 거목이다. 여성 화가가 거둔 이런 성과는 오랜 역사를 써온 유럽에서도 흔하지 않은 일이다.



천경자는 유독 개인적인 불행이 화젯거리에 오르던 시기에 살았다. 특히 그의 가정사는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먹잇감이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과 예술사에 기여한 바는 휘발성 강한 스캔들로 가려지지 않았다. 천경자의 작품은 인간의 삶에 대한 고민과 본질을 만들어내려는 진심을 담고 있다.

1974년 2월호 ‘여성동아’ 표지에 실린 천경자의 그림은 그래서 반갑다. 꽃 장식 사이에 족두리를 쓴 여성의 시선은 약간 아래쪽을 향한다. 이 그림은 같은 해에 그려진 또 다른 여인의 초상화 ‘고’를 떠올리게 한다. 천경자 그림 속 여성은 대부분 자기 자신이었으며, 딸을 모델로 한 적도 있었고 동시에 모두의 모습이기도 했다. 꽃의 오묘한 색감과 우수 어린 눈빛, 그러면서도 내면의 단단한 모습을 보이는 그의 여인들은 가장 사랑받는 주인공들이었기에 표지화로서는 더할 나위 없었을 것이다.

올곧은 천경자의 길

한국 미술의 아이콘, 천경자.

한국 미술의 아이콘, 천경자.

1967년 복간된 ‘여성동아’는 일제에 의해 폐간되었던 전신 ‘신가정’과 그 성격을 조금 달리했다. 박완서 작가가 ‘나목’으로 ‘여성동아’ 여류 장편소설 공모전에 당선되면서 한국 문단에 등장하게 된 것이 1970년이었다. ‘여성동아’는 1970년대부터 빠르게 경제성장 가도를 탄 대한민국의 분위기에 맞게 좀 더 화려한 외관을 갖추고 종합 정보지로서의 역할도 맡았다. 표지에 여성 초상화가 실린 건 ‘신가정’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미 당시 한국을 대표하던 화가였던 천경자가 이를 맡은 건 새로운 변화로 볼 수 있다.

오늘날 천경자 화가와 관련한 기억은 1991년 ‘미인도’를 둘러싼 위작 논란이 많다. “내가 낳은 자식을 내가 모르느냐”는 노화가의 항변이 아직 많은 사람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 이 사건의 미스터리는 아직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국내 미술계는 공식적으로 신뢰받는 위작 검증 방법이 없는 것 아니냐’는 불신을 낳기도 했다. 논란을 둘러싼 대화나 토론이 부족하다는 점도 당시 사건이 남긴 과제다.

수많은 관객을 불러모았던 인기 작가에 관한 스캔들이었기 때문일까. ‘미인도’를 둘러싼 대립에 관한 이야기는 숱한 기사와 TV 프로그램 주제로 다뤄졌다. 그러면서 천경자의 예술에 대한 주목도는 오히려 옅어졌다. 우리는 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여성, 자연을 주제로 한 길 걸어

1971년 6월호(왼쪽), 1974년 2월호.

1971년 6월호(왼쪽), 1974년 2월호.

1924년에 태어난 천경자는 1944년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그가 일본에서 공부하던 때는 야수파·입체파 등이 활발히 소개되고 대부분 학생이 서양화에 집중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동양적인 분위기에 집중해 일본화 공부에 매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천경자의 스승 고바야가와 기요시는 서양화의 파격적인 시도에 관심을 기울이긴 했지만 동양화의 기반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다. 천경자에게 작은 부분도 철저하게 하고 한국적인 것을 발견해야 한다고 충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후 홍익대 미대 교수로 근무하는 등 전란 속에서도 안정된 길을 걸었다. 하지만 새로운 자극에 갈망을 느낀 듯 교수직도 버리고 세계 여행을 떠나면서 오로지 화가로만 살아가기로 결정한다. 이는 세계 여행과 유학이 드문 시기에 시도한 모험이었다. 아프리카, 남태평양, 남미 등을 쉬지 않고 여행하며 이를 작품에 반영한 천경자의 여정은 그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몇 차례에 걸친 변화 끝에 천경자의 그림은 다양한 형태와 색채를 포함하는 인물화로 발전했으나, 항상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점과 자연의 아름다움과 연관한 표현이라는 점에서는 하나의 길을 걸어왔다.

역사는 개인에게 변화를 강요하고, 종종 그 삶을 집어삼키기도 한다. 천경자는 격동의 시기를 살았지만 생명에 관한 고민과 자신의 내면세계를 향한 탐구에 초점을 맞췄다. 그에게 ‘일본 스타일’이라는 비난이 가해진 것은 신기한 일도 아니다. 광복 이후 새 출발한 한국미술은 왜색 배격을 주요 목적으로 삼아 일본으로부터 영향받은 작은 부분도 용납하지 않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전통의 재해석을 이유로 문인화 분위기가 나는 수묵화의 진중함만이 옳은 것으로 강조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색채의 힘이 넘치는 채색화를 섬세하게 그리는 천경자의 스타일은 그녀 가정사와 엮여 그에게 부정적 평가를 가했다. 하지만 가족 모두가 반대했다고 알려진 일본 유학을 감행했듯, 그는 자신의 길을 항상 스스로 인지하던 화가였기에 예술 세계는 일관성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림이 슬픔이나 한을 표현한다는 말은 이제 너무 식상하다. 오히려 천경자의 여성들이 보여주는 시선은 한이 서린 슬픔의 감정이라고 보기엔 거리가 있다. 그가 그린 여성들은 어떨 땐 몽환적이고 어떻게 보면 담담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고집을 갖고 있는 듯하다. 강하지 않게 보이지만 존재감이 느껴지고, 긴장돼 보이지만 무너질 것 같지 않다.

천경자가 꾸준하고 세심하게 싸워왔던 자기 내면의 창작 과정은 아름다움과 성찰을 담은 작품들로 남았다. 정치적인 이유로 비난받았던 그의 화풍은 그림에서 가장 힘을 담고 있는 요소가 아닐까. 여러 겹 덧칠해 깊이를 더하는 방식으로, 이미 그려진 디테일들을 덮기도 하는 천경자의 붓은 수많은 고민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여인들은 마침내 천경자 그 자신을 닮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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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홍중식 기자 뉴시스 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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